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의 문장 속을 거닐다]
장자의 ‘외물’ 편으로 본
좁은 방에서 벗어나는 방법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당신 말은 쓸 데가 없소. 그러자 장자가 대답했다. 쓸모없음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를 이야기할 수 있소. 천지가 넓디넓고 크디큰데, 사람이 쓴다고 해봐야 발이 닿는 부분일 뿐이오. 그렇다고 해서, 발이 딛고 있는 부분을 뺀 나머지 부분을 허물어 황천에까지 닿게 해버리면, 남은 땅인들 사람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 수 있겠소?(惠子謂莊子曰,子言無用. 莊子曰, 知無用而始可與言用矣. 天地非不廣且大也. 人之所用,容足耳. 然則厠足而墊之致黃泉,人尙有用乎惠 子曰,無用. 莊子曰,然則無用之爲用也, 亦明矣)”. -장자, ‘외물(外物)’
이것이 내가 살아보는 가장 작은 방이구나! 그 방 앞에 섰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보다 작은 방은 방이 아니라 관이라고 불러야겠구나! 그 좁디좁은 방에서 사는 나날들은 힘들었다. 그곳에 살다 보면, ‘여기’ 혹은 ‘저기’라는 공간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여기와 저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가 필요한 법인데, 그 방 안에는 그런 거리가 잘 확보되지 않았다. 폐소공포증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는 붙박이 서랍장까지 다 열어 두고 살아야 했다.
다시는 살고 싶지 않은 그 작은 방에 대한 기시감은 그 이후로도 종종 떠나지 않았다. 이탈리아 항구도시에 있는 옛 형무소 안에 들어가 보았을 때도 그 방 생각이 났다. 맞아, 딱 이 크기였지. 부유한 직장 동료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신발 벗는 곳이 생각보다 넓게 펼쳐졌다. 맞아, 딱 이 크기였지. 난 한때 남들이 신발 벗어 놓는 정도의 공간에서 산 것이었구나.
원래 군사용으로 지었다는 그 작은 방을 설계한 사람이야, 전시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공간을 계산하여, 가장 효율적인 건물과 방을 설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은 그보다 더 큰 공간이 필요하다. 생존에 필요한 공간과 삶에 필요한 공간은 결코 같지 않다. 그래서 그 설계자에게 ‘장자, 외물편’의 저 문장을 패러디해서 읽어주고 싶다. “사람이 길게 눕는다고 해봐야 몸이 닿는 부분을 쓸 뿐이오. 그렇다고 해서, 누워서 닿는 부분을 뺀 나머지 공간을 없애라고 설계하면, 남은 공간인들 사람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 수 있겠소?”
생존을 위한 공간과 삶을 위한 공간이 다르듯이, 창고와 전시실도 다르다. 관객들에게 가능하면 많은 그림을 보여주고 싶은 나머지, 전시실 모든 벽을 그림으로 빼곡하게 채웠다고 해보자. 그림을 감상하려고 몰려든 관객은 단 한 편의 그림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각 그림의 크기를 감안해서 그림과 그림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두어야 하고, 그 거리에는 그림의 성격뿐 아니라 관객의 동선, 그리고 전체 전시장의 연출까지도 고려한 섬세한 안목이 담겨야 한다. 관객은 전시장에 온 것이지, 창고에 온 것이 아니다.
당장 무용해 보이는 공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근시안적 유용성에만 집착하다 보면, 목전에 둔 시험 공부밖에는 인정하지 않게 될 것이다. 당장은 쓸모가 없어 보여도 결국에는 큰 쓸모로 이어질 공부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게 될 것이다. 근시안적 생존에만 집착하다 보면, 먹고사는 일이 삶의 전부라고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험 공부와 큰 공부가 다르듯이, 생존과 삶은 다르다. 삶에는 생존을 넘어서는 여유가 필요하다.
사회의 안전 비용도 마찬가지다. 화재가 매일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소방관들은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화재에 대비한다. 거리의 치안을 유지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당장 사고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혹시라도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당장의 쓸모에만 연연하는 사람들은 그런 식의 대비가 낭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멀고 쓸모없는 근심을 통해서 재난을 미연에 방지하기도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사람에게 먼 곳까지 걱정하는 마음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 근심이 있기 마련이다(人無遠慮, 必有近憂)”라고 말했다. 송대의 주석가 주희(朱熹)는 그 문장을 해설하면서, 소식(蘇軾)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사람이 땅을 밟을 때, 발이 닿는 부분 이외에는 모두 무용한 땅이지만 폐할 수는 없다. 염려가 천 리 밖에까지 있지 않으면 근심이 코앞에 있게 된다(人之所履者, 容足之外, 皆爲無用之地, 而不可廢也. 故慮不在千里之外, 則患在几席之下矣).” 소식은 ‘논어’를 해설하면서 앞서 말한 장자의 견해를 인용한 것이다.
당장은 불필요해 보이는 안전 비용을 지출함을 통해, 실제 시민들이 누리는 공간은 그만큼 넓어진다. 사는 동네의 치안이 불안하다고 느끼면, 몸은 움츠러든다. 타인들이 자신을 혐오한다고 느끼면, 마음은 움츠러든다. 노약자를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면, 집 밖으로 나가기 두려워하게 된다. 환대가 사라지면 세계는 쪼그라든다. 분별없이 혐오하는 순간, 분별없이 시기하는 순간, 분별없이 경멸하는 순간, 분별없이 비방하는 순간, 분별없이 배척하는 순간, 이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쪼그라든다. 결국은 자기 한 몸도 가눌 데가 없는 사회에서 살게 되고 만다.
그러면 뭐 어떠냐고? 그런 반문에 대해서도 장자는 이미 대답을 갖고 있다. “물이 깊고 넓지 않으면 큰 배를 감당할 수 없다. 한잔 물을 웅덩이에 부으면, 거기에 겨자씨야 띄울 수는 있겠지만, 잔을 띄우려 들면 잔이 바닥에 닿아 버리고 말 것이다. 물은 얕은데 배는 크기 때문이다(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方.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 水淺而舟大也).”-장자, 소요유(逍遙遊)
태어나서 늙어 죽을 때까지 목전의 실용성에만 연연한 대가는 협소한 사회 속에서 졸렬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관처럼 좁은 방을 벗어나 멀리까지 항해하는 커다란 배를 타고 싶거든, 먼 미래까지 감당할 수 있는 인재를 만나고 싶거든, 좀 더 깊고 큰 실용성을 맛보고 싶거든, 진정한 실용성이 무엇인지를 새삼 묻고, 재정의하는 일처럼 일견 무용해 보이는 일에 몰두해 보는 거다. 그렇지 않으면, “남은 실용성인들 사람에게 무슨 쓸모가 있을 수 있겠소?”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조선일보 입력 2023.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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