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대표하는 클라이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김자인이고, 세계적 암벽 등반의 성지로 불리는 엘 캐피탄의 ‘노즈’를 남녀 통틀어 최초로 자유등반으로 오른 클라이머도 미국의 여성 클라이머 린 힐이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전문 여성 클라이머들은 눈부신 활약상을 보여 주고 있으며, 클라이밍을 즐기는 일반 여성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작년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는 여성 산악인들을 조명한 특별전을 열기도 했었다.
이번 달에 소개할 영화 두 편은 열정이 넘치는 여성 클라이머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다. 두 편 모두 영화제 기간 중 관객들에게 인기가 높았음은 물론이고, 영화제 이후의 순회상영에서도 상영 요청이 가장 많은 인기 작품이기도 하다.
동강이 Stumped
연출 시더 라이트, 테일러 키팅│미국│2017│25분│color│다큐멘터리
“아주 잠깐 상어에게 팔을 내밀었어요.”, “음식물 찌꺼기 분쇄기에서 포크를 꺼내려다 그만….” 어쩌다가 한쪽 손을 잃었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영화의 주인공인 모린은 웃으며 저런 대답을 던진다. 선천적으로 한 손 없이 태어난 여성 클라이머 모린은 자신의 장애를 농담으로 받아 넘길 정도로 밝고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아직은 만만한 수준의 루트만 등반하고 체계적인 훈련은 해본 적이 없으며, 컵케이크와 온갖 달달한 인스턴트 음식을 입에 달고 살던 그녀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바로 5.12 등급의 암벽 루트 등반이다.
모린은 예전과 다르게 진지하게 몸을 만들고, 그렇게 좋아하던 인스턴트 음식도 칼같이 끊은 채 몇 개월 동안 같은 루트에 지치지 않고 도전한다. 마침내 늘 실패하던 크럭스 구간을 마치고 앵커에 클립을 한 후에 모린은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묘한 표정을 짓는다. 이런 기분이 등반을 계속 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아닐까? 프로 선수가 아닌 그저 등반을 좋아하는 일반인이 느끼는 등반의 성취와 즐거움을 이만큼 잘 표현한 영화가 있을까 싶다.
영화에는 모린 외에도 한쪽 다리가 없거나 시각 장애를 가진 모린의 동료 클라이머들이 많이 나온다. 이들이 바라는 건 장애를 극복한 대단한 인생승리라는 동정과 편견이 깔린 시선이 아니라, 그냥 지금보다 좀더 나은 클라이머가 되는 것이다. 모린을 비롯한 장애인 클라이머들의 등반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세상을 향한 솔직한 외침을 유머 가득한 패러디로 발랄하게 담아낸 유쾌한 영화.
프로그래머의 노트
3회 울주세계산악영화제의 개막작이었던 <던월>의 주인공 토미 칼드웰도 손가락 마디가 하나 없는 동료 장애인 클라이머로 영화 속에 깜짝 등장한다. 모린과 동일한 조건으로 같은 5.12 루트를 올라보기 위해 한 손을 묶고 등반을 시도한다. 결과는 5.14 수준의 등반을 하는 최정상급의 토미 칼드웰, 그는 과연 모린과의 대결에서 이겼을까? 결과는 영화를 보고 확인하시길!
감독 스토리
동강이
감독 시더 라이트Cedar WRIGHT, 테일러 키팅Taylor KEATING
공동 감독인 시더 라이트는 미국 노스 페이스 소속의 프로 클라이머로 1년에 1~2편 이상의 산악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있어서 울주세계산악영화제에서도 매년 그의 연출작을 상영하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클라이머인 알렉스 호놀드와 함께 극한의 고통 속에서 연속 등반을 펼치는 <서퍼 페스트> 시리즈의 연출로 산악영화계에서는 유명세를 탔다. 몇 년 전엔 새로운 분야인 패러글라이딩에 푹 빠져서 본인의 패러글라이딩 도전기를 <신참내기들>이라는 단편 영화로 만들기도 했다.
얼마 전 등반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동일한 열망을 가진 테일러 키팅과 함께 ‘시더 라이트 프로덕션’이라는 영화 제작사를 설립했다. 이 제작사의 모토는 ‘일주일에 50시간이 아닌 5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열심히 등반을 즐기자’라고 한다.
마마 Mama
연출 보이첵 코자키비치│폴란드│2017│45분│color│다큐멘터리
작은 체구에 체력도 약한 내성적 성격의 킹가. 뛰어난 신체 조건도 아닌데다 발군의 실력을 보이지도 않았던 소녀 킹가를 주목했던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내면엔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던 등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고, 꾸준한 훈련으로 스포츠 클라이밍 주니어 세계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어느새 폴란드를 대표하는 선수가 된다.
세계 대회에서 승승장구하며 전성기를 누렸으나 잇따른 부상으로 더 이상의 대회 출전은 포기하고 결혼을 한다. 어렵게 얻은 두 아이의 육아와 가사에 전념하느라 자연스레 등반을 점점 멀리했으나, 여전히 가슴속 등반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은 스스로가 행복해야 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기 위해 등반과 육아를 병행하기로 한다.
그녀의 목표는 폴란드 마무토바동굴 안에 있는 9a급 루트로 지금까지 6명의 남성만 성공한 세계 최고급의 난이도를 가진 힘겨운 도전이다. 아이가 낮잠 자는 시간을 활용해 훈련하고, 집에 돌아온 후에는 후다닥 저녁을 준비하고 애들을 씻기고, 재우고 난 뒤 핑거보드와 근력 훈련에 매진한다. 이렇게 1년을 매진한 결과 그녀는 오히려 결혼 전보다 체력이 높아지고 드디어 폴란드 여성 최초로 마무토바동굴의 9a 루트에 성공한다.
프로그래머의 노트
영화가 다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다. 킹가는 전업 클라이머가 아니라 제약 회사의 품질 관리자로 일하는 회사원이었다. 9a 등반은 둘째를 낳고 얻은 1년간의 육아휴직 기간에 이뤄냈다고 한다. 일상을 모두 훈련에 쏟아 부어도 힘든 수준의 등반을 가사와 육아까지 병행하며 이뤄낸 킹가는 진정한 슈퍼 우먼임에 틀림이 없었다.
감독 스토리
마마
감독 보이첵 코자키비치Wojtek KOZAKIEVICZ
스포츠 다큐멘터리 영화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감독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클라이머를 비롯한 다양한 아웃도어 선수들에 대한 영화를 제작해 왔다.
감독 본인도 등반을 취미 이상으로 즐기는 수준급 실력을 자랑한다. <마마>의 주인공 킹가와 오랜 기간 같은 암장에서 연습을 해 온 인연으로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성공 스토리로 이어지는 요란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킹가의 일상과 가족, 등반에 대한 열정을 침착하고 진중하게 담아내고 싶었다고 한다.
<마마>로 폴란드 크라카우산악영화제 클라이밍 부문 최고상 및 관객상을 받았으며, 스페인 빌바오산악영화제 심사위원상 등 유수의 산악영화제에서 여러 상을 받았다.
월간산 글 최선희 프로그래머
사진 울주세계산악영화집행위원회 조선일보 입력 2019.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