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포크 음악의 대모? 완두·냉이 엄마로 살아서 행복하다

해암도 2021. 5. 1. 08:47

음악 접고 낙향한 장필순  제주 생활 16년을 말하다

 

2005년 6월, 마흔한 살이던 장필순은 음악을 관두기로 결심했다. 그는 1989년 1집 ‘어느새’를 시작으로 16년간 낸 음반 여섯 장이 하나같이 높은 평가를 받은 한국 포크 음악의 대들보 중 한 사람이다.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순간마다’ ‘하루’ 등 수많은 명곡으로 대중을 울렸다.

 

장필순은 무대에 오르면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청중을 사로잡는 뮤지션이지만, 집에선 자기 몸집만 한 애완견 완두에게 쩔쩔매는 ‘강아지 엄마’다.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까지 직접 심고 놓아서 정성스레 가꾼 마당 여기저기에 용변을 보고 땅을 파헤쳐도 눈 한번 흘기곤 그만이다. 장필순은 “이 아이들 돌보느라 멀리 여행 갈 꿈도 못 꾼다”며 “동익 오빠와 함께 제주에서 오순도순 늙어가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기자

 

 

대학 시절 ‘소리두울’이란 여성 듀오를 결성해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할 때부터 독특한 목소리로 주목받았다. 저음부에선 바람 소리 같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고음부에선 벼락이 내리치듯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덕분에 조동진, 어떤날, 들국화, 시인과촌장, 김현철 등 당대 최고 뮤지션들이 몸담았던 동아기획에 발탁됐다. 이후 조동진이 만든 하나음악으로 적을 옮겼다. 이른바 ‘조동진 사단’의 뮤즈였다. 장필순을 빼고 1990년대 한국 포크 음악을 논하기 어렵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예전만큼 음악이 재미있지 않았다”고 했다. ‘헬리콥터’ ’10년이 된 지금' 등이 수록된 6집 ‘soony’는 평단에서 가요사에 남을 명반이란 찬사를 들었지만,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했다. 아이돌과 댄스 음악 외엔 눈길조차 주지 않게 된 가요계에서 자신의 음악이 설 자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고 번잡한 도시 생활에도 지쳤다.

 

서울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을 찾아 낙향하기로 했다. 그곳이 제주였다. “음악적 동반자”라고 부르는 남편 조동익, 가요계의 전설적 듀오 ‘어떤날’로 유명한 그 조동익과 함께 제주 여기저기를 헤맸다. 그러다 애월읍 소길리에서 나무와 꽃에 푹 파묻힌 집을 찾았다. 장필순은 “집에 처음 들어갔을 때 물방울무늬 원피스에 샌들을 신고 있었던 것까지 기억난다”며 “마당에 들어서니 마치 동화 속에 들어온 기분이었다”고 했다.

 

또 다시 16년이 지났다.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나 온 제주에서 장필순은 많은 것을 얻었다. 텃밭에서 손수 기른 야채로 밥을 해 먹고 장작을 주워 와 불을 때고 집 정원을 꾸미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유기견을 10여 마리 구조해 돌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유기견을 구조해 주인을 찾아줬다. 이웃에 정착한 가수 이효리와 이상순이 부부의 연을 맺도록 중매(?) 역할도 했다.

 

무엇보다 음악을 다시 시작했다. 제주 생활 8년 만인 2013년 7집을 낸 것을 시작으로 지난 2월 음악적 멘토였던 고(故) 조동진의 음악을 다시 부른 리메이크 앨범까지 음반을 총 4장 내놓았다. 제주의 무엇이 그를 다시 음악으로, 세상으로 이끌었을까.

 

벚꽃이 한창이던 날, 장필순이 알려준 주소로 찾아갔다. 담쟁이덩굴과 꽃으로 뒤덮인 담벼락 사이로 작고 빨간 대문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집 밖에서 큰 소리로 부르니 장필순이 나왔다. 헐렁한 면바지에 운동화, 바람막이 점퍼를 걸친 차림이었다. 밤새 조동익과 음악 작업을 하다가 느지막이 일어나 강아지들에게 밥을 주던 참이었다고 했다. 그와 덩치가 비슷한 개 두 마리가 낯선 기자를 향해 짖었다. “완두, 냉이! 조용! 엄마 손님이야.” 낮고 걸걸하지만, 왠지 청아하게 들리는 그 목소리가 울리자 완두와 냉이가 납작 엎드렸다.

 

16년 전 서울을 떠나 제주로 올 때 장필순은 음악을 관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주에서 조용히 살아온 시간들이 다시 음악으로 돌아갈 힘을 준 것 같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기자

완두, 냉이...유기견들의 엄마 장필순

-아이들이 엄마 말을 잘 듣는다.

“밥 주는 사람이니까(웃음). 먹을 거 줄 때만 제일 신나서 말을 잘 듣지만, 그때뿐이다. 종일 쫓아다니며 ‘하지 마!’ ‘그만!’ 하며 싫은 말 하는 게 일이다.”

 

-유기견들인가.

“얘들 엄마가 ‘달래’라고, 유기견이었다. 10년도 더 전에 동네 숲을 산책하는데 나무에 묶인 채 버려져 있더라. 세상에 참 무책임한 사람들이 있다. 곧바로 데리고 와서 키웠다. 달래는 얼마 전에 무지개 다리를 건넜고 완두랑 냉이가 씩씩하게 자라서 보람차다.”

 

-그동안 키운 유기견이 10마리가 넘는다고 들었다.

“지금까지 열셋을 키우고 여덟 아이를 떠나보냈다. 모두 직접 땅을 파서 마당에 묻어줬다. 첫 아이를 보낼 땐 며칠간 아무것도 못했는데,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다고나 할까. 달래 보내고 나서도 금방 기운을 차렸다. 언젠가는 하늘나라에서 다 만날 아이들이니까, 하하!”

 

장필순은 현재 개 다섯 마리를 키운다. 마당에서 키우는 두 마리 외에 집 안에도 작은 강아지 세 마리가 장필순·조동익 부부와 함께 숙식 중이다. 인근 폐가에 홀로 방치된 강아지 5~6마리의 밥도 매일 챙겨준다. 인터뷰를 위해 집에서 5분 거리 카페로 이동할 때도 이 강아지들에게 밥을 주느라 20분 넘게 걸렸다. 자동차에도 각종 애견용품이 한가득 실려 있었다.

 

-원래 강아지를 좋아했나.

“서울에 있을 때도 다른 가족의 강아지를 맡아 키우긴 했다. 가수다 보니 일이 없으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으니까. 유기견을 돌보게 된 건 제주에 내려와서부터다. 제주에 와서 동익 오빠와 집을 보러 다니는데 여기저기 버려진 개들이 눈에 밟히더라. 제주에 여행 온 사람들이 그냥 버리고 가는 아이도 많았다. 추운 겨울 풀밭에, 라면 상자에 담겨 벌벌 떨고 있는 아이를 도저히 내버려둘 수 없었다.”

 

-유기견 구조 활동에 워낙 열심이라 제주 유기견들의 대모(代母)라 한다고 들었다.

“대모는 무슨.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는 정도다. 주로 ‘프렌들리핸즈’라고 유기견을 구조하는 단체가 활동하는 걸 돕는다. 주위에도 관심 있는 사람 있으면 함께 해보자고 권유하고. (이)효리도 그렇게 함께 활동하게 된 거고.”

 

장필순은 매년 프렌들리핸즈에 수백만원을 기부한다. 공연이나 행사 수익금은 물론, 집 근처 카페에서 예전에 입던 무대 의상이나 옷을 팔아서 단체 활동 자금으로 쓴다. 정기적으로 유기견 구조 활동에 필요한 모금을 위해 바자회도 연다.

도끼로 장작 패는 자연인 장필순

-마치 유기견을 돌보려고 제주로 내려온 사람 같다.

“하하, 그럴 리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다. 원래 동익 오빠와 제주로 올 땐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살려고 했다. 근데 막상 와서 살아보니 서울보다 더 바쁘더라.”

 

-왜 그럴까.

“시골에서 살아보면 안다. 마당을 꾸미고 텃밭에 채소 기르고 아이들 밥 주고. 작년까진 장작으로 불을 땠다. 도끼질 하나는 자신 있다.”

 

-직접 장작도 팬 건가.

“물론. 동익 오빠보다 내가 훨씬 잘한다. 제주에선 철마다 벌목을 한다. 나무가 너무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면 산불이 크게 나니까. 그런 벌목 현장에 가서 땔감을 얻어 왔다. 벌목꾼들이 측은하게 보았는지 언제나 넉넉하게 장작을 주시더라.”

-요즘 TV 예능에선 일부러 자연 속에 들어가 장작 패고 불 피워서 밥 짓는 게 대세다. 그런 데 출연해도 잘할 것 같은데.

“글쎄, 사람이 어울리는 옷을 입고 살아야지. 나는 그냥 노래 만들고 부르는 게 딱 맞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음악을 몇 년씩이나 안 하고 산 건가.

“나도 동익 오빠도 그땐 음악에 지쳐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의외로 시골 생활이 체질에도 맞더라. 텃밭에 머위나 취나물, 참나물 심어둔 걸 따서 무쳐 먹으면서 낮에는 목공 일 하고 밤이면 바다며 숲이며 나가서 산책하고. 시간이 금방 가더라. 정말 음악을 다시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 났다. 기타 한번 퉁긴 적도 없다. 나도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면 어떻게 다시 음악을 하게 된 건가.

“춘호(기타리스트 함춘호) 오빠 덕분이다. 꾸준히 우리 집에 내려와서 ‘둘 다 이렇게 재능을 썩히면 안 된다’ ‘동익이는 고집불통이라 내 말은 안 들으니 너라도 다시 음악을 좀 해봐라’ 하며 설득했다. 그러다 갑자기 CCM(기독교 음악) 앨범을 낼 건데 도와달라고 하더라. 거기에 마음이 움직였다. 신앙은 있지만 기독교인다운 삶을 살지 못했다는 부채감 같은 게 있었으니까. 그렇게 제주 생활 5년 만에 다시 기타를 잡았다.”

 

-오래 쉰 만큼 다시 시작하는 것도 쉽진 않았을 텐데.

“무엇보다 노래 실력이 현저하게 줄었더라(웃음). 고생 좀 했다. 신기한 건 내 안에 이렇게 많은 음악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노래가 술술 써졌다. 2010년에 CCM 앨범 녹음을 마치고도 몇 달 동안 혼자서 음악 작업을 했다. 20곡도 넘게 쓴 것 같다. 그렇게 쓴 노래들을 동익 오빠에게 들려주니 한참을 생각하다 ‘음반을 만들어보자’고 하더라.”

 

(위)장필순은 유기견들과 종종 마당에 둘러앉아 기타를 퉁기며 음악 작업을 하곤 한다. /조선일보 DB. (아래)장필순의 음악적 요람이었던 기획사 ‘하나음악’ 소속 뮤지션 단체 사진.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조원익, 하덕규, 장필순, 손진태, 김현철, 조동익, 박학기, 조규찬, 윤영로, 박용준, 권혁진, 한동준, 최성원, 김광석. /페이지터너 제공

 

자연스러워진 디지털 음악가 장필순

그때부터 집에서 음악 작업을 시작했다. 2013년 7집 ‘Soony7’을 시작으로 불이 붙었다. 제주 생활을 하면서 느낀 여러 감정이 담긴 8집 ‘소길화’, 자신의 옛 노래를 다시 부른 ‘Soony Re:work1’ 앨범을 연달아 냈다. 그사이 조동익도 무려 26년 만에 신보 ‘푸른 베개’를 작년에 기습적(?)으로 발표했다. 그야말로 “매일매일 음악 작업에 몰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공백이 길어선지 예전과 음악이 달라졌다는 평가도 많다. ‘편안해졌다’ ‘자연스러워졌다’는 감상이 주류던데.

“음악 스타일보다는 만드는 방식이 바뀐 덕분이 아닐까 싶다. 예전엔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는데 이젠 백 퍼센트 홈 레코딩이니까.”

 

-그게 가능한가? 강아지도 이렇게 많이 키우고 다른 생활 잡음도 노래에 들어갈 텐데.

“그래서 항상 아이들 다 재운 밤에 녹음한다. 너무 안 잘 땐 안아서 재우면서 녹음한 적도 있다. 한창 녹음 중인데 아이가 깨서 짖는 바람에 산통 다 깬 적도 있고. 또 잘 들어보면 미세하게 벌레 소리나 빗소리 같은 게 들어 있는 노래도 있을지 모른다. 동익 오빠가 컴퓨터로 지운다고 하는데도 완전히 다 지우진 못했을 수 있으니(웃음).”

 

-굳이 그런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가 있나. 비용 문제인가.

“돈 때문이라기보다 집에서 하는 게 편하다. 동익 오빠야 워낙 집 밖으로 안 나가는 사람이고, 나도 서울 오가면서 녹음하는 것보다는 이게 더 낫다. 아이러니한 게 우리 음악이 예전보다 더 자연스러워졌다는 얘길 많이 듣는데 사실 지금 우리 음악은 디지털에 더 가깝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서울서 녹음하면 연주자들을 불러서 실제 악기 소리를 녹음하겠지만 여기선 그럴 수 없으니 컴퓨터나 신서사이저로 만든 소리를 많이 쓴다. 동익 오빠가 안 그래 보여도 디지털로 음악 만드는 데 전문가다(웃음).”

 

-제주에 함께 사는 음악인 동료들 도움도 많이 받았다던데.

“8집에 ‘집’이란 노래가 그렇다. 어느 날 상순이랑 효리 부부가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효리가 ‘언니한테 이 멜로디가 잘 어울릴 것 같다’며 갑자기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는 거다. 상순이가 기타를 연주하고. 너무 마음에 들어서 거기다 살을 붙여서 완성한 게 그 노래다.”

 

-이상순과 이효리 부부를 이어준 중매쟁이 역할도 했다고 들었다.

“중매는 좀 부풀려진 이야기고. 조금 역할이 있었던 정도지(웃음). 둘이 우리 집에 놀러 오다가 눈이 맞았다고 하더라. 상순이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는데 하루는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오겠다더라. 그게 효리였다. 나중에 효리가 우리 집에서 상순이에게 반했다고 말하더라.”

 

-그 둘뿐 아니라 다른 후배 뮤지션들과도 함께 노래하는 일이 많아졌다.

“유기견 구조 활동 홍보도 할 겸 인스타그램을 열심히 하는데, 인스타그램 메시지 같은 걸로 후배들이 종종 연락해온다. 본인 음악을 보내주면서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는 부탁을 하는 경우도 있고. 음악을 들어보고 정말 좋으면 함께한다. ‘공중그늘’이란 인디뮤지션이 그랬고, 최근엔 가수 백지영씨가 같이 노래해보고 싶다고 해서 함께 작업하기도 했다. 잊지 않고 꾸준히 찾아주는 이들이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네온사인 속 밤하늘 별빛 같은 장필순

실제로 장필순은 잊힌 이름이긴커녕 점점 더 재조명받는 ‘레전드 뮤지션’이 되고 있다. 지난 2월 SBS에서 방영한 음악 프로그램 ‘아카이브K’에 출연해 대표곡 중 하나인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를 부른 영상은 유튜브 등에서 조회 수 100만을 넘기며 화제가 됐다. 그를 잘 모르는 2030 청년들이 “양념 범벅 자극적인 음식으로 부대끼다 담백한 죽 한 그릇 먹은 것 같다” “네온사인 속에서 밤하늘 별빛을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눈물 흘린 기분”이라는 등 댓글을 수백 건 남겼다.

 

“요즘 ‘레트로’가 유행이다 보니 내 음악을 찾아 듣는 젊은 친구들도 생기는 것 아닌가 싶다. 방송 출연은 잘 안 하는데, 내 음악의 요람 같은 곳인 동아기획과 하나음악을 다룬다고 하니 안 나갈 수가 없었다. (조)동진 형님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

 

4년 전 세상을 떠난 조동진은 동생 조동익과 장필순뿐 아니라 들국화, 김광석, 이병우, 조규찬, 김현철, 유희열 등 한국 대중음악의 스타 뮤지션들을 배출한 동아기획과 하나음악을 이끈 음악가였다. 20대 시절 장필순을 발견하고 포크 음악의 길로 이끈 것도 조동진이다. 그는 “동진 형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음악을 계속하지 않았을 것 같다”고 했다.

 

-조동진이 떠난 뒤에 부쩍 음악 활동이 늘어난 것 같다. 그 후로 세 앨범을 쉴 새 없이 냈다.

“형님은 나뿐 아니라 하나음악 식구 모두에게 특별한 분이다. 영원한 스승이자 큰 형님이다. 형님 생전에 형님 노래를 리메이크해 보고 싶었는데 감히 그러지 못했다. 추모 공연을 하면서 리메이크 앨범을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동익 오빠와 작업했다. 잘 알려진 곡보다는 내가 부르고 싶은 곡들을 골랐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면?

“‘슬픔이 너의 가슴에'. 대학생 때 아버지가 내 기타를 박살내 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날 밤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슬픔이 너의 가슴에 갑자기 찾아와 견디기 어려울 때 잠시 이 노래를 불러보렴’이란 형님 목소리를 들으며 이런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가수가 된 것 같은가.

“형님에 비하면 한참 멀었다(웃음). 그래도 이번 리메이크 앨범을 형님이 들어보셨다면 생전에도 그랬듯 말없이 머리 한번 쓰윽 쓰다듬어 주셨을 것 같긴 하다.”

 

-코로나 때문에 앨범을 내고도 공연을 못 하는 상황이다.

“많이 힘들긴 한데 어쩔 수 있나. 그래도 코로나가 물러가면 제주도 카페들을 돌면서 공연할 계획이다. 유기견 구조 활동도 알리고 수익금은 프렌들리핸즈 살림에 보탤 생각이다.”

 

-헤아려 보니 서울서 가수로 16년 활동하고 올해로 제주살이도 16년이더라. 다시 서울로 올라갈 계획은 없는가.

“전혀 없다. 별일 없으면 여기서 동익 오빠와 함께 매일 음악 만들고 유기견들 구하고 키우면서 살아갈 거다. 작년까진 장작을 때다가 올해부터는 기름 보일러로 바꿨다. 나이 드니 장작 때기도 힘들더라(웃음). 그렇게 여기서 천천히 세월에 적응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애월 바다가 보였다. 이 바다를 보고 만들었다는 8집 수록곡 ‘저녁 바다’를 틀었다. “채우고 또 채우려 했었던/ 아쉬움을/ 비우고 또 비우려 했었던/ 그 기나긴 슬픔의 시간….” 서울서 많은 걸 채워봤고, 제주에서 많은 걸 비워본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이 나지막한 노래가 가슴을 적셨다.

 

 

권승준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1.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