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시각장애 이기고 박사학위 딴 원동력 - 꿈! 꿈! 꿈!

해암도 2013. 10. 25. 22:51

 

 
태어날 때부터 혹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의 ‘빛’과 영원히 작별하게 된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서울 맹학교(盲學校)가 100주년을 맞게 됐고 그 학교 출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여럿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몇분께 연락을 했습니다.

 

국내 시각장애인은 25만명 정도로 추산되는데, 1976년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 박사학위를 받은 강영우 전 미국 백악관 차관보 이후 국내외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44명 정도이며, 그중 절반 이상인 26명이 서울맹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몸이 멀쩡해도 박사 학위를 받는 건 힘든 노력이 필요한데, 불편한 몸으로 불리한 환경에서 어떻게 자신의 꿈과 목표를 이뤘을까요?


	권인희 교수
권인희 교수
◇“주먹을 아무리 휘둘러도 허공을 가를 뿐주체할 수 없는 분노감” 

 

권인희(59)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교수를 먼저 만났습니다. 권 교수는 “공부 같은 거, 어려운 거 없어요”라며 무얼 물어봐도 쿨(cool) 하게 대답했습니다.

“안마사협회장을 맡았는데 강연 요청이 왔어. 근데 내가 그때 고졸이었거든. 강연을 맡긴 사람이 무안해하더라고. 대학 꽁무니는 밟아본 줄 알았던 거지. 그게 안타까웠는지 맹학교때 선생님이 어느 날 주민증을 가져오라고 하더라고. 무슨 등록증 만들어주는 줄 알았는데, 방송통신대학 신청서였어. 어떻게 했긴. 그냥 다녔지. 내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야. 근데 막상 해보니 재밌더라고.”

 

‘얼떨결’에 시작한 늦깎이 공부가 어느새 인생의 동반자처럼 됐다고 했습니다.

“원래 박사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건국대학교에서 석사 논문을 냈는데 그게 최우수 논문으로 뽑힌 거야. 아깝잖아. 이왕 한 거 어차피 늦은 공부, 몇년을 더 못하나? 공부? 물론 때가 있지. 근데 ‘때’라는 건 있잖아, 또 만들면 생기더라고. 아, 저번 학기에 62명이 수강했는데 이번에 또 62명이나 들어. 학생들이 내 수업 왜 그리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하하.”

 

권인희 교수는 국내 시각장애인 중 유일하게 헌법을 연구하는 분입니다. 기본권 등에 대해 연구하는데, 장애인 인권 향상에 좀 더 도움될 수 있는 분야를 발전시키고 싶다더군요. 그것이 자신의 ‘꿈’이라고.

“인생 뭐 있어?”라는 식으로 응답하는 그의 태도에서 암울했던 시절을 읽기는 어려웠습니다. 원래 낙관적이고 밝은 성격일 거라 짐작했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다 커서 잃은 시력 때문에 인생이 분노 투성이었다고 했습니다.

 

권 교수는 처음엔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시력이 온전했으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 망막이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고, 3번의 대수술을 거쳤지만 결국 두 눈을 잃었다고 합니다.

동네 꼬맹이들이 화장실까지 쫓아 들어가 ‘장님’이라면서 욕하고 놀리는데, 분노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랐다더군요. 주먹을 휘둘러봐도 허공을 가를 뿐. 이런 말을 한 사람도 있었다더군요.

 

“그래도 자네는 17년간은 앞을 보지 않았나. 앞으론 좀 못 봐도.” 강원도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없는 살림에 돈을 벌어야 했고, 안마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더군요.

 

“힘들다 힘들다 죽어라 소리질러 봐도 찾아보면 나보다 더 힘든 사람 있어. 억울하고 억울해도 나보다 더 억울한 사람 있고. 사람이 힘들면 어느새 시야가 좁아져 자기만 바라보기 마련인데, 그럴 때일수록 주변을 보다 보면 나 같은 어려움 이겨낸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될걸. 거기서 배우는 거지 뭐.”

 


	오윤진교수/사진=세종사이버대학교 제공
오윤진교수/사진=세종사이버대학교 제공

◇“안 보이는 게 공포가 아니라 자신감을 잃는 게 진짜 공포이다”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2005년부터 세종 사이버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오윤진(46) 교수님도 만났습니다. 중학교 입학 무렵 일종의 눈물샘이 막혀 눈이 잘 안 보이는 증세 때문에 수술을 받았다가 의료 사고로 추측되는 일 때문에 시력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은 앞에 전혀 모이지 않는 전맹(全盲)입니다. 시력을 잃을 때가 한창 사춘기에 접어들 시기여서 ‘안 보인다는 현실’에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점이 인생의 약점이자 한계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겁니다.

 

“안 보이는 게 공포가 아니라 자신감을 잃는 게 공포에요. 눈이 안 보일 때 느낀 좌절보다 안 보인다고 지레 능력을 깎아내릴 때 느낀 좌절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죠.”

점자 공부를 한 뒤, 어둠 속에서도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그는 처음으로 ‘빛’이 보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점자 공부한 뒤 처음 읽은 책이 국내 시각장애인 박사 1호인 강영우 박사님의 자서전이었어요. 점자로 된 책이었는데, 손가락으로 글자 하나씩 짚어갈 때마다 가슴이 뛰었어요. 강 박사님은 가난한데다 고아여서 저보다 훨씬 불운한 환경이었어요.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 박사가 졸업한 피츠버그 대학에 유학했다고 합니다. 오 교수는 분명 타인과의 경쟁에서 불리했습니다. 안 보이는 게 그랬고, 유학생활에선 언어 문제도 힘들었다고 합니다.

특히 토론 수업 중심의 학과 진행 때문에 중도에 포기할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더군요. 어릴 때부터 지금도 게을리하지 않는 ‘하루 영어단어 10개씩 외우기’ 버릇과 EBS 청취 덕분에 영어 공포감은 덜했지만, 많은 분량의 원서를 읽고 또 생각을 정리해 토론하는 수업이 벅찼다고 했습니다.

 

그때 한 교수님과의 만남이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놨다고 합니다. 지도교수인 게리 케스키 교수님이었는데, 그의 탁월한 암기 능력과 청취 능력에 감탄하면서 “너처럼 뛰어난 제자를 만나게 돼서 정말 기쁘다”며 그의 장기(長技)를 계속 칭찬해줬다더군요.

 

그러나 또다른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서 교수 채용에 몇번 도전했으나 최종 심사에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탈락했다고 합니다. “시력을 잃었을 때보다 그때 더 좌절했어요. 앞이 안 보이게 됐을 땐 솔직히 어렸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였는데, 나이가 들고, 나도 분명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신체적인 단점을 사회가 용납하지 않더군요. 많이 울었어요.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했고 현재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공부하는 동안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에게, 그런 사회에 보답하고 싶다는 ‘꿈’을 잃지 않았다는 점을 원동력으로 꼽았습니다. 사회복지학부를 전공으로 택했던 것도 그런 이유랍니다.

현재 국립장애인박물관장인 김영일(45) 조선대학교 교수는 해외 유학 시절 겪었던 에피소드를 들려줬습니다.

 

1990년 연세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받은 뒤 1993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벤더빌트대 피바디교육대학 특수교육학과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01년부터 조선대학교 특수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 교수가 유학시절 며칠 밤을 새워가며 수십장의 리포트를 완성해 제출했는데 얼마 뒤 교수가 불러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자네는 왜 리포트를 작성하다 말았나. 이렇게 백지로 낸 이유는 대체 무언가.” 리포트를 잘 썼다며 내심 칭찬을 기대했건만 교수의 한마디를 들은 그의 머릿속은 백지장처럼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토너가 떨어져 글자가 인쇄되지 않은 걸 까맣게 몰랐던 거죠.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답답하고, 화나죠. 하지만 거기서 머문다면 내 스스로에게 지는 거라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죠. 읽는 걸 좋아하는 특기를 살려보자 생각했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빛이 있으나 없으나 나에게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장점으로 살리자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비결은, 원동력은 뭘까. 공통된 해답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윤진 교수는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자기충족적 효과’란 말이 있어요. 꿈을 꾸며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삶은 자기도 모르게 그려온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죠. 우리 모두 명확하고 구체적인 삶의 목적과 목표를 세우고 하나하나 실천해 가다 보면 어느새 꿈이 이뤄져 있을 겁니다.”

                                                                        조선 : 2013.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