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조회수 120만
희망 전하는 최영민씨
이 남자, 찡그리는 법이 없다. 모든 게 감사하다고, 사는 게 너무 즐겁다고 한다. 열 살 때 왼쪽 다리를 잃었다. 게다가 고아다. 그런데 그는 오늘도 천연덕스럽게 웃는다.
외다리 찹쌀떡 장수 최영민(48)씨 이야기는 7년 전 TV 프로그램으로 알려졌다. 30kg이 넘는 떡통을 메고 벼락같이 달리는 모습도 경이롭지만, 목발에 기대 온몸으로 공을 차고 완벽하게 착지하는 장면은 보는 사람을 숙연케 했다. 그의 영상이 몇 달 전 유튜브에 다시 올라오면서 120만뷰를 찍었다. “저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오늘도 이분 보고 힘 내보려고 합니다” “이 분 근황 너무 궁금합니다” 같은 댓글 5000여 개가 달렸다.
쉰 살을 바라보는 최영민씨는 여전히 겸손했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거듭 인터뷰를 거절하던 그를 지난달 말 충남 천안에서 만났다. 기대와 다른 삶을 살면 어쩌나 하는 염려는 기우였다. 코로나 탓에 찹쌀떡을 못 팔게 됐지만, 열정은 그대로였다. “투잡은 기본, 스리잡, 포잡도 해요. 일만 있음 뭐든지 하죠. 일할 수 있는 체력을 가졌는데 뭘 못하겠어요. 힘들지 않냐고요? 왜 아니겠어요. 그래도 마음은 힘들지 않아요. 마음이 아플 때는 견디기 힘들지만 몸이 아픈 거야 금방 회복됩니다.”
◇찹쌀떡 접고 대리운전
코로나는 일상을 뒤흔들었다. “정말 말도 못 하게 힘들었어요.” 얼굴이 알려지자 도움을 주겠다는 요청이 쏟아졌지만 그는 묵묵히 떡을 팔았다. “사람을 만나는 게 낙이니까요.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코로나로) 만날 수가 없으니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외발로 대리운전도 뛰었다. 술에 취한 손님이 황당한 표정으로 노려봐도 “걱정 마세요. 저 운전 엄청 잘해요” 하고 운전대를 잡았다고 한다.
-근황을 묻는 댓글이 가장 많더라고요.
“잊지 않아주시니 감사하죠. 댓글들 보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해요. 저한테도 힘이 됩니다.”
-코로나로 많이 힘들었나요.
“시급 9700원짜리 알바란 알바는 다 했어요. 화장품 공장에서 뚜껑을 닫고, 선반 제작 회사에서 일하고, 다이소에서 물품 검사도 했습니다. 제가 눈썰미와 손재주가 있나 봐요. 하하. 놀아본 적은 없어요. 상조회사도 다니고 족발 만드는 일, 돼지 털 깎는 일도 했고요. 잠깐 의료기기 장사도 해봤습니다. 신통치 않았지만요. 밤낮으로 손님이 있으면 대리운전도 했고요.”
-운전이 가능한가요?
“요새는 자가용이 오토잖아요. 먹고살아야 하니 몇 년 전에 배웠죠. 손님들도 깜짝 놀라서 술이 깨서 토끼눈으로 보더라고요. 그래도 좋은 분이 많아서 면전에 대고 심한 말은 못 해요. ‘운전할 줄 아세요?’ 하고 물어요. 떡 팔 때 만난 분들은 반가워해주시고요.”
-한 회사에 정착은 안 했네요.
“정규직은 구하기 힘들죠. 아직도 ‘이 사람이 과연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선입견이 있어요. 많이 나아졌지만 사회엔 벽이 존재해요. 그래도 저는 두드려요. 거절당해도 계속 두드리죠. 거절이야 수만 번 당했죠. 그래도 좌절하지 않아요. ‘그래? 그럴 수 있지’ 하고 털어버려요. 한번 더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고요.”
-찹쌀떡 장사는 언제 어떻게 시작했나요?
“2010년쯤 저 같은 사람이 직업 갖기 진짜 힘들 때였어요. 고정 수입이 없었죠. 생활 정보지를 봤는데 ‘장사할 분 찾아요. 번 만큼 가져갑니다’라고 돼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갔죠. 첫 마디가 ‘이래서 어디 장사를 하겠냐?’는 거였어요. 그래서 ‘나 힘 좋다. 걱정 말아라’ 하고 떡통을 떡하니 멨죠.”
-첫날 기억하나요.
“그럼요. 너무 두려웠어요. 온양의 허름한 식당 앞이었는데, 들어가지도 못하고 종종거렸죠. 한 시간쯤 지났나, 자책이 들더라고요. ‘이거 하나 돌파 못 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노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인사를 딱 하니, 만원어치 떡을 사주시는 거예요. 잊지 못합니다. 해가 어둑어둑한 시간이었는데 대낮처럼 밝아 보이더라고요.”
-그날 다 팔았나요?
“사무실에서도 ‘저걸 팔겠어?’라고 생각했대요. 저는 항상 완판했어요. 장사가 잘 안 되는 날은 새벽 3, 4시까지 뛰었죠. 많게는 20만원씩도 벌고 그랬어요.”
-천안에 사는데 전국을 돌며 장사를 했더라고요.
“매일 같은 곳을 가면 식당 사장님들이 싫어하죠. 땅 파서 돈 버는 게 아닌데 손님들에게도 미안해요. 사람이 붐비는 곳이면 어디든 갔어요. 밤새 장사하고 첫 전철 타고 오고 그랬죠.”
떡을 팔 때 그는 허투루 한 적이 없다. 장사에 자신이 생길 즈음 더 좋은 떡에 욕심이 났다. 경기 포천 찹쌀떡 공장까지 찾아가 삼고초려 끝에 거래를 텄다. “굳지 않는 떡이 필요했거든요. 새벽마다 가서 ‘떡 이미지 안 버리게 정말 열심히 하겠다’고 사정하니 주시더라고요. 안 되면 계속 두드려야죠.”
◇인생 전반전은 기구했다
어릴 적에는 부모에게 버려진 아픔을 극복해야 했다. 아빠, 엄마로 알던 이들이 숙부, 숙모라는 걸 알고는 “그래서 나를 때렸구나” 하고 모든 게 이해됐다고 했다. 기억이 아득한 나이에 버려졌다. 고아원이 미국 입양을 결정했지만, ‘왜 아이를 버렸냐’는 주위의 안달에 다시 영민씨를 찾으러 온 숙부, 숙모 손에 이끌려 수원에 정착했다. 그리고 1년 후, 하굣길에 횡단보도를 건너다 버스에 치어 다리를 잃었다. 고작 열 살이었다. 열아홉이 되던 해에 숙부와 숙모가 갈라서면서 그도 빈털터리로 혼자가 됐다. “이후 본적을 찾아 보니 친부모는 다 돌아가셨더라고요. 그러나 묻지 않았어요. 달라질 게 없으니까요. 숙부, 숙모를 다시 만난 적은 없지만 미워하지 않아요. 다 용서했어요.”
-교통사고 후 힘들었겠어요.
“집에선 매일 두드려 맞고, 학교에선 따돌림을 당했죠. 축구 선수가 꿈이었는데 그날 이후 늘 벤치에만 앉아 있었어요. 숙부, 숙모가 이혼하고선 진짜 혼자가 됐고요.”
-부모를 원망한 적은 없나요?
“왜 안 했겠어요. 버릴 거면서 왜 나를 낳았나 원망했죠. 그러면서도 그리움이 컸어요. 감정이 복잡했습니다. 극복하기 정말 힘들었어요.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저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었어요.”
-숙부, 숙모도요?
“미워하잖아요? 그럼 제가 우울해져요. 어차피 지나간 일이잖아요. 현재를 살아내는 게 더 중요하죠. 크게 신경 안 써요.”
-국가의 도움은 받았나요.
“사고로 받은 보상금으로 어릴 때 세 번 수술했어요. 자라나는 뼈를 깎았죠. 그런데 장애가 창피해서 국가에서 주는 수당은 스무 살 전까지 받지 않았어요. 그때까지도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아요.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어요.”
-어떻게 마음을 다 잡았나요?
“할 일이 없으니 매일 도서관에 가서 죽치고 앉아 있었거든요. 스무 살쯤요. 책을 읽으면서 ‘내가 여태까지 병에 걸렸었구나’ 깨달았어요. 죽음에 이르는 병 말이에요. 다리 하나 없다고 이렇게 절망할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요?
“원래 꿈이 축구 선수였으니 한번 해보자 했죠. 목발을 짚고 산에 올라갔어요. 수천, 수만 번 넘어졌죠. 온몸에 상처가 났지만 가슴에는 용기가 솟았어요. 절망하지 말자, 죽기 살기로 한번 살아보자.”
-공 차는 실력이 그냥 생긴 게 아니군요.
“그냥 학교 운동장에 가서 기웃댔어요. ‘저도 축구 한번 시켜주세요. 껴주세요’ 하면서요. 다들 의아해하면서 ‘할 수 있겠어요?’ 했죠. 그때 처음으로 남들이 저를 똑같은 사람으로 대해주는 걸 느꼈어요.”
◇살 만한 세상
떡장사를 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 당해봤다. 얼굴에 떡을 집어 던지며 “당장 꺼지라”고 욕하는 손님, “밥맛 떨어지게 저런 사람 못 들어오게 하라”며 면박을 주는 손님도 있었다. “술을 드셨으니까 정상적인 사고를 못 하잖아요. 처음엔 상처받았죠. 가게 나와서 ‘찹쌀~떡’ 크게 한번 지르고 털었어요. 스트레스 받을 시간에 하나라도 더 팔자고 마음을 다잡았죠. ‘파이팅’ ‘파이팅’ 막 외쳤어요. 상황 판단을 빨리 해서 싫어한다 싶으면 ‘좋은 시간 되십쇼’ 하고 물러섰죠. 나중엔 오히려 손님들이 제 편을 들어주더라고요.”
-TV에 나오고 장사가 잘됐나요?
“크게 달라진 건 없었어요. 사진 찍어달라고 하는 정도이지, 매출에 큰 변화는 없었어요. 그전에도 늘 완판했기 때문에(웃음). 죄송합니다. 제 자랑하는 것 같아서.”
-기억에 남는 손님이라면.
“헤아릴 수 없이 많아요. 한번은 화성 병점에서 떡을 팔고 돌아서는데 누가 뛰어와요. ‘우리 사장님이 떡을 더 사겠다며 모시고 오래요’ 그래요. 다시 가서 몇 개 드릴까요 했더니, ‘스무 개요’ 그래요. 감사하다고 크게 외치고 또 돌아섰는데 아까 그분이 헐레벌떡 다시 뛰어오더라고요. ‘우리 사장님이 떡 다 사시겠다고요. 다시 오시래요.’ 들고 가지 못하신다고 하니 ‘떡통까지 다 사겠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그건 제 밥통이라 어렵습니다’ 했죠. 하하. 그날 조기 퇴근했어요.”
-또 있을까요?
“청주 조개구이 집에선 제 떡으로 골든벨 울린 분도 계셨어요. 또 한번은 장사가 너무 안 되는 날인데 누가 3만원어치 외상을 달래요. 흔쾌히 ‘알겠습니다, 형님’ 했죠. 그랬더니 놀라면서 ‘나 모르는데 준다고?’ 그래요. ‘사람 믿고 장사하는 거죠’ 했죠. 아내한테는 ‘옴팡’ 깨졌어요. 그리고 저는 잊었는데 한 달쯤 지났나 누가 멀리서 뛰어와요. ‘내가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요?’ 하면서요. 그 뒤로 단골이 돼서 마주칠 때마다 떡을 사줬죠.”
◇저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최영민씨는 수개월간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고 있습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요.” 바쁘다는 게 또 다른 이유였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 밤늦게 귀가한다. 휴일도 없다. 시간이 잠깐이라도 나면 바로 몇 시간짜리 단기 알바를 찾는다. TV 방영 이후 결혼도 했다. 떡 장사를 하면서 만난 여인에게 줄기차게 고백한 끝에 살림을 합쳤다고. 연상의 그녀는 잠깐 인터뷰 자리에 들러 딱 한마디로 남편을 치켜세웠다. “신문에 낼 게 뭐 있다고요. 그런데 다른 건 몰라도 열심히 사는 거 하나는 1등입니다.!”
-결혼하신 줄은 몰랐어요.
“제 나이가 몇인데요. 오랜 친구와 결혼했죠. 아직 형편이 안 돼서 식은 못 올렸어요. 언젠가 사정이 좀 나아지면 해야죠. 저 같은 사람과 살아주는 것만으로도 미안하고 고맙죠.”
-왜 여러 번 인터뷰를 거절했나요?
“저는 특별할 게 없어요. 성공한 것도 아니고요. 쑥스럽죠. 땀 흘려서 사는 사람들이 진짜 많거든요.”
-유튜브에 후원해주겠다는 댓글이 많아요.
“저는 살면서 대가 없는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후원도 안 받아요. 왜냐고요? 누구에게 의지하면 제가 약해져요. 또 앞으로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걸 이겨내지 못해요. 아직은 일할 수 있는 나이잖아요.”
-쉬운 길이 있는데요.
“떡을 팔아주겠다는 호의는 받아요. 떡을 팔고 거기에 맞는 돈을 내는 거니까요. 얼굴은 모르지만 가끔 떡 보내달라고 하는 동생이 전북에 있어요. 10만원어치씩. 그게 가장 큰 도움을 받은 거예요.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됐죠. 그런데 기부요? 그건 거절합니다.”
-보통 의지가 아니네요.
“죽을 지경이 아니고 충분히 일할 수 있잖아요. 저는 어렵게 살아봤어요. 공짜로 돈을 준다? 그걸로는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아요. 경제적으로 좀 어렵지만 마음은 편해요.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하고요.”
-이런 삶의 원동력은 뭘까요.
“긍정적인 생각요. 나쁜 건 빨리 잊어 버려요. 이것보다 어려운 일이 더 많았는데 이까짓 거 하고 말아요. 그리고 항상 새로운 걸 찾죠.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어요.”
-세상을 등지는 사람도 많은데요.
“나쁜 생각은 저도 많이 했어요. 세상과 연을 끊으려고요. 방황했죠. 친구도 없었으니까 많이 외로웠어요.”
-우울증에 빠진 나라라는 말도 있잖아요.
“제가 배운 것도 없고 경험도 모자라지만요, 삶이라는 것은 소용돌이 속이에요. 누구든 예외가 없어요. 그런데 어차피 주어진 삶은 한 번이고요. 포기하지 말았으면 해요. 절망과 희망은 딱 한 글자 차이잖아요.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과일 트럭 몰고 전국 돌고파
최영민씨를 다시 만난 것은 추석을 하루 앞둔 지난달 26일 한 대형 마트 앞에서였다. 장을 보러 나온 인파 속에서 한 남자가 호루라기를 불며 차량이 엉키지 않게 요령껏 움직였다. 그는 베테랑 주차 요원으로 변신해 있었다. 매일 10시간씩 땡볕에 서 있어 까맣게 탔다. 그러나 이날도 그는 웃고 있었다. “명절 때마다 알바로 오세요. 처음에 저희도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는 여기 에이스시죠.”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한쪽 운동화는 그새 또 낡았다. “운동 열심히 할 때는 한 달에 한 번씩 운동화를 바꿔야 했는데, 요새는 그 정도는 아니고 석 달 정도 버텨요. 목발도 6개월에서 1년에 한 번 바꾸고요.”
-이루고 싶은 게 있나요.
“트럭에 과일을 싣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해보고 싶어요. 제가 입담이 좀 있으니까. 죄송합니다. 하하. 그 꿈을 위해 오늘도 쉬지 않고 알바를 해요.”
-힘들지 않나요?
“전혀요. (축구처럼) 하나하나 돌파해나가는 게 재밌어요.”
-언제쯤이면 최영민씨의 과일 트럭을 볼 수 있을까요.
“일이 고정적으로 있다면 내년 봄이 목표죠. 늦어도 내년에는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찹쌀떡 장사는 접는 건가요?
“장사를 하려면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야 해요. 제가 나이도 있고, 꾸준하게 오래 할 수 있는 걸 찾아야죠. 저는 친구가 없었어요. 그러나 장사를 하면서 만난 모든 분이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뛰었어요. 곧 제가 과일장수로 찾아갈게요.”
그의 이마에서 땀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남들과 다르게 보이잖아요. 그래서 제 진짜 꿈은 평범하게 사는 거였어요. 평화롭게요. 누구는 큰 부자가 되는 게 꿈일 겁니다. 물론 돈이 있음 좋을 수 있죠.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이제 삶의 후반전으로 달려갑니다. 전반전은 치열하게 살았어요. 여전히 저는 평범한 삶을 꿈꿉니다.”
천안=김아진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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