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 범람, 풀 죽은 남성
IMF 후 性기능 약해지고 여성들 기대는 높아져…"왜 이리 작아" "왜 빨라" 핀잔 듣고 병원 찾아와
1984년 국내 첫 남성클리닉
유명 탤런트·가수·CEO 등 당시 VIP 환자들 문전성시
아내한테도 숨기고 와 수술···병실 청소부가 알아보자 수술 다음 날 새벽 도망도
비뇨기과 뒤흔든 비아그라
89세 노인까지 찾아와 비아그라 처방 요구…
여자친구와 잘 안 된다며 비아그라 달라는 고교생은 한대 쥐어박고 싶었죠
IMF 후 性기능 약해지고 여성들 기대는 높아져…"왜 이리 작아" "왜 빨라" 핀잔 듣고 병원 찾아와
1984년 국내 첫 남성클리닉
유명 탤런트·가수·CEO 등 당시 VIP 환자들 문전성시
아내한테도 숨기고 와 수술···병실 청소부가 알아보자 수술 다음 날 새벽 도망도
비뇨기과 뒤흔든 비아그라
89세 노인까지 찾아와 비아그라 처방 요구…
여자친구와 잘 안 된다며 비아그라 달라는 고교생은 한대 쥐어박고 싶었죠
1983년 신촌세브란스병원에 각 과 진료실을 기웃거리고 다니는 의사가 있었다. 비뇨기과 교수 최형기(당시 38세)였다. 그는 미국에서 남성에 실리콘 기구를 넣어 발기를 가능케 하는 수술법을 배우고 돌아온 참이었다. 당시로선 거의 유일한 발기부전 치료법이었다. 하지만 그의 메스는 녹슬고 있었다. 남성에 문제가 생기면 정력제나 보약부터 찾던 시절, '그곳'에 칼을 대겠다고 나서는 환자는 없었다. 그래서 자기 수술대에 오를 환자를 직접 찾아 나선 길이었다.
최형기가 동료 의사의 진료실에서 귀국한 파독(派獨) 광부를 만난 건 연말이 거의 다 돼서였다. 사고로 척추를 다쳐 '남성'을 잃은 그는 최형기의 동갑내기였다. 광부의 아내는 독일에서 그를 간호하던 파독 간호사였다. 정신적 사랑을 믿고 결혼한 두 사람의 '플라토닉 러브'는 파탄 직전이었다. 남편이 심한 의처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최형기의 설득으로 광부는 수술대에 올랐다. 그의 아내가 회복실을 찾았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당당하게 선 남편의 남성을 봤다. 그녀는 그걸 움켜쥐고 울었다.
남성의학이란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 최형기의 수술 소식은 그 해 12월 23일자 몇몇 신문 사회면 귀퉁이에 1단으로 실렸다. '불의의 사고에 성불구 된 환자, 음경 보형 수술 국내 첫 시도'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발기부전은 영구적 불구(의 산물)이거나 뾰족한 치료법이 없는 정신적 문제로 여겨지던 때였다. 그의 수술은 고개 숙인 남성 때문에 절망하던 이들에겐 희망이 되는 뉴스였다.
30년이 지난 지금 최형기(68·연세 의대 명예교수)는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다. 2010년 정년 퇴임한 그는 66세의 늦은 나이에 개업했다. 그는 김세철 명지병원장과 더불어 국내에 수술적 성 치료를 도입한 주역이다. 그는 또 1984년 한국 최초로 성기능 클리닉을 열었다. 지난 30년간 4만명이 넘는 남성을 진료하고 그중 1000명 이상을 수술했다. 한국 비뇨기과의 역사는 1917년부터 시작하지만, 남성의학 분야에선 최형기가 대표적인 1세대다.
고개 숙인 남성을 일으켜 세우는 일은 그의 평생 업이었고, 6·25 와중에 별세한 부친 최인태가 못다 한 꿈이자 아들 현민(35)이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3대(代)가 내리 비뇨기과 전문의, 그것도 연세 의대 동문 집안인 것이다. 첫 수술 30주년을 앞둔 한국 남성의학의 개척자를 진료실에서 만났다. 최형기가 들려준 '한국 남성의 어제와 오늘'은 19금(禁) 레벨을 넘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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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子비뇨기과 전문의 아들 현민씨와 함께한 최형기 박사(왼쪽). 그는“성공(成功)은 성공(性功) 없인 이룰 수 없다는 것이 비뇨기과 전문의 30년이 내게 준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 이덕훈 기자
첫 수술에 성공한 최형기는 이듬해 신촌에 '성기능 장애 클리닉'을 열었다. 요즘은 비뇨기과에서 동영상을 보면서 발기 정도를 테스트하는 게 기본이지만, 당시 국내엔 그런 진단법 자체가 없었다. 최형기는 음란물이 유통되던 서울 청계천과 동대문시장에서 '빨간 비디오'를 구해와 진단용으로 비치했다. 그걸 본 의과대학 동료 교수들은 "최 박사, 그러다 외설로 잡혀 들어가는 것 아냐?" 하며 걱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당시 남성의학은 그 정도로 불모지였어요."
최형기에겐 VIP급 환자가 몰렸다. 유명한 탤런트, 가수, 법조인, 정치인, 재벌 총수와 CEO, 전직 대통령의 친·인척 등을 진료했다. 비밀을 지켜주기가 쉽지 않은 대학 병원이었지만 VIIP(Very Important Impotent Person·VIP급 성기능 부전 환자) 클리닉을 만들어 운영했다. "VIIP들은 밖에서 함께 바둑을 두거나 골프를 치면서 진료를 하기도 하고 자택으로 찾아가 진단을 하기도 했어요. 유명 정치인들은 병원 직원들이 다 퇴근한 야밤에 진료를 한 적도 있었죠." 그의 주 전공인 수술적 치료는 '아무리 명의라도 소문이 나기 어렵다'는 분야였다.
그에게 수술을 받은 거물급 정치인이 수술 다음 날 아침 감쪽같이 사라진 일이 있었다. 원무과 직원은 "병원비를 내지도 않고 야반도주했다"고 발끈했다. 그 정치인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다. 수술 다음 날 새벽 비몽사몽 중에 누군가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하며 알아보더라는 것이다. 병실 청소를 맡은 아주머니였다. "마누라도 모르게 온 병원인데, 소문이 나면 나는 어찌 되겠소. 옷가지만 들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소." 그는 "아내한테도 수술 사실을 숨기는 사람들이 누구한테 입소문을 내겠느냐"며 웃었다. 최형기는 "그런 분야에서 30년을 버텼지요. 차라리 수술 기자재나 팔았으면 진작 부자가 됐을 거예요. 허허허. 집사람한테 늘 미안하죠." 하지만 그는 2010년 개업한 뒤 1년간 간판을 달지 않았다. 아는 사람은 찾아올 것이라는, 이 분야 명의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89세 노인까지 병원으로 불러낸 비아그라
'마누라도 모르게 온다'던 비뇨기과 진료실 풍경은 1999년 10월부터 급변했다. 1998년 3월 미국에서 처음 시판한 비아그라가 한국에도 상륙한 것이다. 비아그라를 사려면 의사의 처방이 필요했기 때문에 환자가 갑자기 배로 늘었다. 대학 병원 진료실 중 가장 한산했던 비뇨기과 진료실 앞은 버스 대합실처럼 변했다. 최형기는 "비아그라는 음지에서 숨죽이고 있던 성기능 장애 환자들을 양지로 불러냈다"고 말했다. 양지로 나선 환자 중엔 '노인 군단'이 있었다. "성생활을 포기하고 살던 70~80대 노인들이 새 삶을 찾아 대거 비뇨기과로 몰려왔어요. 제 진료실을 찾아온 남성 중엔 89세 환자도 있었어요."
젊은 층에선 어처구니없는 '비아그라 거품'도 생겨났다. 남자 대학생이 최형기를 찾아와 비아그라를 처방해달라고 했다. "여자 친구와 관계를 하는데 부족한 것 같다나? '넌 멀쩡하니까 쓸데없는 걱정 말고 나가서 뛰거라' 했죠." 그는 "그렇게 일찍부터 발기부전 치료제를 먹으면 습관성이 돼서 나중엔 진짜 환자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아들 현민씨는 "그 정도는 양반"이라고 했다. "여자 친구와 관계가 잘 안 된다며 찾아온 17세 고등학생이 있었어요. '술 마시고 해서 그런지 안 된다'고 하는데, 한 대 쥐어박고 싶더군요. 어쩜 그렇게 떳떳하게 이야기를 하는지, 참."
비아그라가 시판되면서 진료실을 찾는 환자 수는 폭증했지만 메스를 잡는 일은 한동안 크게 줄었다. 최형기는 "칼을 안 대고 치료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전체 발기부전 환자 중의 10~20% 정도는 약이 듣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아그라 출시 10년이 넘어가면서 수술 환자가 다시 늘기 시작했다고 그는 말했다.
◇포르노의 확산… 여성의 과잉 기대 부추겨
최형기가 처음 진료를 시작할 당시 한국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8㎝ 안팎이었다. 지금은 172㎝까지 커졌다. '남성'도 그에 비례해 커졌을까? "30년을 봐왔지만 남성의 크기 변화가 체감되지는 않아요." 최형기는 "과거에 비해 변화가 확실히 체감되는 게 있다면 남성의 성 능력에 대한 여성의 기대 수준"이라고 말했다.
미국에서 비아그라가 출시된 1998년, 한국에선 'O양 비디오'가 단연 화제였다. '한국의 인터넷 발전을 3년 앞당겼다'는 보도가 나올 만큼 사회 전체가 그 동영상을 보려고 안달이었다. 그때까지 포르노가 주로 서적과 사진 형태로 남성을 중심으로 유통됐다면, 인터넷 시대엔 남녀 모두가 쉽게 포르노를 접하게 됐다. O양 비디오는 그런 변화의 촉발점이었다.
"남자의 성 기능은 지극히 정상 범위인데 남편이나 남자 친구를 닦아세우고 결국 관계가 파탄에 이르는 경우를 자주 보게 돼요. 남성의 성 능력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하고, 거기에 못 미치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불안해하는 거죠. 인터넷 포르노의 확산과 겹치는 변화라고 할까요. 과잉 기대 현상이죠."
최형기는 "안타깝게도 IMF를 시작으로 한국 남성의 성기능은 갈수록 약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남성이 받는 사회적 스트레스는 전에 없이 강해지고 있는데 남자의 성능력에 대한 여자들의 기대는 세지고 있어요. 그 불균형 사이에 남자들이 낀 느낌입니다." 그는 '너는 왜 이렇게 작아?' '넌 왜 이렇게 빨라?' 하며 핀잔을 주는 파트너 때문에 어깨가 축 처진 채 찾아오는 20~30대 남성을 보면서 "세상이 크게 변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런 스트레스가 때로는 '크기에 대한 병적 집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현민씨는 "전공의 시절 야구 배트 굵기의 남성을 가진 환자가 왔어요. 주사기로 뭔가를 끊임없이 주입해 그걸 계속 키운 거죠." 그 환자는 "선생님, 제 물건이 볼품이 없죠? 더 키울 수 없을까요"라고 했다.
◇테니스로 이어진 1·2대… 부친이 받은 감사편지 보고 가업 이은 3대
서울 중구 필동에서 피부비뇨기과를 하던 부친이 숨진 것은 1950년이었다. 부친은 서른여섯, 최형기는 여섯 살 때였다. 흰 가운을 입은 아버지를 보며 어린 형기는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비뇨기과 전문의가 되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다. 테니스를 좋아했던 그는 수련의 시절 전공 선택을 앞두고 두 가지를 고려했다. 첫째 칼잡이(외과의사) 분야일 것, 둘째 틈틈이 테니스를 즐길 만큼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 둘을 충족하는 분야가 비뇨기과였다. 그는 부친이 경기고·세브란스 의전 시절 테니스 선수였다는 걸 후일에야 알게 됐다. 최형기는 "테니스 애호 유전자를 물려주셨으니 결국은 아버지가 저를 비뇨기과로 이끈 셈"이라고 말했다.
아들 현민이 3대째 가업을 잇겟다고 했을 때 최형기는 말리고 싶었다고 했다. "남성의학은 한 남자의 인생을 좌우하는만큼 부담감이 매우 큽니다. 다른 분야를 했으면 했죠." 현민씨의 마음은 분명했다. "아버지 덕분에 행복한 가정을 꾸린 사람들이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들을 읽던 어린 시절 내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최형기는 "핏속을 흐르는 비뇨기과 전문의의 DNA를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다. 2009년 최형기는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국내외 비뇨기과 전문의 60여명을 상대로 '라이브 서저리(Live surgery·수술 과정을 생중계하는 것)'를 했다. "수술을 시작하려는데 현민이가 제1 조수로 내 앞에 딱 서는 거예요." 당시 현민씨는 비뇨기과 수석 전공의였다. 그는 "놀랍도록 성장하는 손기술을 볼 때 '피는 못 속인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최형기는 아직 한 번도 성의학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평생을 해온 테니스 덕분이다. "운동은 성 기능을 좋게 하는 산화질소(NO)라는 성분을 만들어냅니다. 처방전도 돈도 필요 없는 '자연의 비아그라'인 셈이죠."
그는 "발기부전은 우리 몸의 고장을 알리는 신호"라고 말했다. "옛날 탄광의 광부들은 갱도 안의 일산화탄소 농도를 알기 위해 카나리아를 동반했습니다. 카나리아는 사람보다 먼저 고통을 느끼고 죽음으로써 위험을 알리죠. 남자들의 남성이야말로 우리 몸의 '카나리아'입니다." 최형기는 "성기능 장애가 6개월 이상 지속된다면 그건 절대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거침없이 이야기를 하던 비뇨기과 전문의 부자는 기자의 질문 한마디에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현민씨가 어릴 때 성교육은 어떻게 했느냐"는 질문이었다. "그거야 뭐…. 별다른 교육은 한 적이 없는 것 같네요, 허허."
이길성 기자 조선 : 2013.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