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상식

피먹는 빈대 이어 살먹는 '이놈'…韓도 노린 '보이지 않는 킬러'

해암도 2023. 11. 27. 06:08

미국 남서부 애리조나주(州)에 사는 에릭 매킨타이어(53)는 어느 날 갑자기 기력이 떨어지더니 체중이 줄었다. 피를 토하더니 얼굴과 팔에 염증이 생겼다.

그가 진단받은 병은 곰팡이 감염병인 '계곡열(Valley fever)'이었다. 매킨타이어는 항진균제 치료를 받았지만, 합병증으로 하반신이 마비돼 걷을 수 없게 됐다. 그는 "대체 어디서 이 곰팡이 포자를 흡입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 관광객이 지난 7월 11일 미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 국립공원에서 극심한 더위를 경고하는 표지판을 지나가고 있다. AP=연합뉴스

 

미 남서부에서 주로 발생하는 계곡열은 대기 중 곰팡이 포자를 흡입하면 감염된다. 초기 증상은 기침·고열·발한 등 감기와 유사한데, 일부는 체중감소·각혈·뼈 손상·폐 종양 등 심각한 증상으로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난 13일 매킨타이어의 증상을 소개하며 계곡열을 일으키는 '콕시디오이데스'라는 진균을 '살을 먹는 곰팡이(flesh-eating fungus)'라고 표현했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이 곰팡이 질병은 2000년대 초만 해도 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20년이 지난 현재 연간 2만건을 훌쩍 넘겼다. 미국에서 최근 매년 약 200명이 사망하고 있다.

 

온난화가 퍼뜨린 '살 먹는 곰팡이'   

 

전문가들은 계곡열 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기후 변화를 주목하고 있다. 미 남서부는 최근 들어 기온은 더욱 높아지는 한편 국지성 호우가 빈번해지고 있다. 올여름 애리조나주 피닉스는 섭씨 40도가 한 달 넘게 이어졌고,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 국립공원엔 하루 동안 1년 치 폭우가 내렸다.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이 곰팡이는 빠르게 성장했고, 이후 극도로 건조한 환경에서 살아남아 포자가 돼 공기 중에 흩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시간대에서 곰팡이를 연구하는 제니퍼 헤드 전염병 학자는 "이 곰팡이는 비정상적으로 습한 날씨에서 번성한 후, 땅이 마르면서 폭발적으로 확산한다"고 전했다. 이를 두고 "계곡열은 기후 변화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된 감염병"이라고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의 라샤 쿠란 감염내과 전문의가 지적했다.

 

지구 온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계곡열을 일으키는 곰팡이는 미 전역으로 퍼질 수 있다. 미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의 지구과학자 모건 고리스가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210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이 줄어들지 않고 지구 온난화가 계속되면, 이 곰팡이는 미 서부 전역에 퍼지고 나아가 북부 및 캐나다 국경까지 닿게 된다. 향후 수백만 명이 계곡열에 걸릴 수 있다는 뜻이다. WP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곰팡이가 지구 온난화 등 기후 변화로 인해 '보이지 않는 살인자'가 됐다"고 지적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가 공개한 배양된 곰팡이 칸디다 아우리스 종. 고온에도 살아남고 내성이 생겨 '수퍼 곰팡이'로 불린다. AP=연합뉴스

 

기온이 올라가면서 내성이 생긴 치명적인 곰팡이도 등장하고 있다. 지난 2009년에 발견된 '칸디다 아우리스'는 고온에서도 살아남고, 항진균제도 듣지 않아 매우 위험해 '수퍼 곰팡이'로 불린다. 이외에도 기후 변화에 적응해 더 강해진 다른 곰팡이가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고 세계백신면역연합(GAVI·가비)은 경고했다.

 

존스홉킨스 블룸버그 공중보건대의 미생물학자인 아르투로 카사데발 교수는 "그동안 사람들은 지구 온난화에 따라 모기, 기생충 등을 매개로 한 전염병에만 신경 쓰고, 곰팡이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서 "기온이 올라가면서 새로운 곰팡이 병원균이 인간에게 유입될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대한곰팡이협회 이강운 이사는 "한국도 지구 온난화로 고온다습한 여름이 길어지면서 독성 곰팡이가 늘어날 확률이 높아졌다"면서 "곰팡이 발견 시 마스크·고글·장갑 등을 착용해 접촉을 차단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제거해야 한다"고 전했다.

 

깨알만 한 진드기가 치명률 19% 

'보이지 않는 살인자'는 곰팡이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AP통신은 지구 온난화로 진드기도 많이 늘어나면서 치명적인 질병을 유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몸길이가 약 1㎜ 정도로 깨알만 한 진드기에 물리면, 진드기매개뇌염(TBE)이나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SFTS) 등에 걸릴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SFTS에 걸리면 백혈구·혈소판 감소 등 중증으로 진행돼 사망할 수 있다. 한국에선 지난 2013년 SFTS 환자가 처음 보고됐고, 지난해까지 약 1690명의 환자가 발생해 320여명이 숨졌다. 치명률이 무려 19%에 달한다. 헝가리 생태연구센터의 가보르 푈드바리는 "진드기가 치명적인 질병의 매개체가 된 건 20~30년 전엔 없었던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2002년 미국 로드아일랜드대 곤충학 연구실에서 현미경으로 관찰된 사슴진드기 모습. 라임병을 옮기는 사슴진드기가 지구 온난화로 수명이 길어지고 겨울에 더 활동적으로 변했다는 연구 결과가 지난해 발표됐다. AP=연합뉴스

 

진드기는 기온이 올라가면 대사 활동이 활발해져 성장 속도가 빨라지고 개체 수가 늘어난다. 즉 지구 온난화로 지구가 평균적으로 따뜻해지면서 진드기가 증가했고, 심각한 질병을 전파할 기회도 많아졌다고 AP는 전했다.

 

이동규 고신대 환경보건학과 교수는 "한국의 경우, 지구 온난화로 인해 주로 남부 지역에서만 나오던 진드기가 중부 지역에도 나타나고 있다"면서 "이제 어디에서도 진드기가 많이 있기 때문에 야외에 나갈 때는 기피제를 뿌리고, 긴 옷을 입는 등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지구 온난화에 따른 감염병이 늘어나면서 폭염·홍수·가뭄 등과 같은 직접적인 기후 영향 외에 건강에 큰 위협을 미치는 보건 이슈에도 집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후변화매개체감시거점센터 협의체를 이끄는 이용석 순천향대 생명과학과 교수는 "최근 빈대와 가을 모기가 많아진 것은 기후 변화로 인한 생태계의 변화 신호로 볼 수 있다"면서 "이들보다 훨씬 더 무서운 존재가 나올 수 있으니, 다양한 연구로 대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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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영 기자 park.soyoung0914@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3.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