지난 6월 말 베이징에서 딸의 유치원 졸업식에 참석했다. 학사모를 쓴 10명의 졸업반 아이들이 한 명씩 무대에 올라 장래 희망을 말했는데, 한국인인 딸을 제외한 모든 중국 아이가 “과학자가 되고 싶다”거나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딸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한국과 중국에서 아이들이 동경하는 직업이 얼마나 다른지 자연스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날 졸업식이 끝난 직후 학부모들은 삼삼오오 모여 어느 STEM(과학·기술·공학·수학) 학원에 보내야 하는지 정보를 공유했다. 서울의 학부모들이 자녀를 유명 초등 영어 학원에 보내기 위한 ‘7세 고시(레벨테스트)’ 준비에 열을 올리는 동안, 베이징에서는 ‘꼬마 과학자’ 양성에 혈안이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대(對)중국 봉쇄에 맞서 기술 자립에 국가 역량을 쏟는 중국의 결심은 교육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투영되고 있다. 유치원생부터 대학원생까지 이공계 공부에 매진하며 거대한 기술 인재 풀이 형성된 것이다.
베이징·상하이 등 대도시의 학부모들은 초등학교 자녀의 명문 중학교 ‘YL(優錄·특별 입학)’을 노리고 강도 높은 과학 교육을 시킨다. ‘초딩 이력서’의 핵심은 수학·과학·코딩 실력 입증이다. 베이징의 직장인 L씨가 보여준 초등학생 아들의 이력서엔 ‘중국 전자학회 로봇 자격증 2급’ ‘스크래치(코딩 프로그램)·아두이노(전자회로 기판) 활용 숙련’ 등 내용이 빼곡히 담겨 있었다. 피아노 콩쿠르 입상, 영어 시험 점수, 승마 자격증은 ‘기타 사항’이었다.
국가적으로 고등학생들의 물리 교육을 강제하는 점도 주목된다. 올해 6월 치러진 대학 입학시험인 ‘가오카오(高考)’ 현장에서 만난 부모들은 “물리 때문에 애들이 고생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중국에서는 34개 성(省)급 지역 가운데 23곳이 물리를 강조한 입시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국·영·수 외에 물리·역사 두 과목 중 하나를 반드시 골라야 하고, 물리 성적은 등급 아닌 원(原)점수로 표시된다. 물리 성적이 있어야 지원 가능한 대학 전공이 전체의 40%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고소득 일자리도 이공계 인재에게 몰아준다. 베이징에서 만난 고소득 일자리 중계 플랫폼 창업자는 “상위 1%로 통하는 사모펀드·컨설팅 업계의 신규 일자리는 이공계 석사나 박사 학위 보유자만 얻을 수 있다”면서 “베이징대·칭화대 출신이라도 문과생은 문턱을 못 넘는다”고 했다.
중국에서 이공계 인재 양성 붐이 일어난 이유는 국가의 기술 올인 기조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난 7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장쑤성에서 젊은 R&D 인력들을 만나 “10년 동안 칼을 가는 집념을 발휘하라”고 했다. 중국은 2010년 국가 계획에서 발표한 IT·로봇·전기차·우주항공 등 전략 산업 리스트를 10여 년째 유지하고 있다. 글로벌 기술 산업 레이스에서 중국과 정면 대결을 피할 수 없는 한국에 중국의 ‘군부대 양성’ 식 인재 확보는 커다란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베이징=이벌찬 특파원 조선일보 입력 20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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