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형간염 백신 개발의 주역 '유명세'… 간연구재단 세워 후학 양성에 온힘
간 해치지 않고 술 마시는 비법? 3일 마시고 3~4일 쉬는 酒法 추천
김정룡(78)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간(肝) 박사'로 통했다. 1971년 세계 최초로 B형간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혈액에서 분리해내는 데 성공, B형간염 백신 개발의 길을 연 주역이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B형간염 백신 '헤파박스'를 개발했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한 40년 동안 연구 논문만 530편을 쏟아냈고, 의학박사를 40여명 배출한 '간 의학의 대부'다. 일반에겐 '간을 해치지 않고 술 마시는 법'을 알려줘 애주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의사이기도 했다.
서울 종로구 연건동 한국간연구재단에서 지난달 27일 김 교수를 만났다. 내일모레 팔순인데, 그는 여전히 간 연구 지원에 매진하고 있었다. 백신 개발로 번 돈 대부분을 서울대에 기부해 1984년 한국간연구재단을 세웠다. 현재 이 재단 이사장으로 일하며 후학들을 지원한다. "지금 100억원에 해당하는 돈을 재단 만드는 데 썼지요."
서울 종로구 연건동 한국간연구재단에서 지난달 27일 김 교수를 만났다. 내일모레 팔순인데, 그는 여전히 간 연구 지원에 매진하고 있었다. 백신 개발로 번 돈 대부분을 서울대에 기부해 1984년 한국간연구재단을 세웠다. 현재 이 재단 이사장으로 일하며 후학들을 지원한다. "지금 100억원에 해당하는 돈을 재단 만드는 데 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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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서울 연건동 한국간연구재단에서 만난 김정룡 교수가 3일 연속 술을 마신 뒤 3~4일 간을 쉬게 하는 ‘김정룡식 주법’에 대해 설명하며 활짝 웃고 있다. /이덕훈 기자
'금주회(金酒會)'라는, '금요일 술 먹는 모임'에도 매주 참석한다. 금주회는 매주 금요일 저녁 제자들과 함께 최신 의학 경향과 연구 결과들을 발표하고 토론한 뒤 갖는 술자리. 곧잘 폭탄주가 돌지만 그의 간은 정상이라고 했다.
"'필름'이 끊기거나 토할 정도가 되지 않게 술을 마시면 간에 무리가 없어요. 불순물이 많이 들어간 술을 마시면 다음 날 머리가 아픈데 그런 술은 삼가야죠. 건강에 좋은 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알코올 섭취량이 중요해요. (소주잔, 위스키잔, 와인잔 등) 술에 따라 정해진 술잔에 하루 두 잔 정도 마시면 건강에 좋습니다. 그게 바로 약주(藥酒)예요."
김 교수는 세계 최초로 B형간염 백신을 개발했지만 상용화한 것은 세계 세 번째였다. 백신을 만들어 놓고도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의 허가를 받지 못한 탓이다. 처음 있는 일이라 한국에 인증 기준이 없었다. 1981년 미국의 '머크 샤프 앤드 돔'과 프랑스 '파스퇴르연구소'에서 백신을 상용화하고 나서야 보건사회부에서 허가를 내줬다. "백신을 우리나라 수출 상품으로 만들 기회였는데, 안타까웠죠."
그는 1999년 C형간염 바이러스를 혈액에서 분리해내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백신 개발에는 실패했다. "C형간염 바이러스는 마치 에이즈처럼 다른 모습으로 쉽게 바뀌어요. 에이즈 백신이 나올 정도로 의학이 발전하면 C형간염 백신도 나오겠죠."
현직에 있을 땐 하루 환자 200여명을 진료했다. 통금이 있던 1970년대엔 환자들이 그에게 진료를 받으려고 서울대병원 부근 여관에 투숙할 만큼 북새통을 이뤘다. 병원에서 나눠주는 진료 대기표를 먼저 받기 위해서다. "진료를 먼저 받게 해달라는 유력 정치인들이나 재벌 기업인들의 민원이 들어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의사는 대통령이나 지게꾼이나 모두 똑같이 대해야 합니다."
김 교수가 '간 박사'라는 별명이 붙은 사연을 들려줬다. "고(故)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이 생전에 학계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는 인재들을 아끼셔서 곧잘 술을 사주셨어요. 술자리에서 날 '간 박사'라고 불렀는데, 그때부터 전국에 '간 박사'로 알려졌지요(웃음)."
김 교수는 함경남도 삼수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맥주 원료인 홉을 재배해 일본 맥주회사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화상을 입어 사흘 동안 사경을 헤맨 적이 있다. 1948년 가족들과 함께 전남 목포로 내려와 1953년 목포고를 졸업했다. 1959년 서울대 의대를 차석으로 졸업했고, 소화기내과, 그중에서도 간 전문가가 됐다. 장인은 1970년대 초 서울대 총장을 지낸 고 한심석 의학박사다.
"퇴직하고 개업했으면 돈을 많이 벌었겠죠. 그보다는 연구가 가치 있다고 생각했어요. 돈 버는 일보다는 후배들한테 존경받는 학자, 의사로 남고 싶습니다."
이재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