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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여성 H씨는 요즘 친구들로부터 ‘난자 여왕’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53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상적인 월경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여성의 평균 폐경 연령은 49.7세. H씨 나이대의 친구들은 이미 월경을 그만둔 지 꽤 됐으므로 난자 여왕이라는 별명에는 부러움이 섞였다.
하지만 다른 동물들과 비교하면 H씨를 난자 여왕이라고 부르기는 좀 애매하다. 모든 포유류와 영장류는 죽기 직전까지 자손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미국 하버드대학 연구진은 인간과 유전자가 가장 비슷한 암컷 침팬지의 생식 행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 결과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40세 이상의 고령 암컷 침팬지 중 47%가 한 번 이상 새끼를 낳는 것으로 밝혀졌다. 참고로 야생 침팬지의 기대수명은 약 15세에 불과하다. 즉, 침팬지는 다른 신체기관의 전반적인 노화에도 불구하고 폐경이라는 생식 불능 현상은 겪지 않는 셈이다.
모든 생명체의 존재 목적은 자손의 생산이다. 그런데 중년 여성의 경우 다른 신체기관은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에서 생식기능만 급격히 떨어진다. 남성이 죽을 때까지 정자를 생산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지구상에서 폐경을 겪는 동물은 현재까지 인간을 비롯해 범고래, 들쇠고래 등 단 3종만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여성의 기대수명은 85.2세다. 즉 여성들은 인생의 5분의 2 이상을 폐경 상태로 살게 된다. 인간과 똑같이 폐경을 하는 두 종의 고래도 절대 만만치 않다. 범고래와 들쇠고래의 암컷은 약 40세에 폐경을 한 뒤 그 후로도 40여 년을 더 산다. 즉, 삶의 절반 이상을 폐경 상태로 지낸다.
인간의 폐경을 설명하는 이론으로는 대략 세 가지가 있다. 먼저 나이 든 여성은 출산 시 사산의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라는 이론이다. 이를 ‘어머니 가설’이라고 한다.
둘째는 고부간의 경쟁이 폐경의 진화를 촉진했다는 가설이다. 핀란드의 루터파 교회에는 1702년부터 1908년까지 신도들의 출생 및 사망, 결혼 등에 관한 상세한 자료들이 소장돼 있다. 핀란드 투르쿠대학 연구진이 이 자료들을 연구한 결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동시에 아이를 낳을 경우, 아이가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시어머니가 낳은 아이의 생존율은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약 50%, 며느리가 낳은 아이의 경우 생존율이 66%까지 떨어진다는 것. 하지만 엄마와 친딸이 같은 시기에 아이를 낳은 경우에는 아이들의 생존율에 전혀 영향이 없었다.
다시 말해 며느리는 엄마와 친딸처럼 협력하는 대신 고부간에 아기를 위한 먹이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이다. 이 연구 결과는 서로 유전적 연관성이 없는 각기 다른 세대의 여성들 사이에서는 동시에 자식을 생산하는 것보다는 나이가 더 많은 여성이 생식을 중단하는 게 좀 더 자식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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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가장 널리 알려진 ‘할머니 가설’이다. 수렵채취 시절의 인류가 아이를 안전하게 성장시킨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따라서 늦은 나이에 자식을 새로 낳는 것보다는 손주를 돌봐 생존율을 높이는 데 힘을 보태는 게 오히려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 유리했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손주를 선택하게 된 할머니들은 아이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노후 생존율도 높일 수 있었다. 이 이론을 처음 내놓은 미국의 크리스텐 호크스 박사는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을 했다.
그에 따르면 침팬지는 어른이 된 시기부터 25년 정도 더 살지만, 인간은 6만~2만 4000년 전 사이에 할머니가 손주를 돌보면서 성인 이후 49년이나 더 살게 된 것으로 나타났다. 손주를 돌보며 살아남은 할머니들이 장수 유전자를 퍼뜨림으로써 인간은 다른 영장류보다 훨씬 수명이 늘어나게 된 셈이다.
할머니들이 축적한 지식은 손주를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전체 무리에도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영국 엑서터대학 연구진이 인간처럼 폐경을 하는 범고래 무리를 장기간 관찰했다. 그 결과 주먹이인 연어 무리를 사냥할 때 할머니 범고래들이 앞장서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연어 무리가 적은 시기에 할머니 범고래가 진두지휘하는 경향이 더 높게 나타났다. 이는 사냥이 힘든 때일수록 노련한 할머니 범고래들이 나서서 성공 확률을 높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렵채취 시절의 인간 할머니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식활동에서 자유로워지면서 무리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난 역량을 발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 왜 하필 인간과 범고래, 들쇠고래 단 3종만 폐경을 하는 것일까. 이들의 공통점은 새끼들이 성장해도 암수 할 것 없이 모두 무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집단에서는 암컷이 나이가 많아질수록 혈연으로 맺어진 개체의 비율이 늘어난다. 그 때문에 다른 동물 집단보다 나이 많은 암컷이 생식능력을 포기할 때 얻을 수 있는 포괄적인 이익이 훨씬 더 많아지게 된다.
순전히 생물학적 관점에서만 보면 번식능력이 없는 암컷은 쓸모없는 존재다. 1960년대 미국의 유명한 부인과 의사였던 로버트 윌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폐경기가 된 여성을 ‘살아 있는 부패 상태’ 라고 했다. 심지어 사람은 남성과 폐경 전의 여성, 폐경 후의 여성이라는 3개의 성(性)으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과거에는 나이 많은 부모에게서 선천적 결함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경우 주로 여성을 탓하곤 했다. 남성과는 달리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서 폐경이 되어 수태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연구 결과가 나이 많은 여성의 난소는 결함을 보유할 가능성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제시했다.
이에 비해 남성의 노화가 생식능력 감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그동안 연구된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최근 남성도 여성처럼 나이가 들수록 가임 능력이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미국 로라 다지 박사팀이 보스턴 지역의 불임클리닉에 소장된 자료를 분석한 것. 그에 따르면 30세 이하 여성은 배우자의 나이가 30~35세일 때 출산 성공률이 73%였지만, 배우자 나이가 40~42세인 경우 성공률이 46%로 감소했다. 또한 여성이 35~40세이고 배우자가 30~35세일 때 임신 성공률이 54%인 데 비해 배우자 나이가 그보다 훨씬 젊은 30세 이하인 경우 성공률이 70%로 올라갔다.
남성의 가임 능력이 나이가 들수록 감소하는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기존 연구에 따르면 남성들도 나이가 들면 정자의 운동능력이 떨어지고 유전자에도 결함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의학의 발달과 눈부신 과학기술의 혁신을 이룬 현대사회에서 할머니 가설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이다. 아이의 생존율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으며, 연장자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풍토도 사라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의 폐경 이후 수명도 점차 짧아지는 것이 순리다. 하지만 현대 여성의 평균수명은 오히려 높아지는 추세다. 어쩌면 맞벌이 자녀의 아이를 맡아서 육아로 황혼을 보내야 하는 할머니들이 폐경기의 효용성을 예전보다 더 높이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