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만 명의 일본인이 스스로 사라진다…
레나 모제 글, 스테판 르멜 사진|이주영 옮김|책세상|256쪽|1만5000원
“’더 이상 어머니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봄날 새벽, 유이치는 저렴한 모텔을 알아본 후 병든 어머니를 그곳에 버리고 그대로 달아났다.”
1989년 도쿄 주식의 급락을 시작으로 부동산 가격의 폭락, 경기 침체, 디플레이션이 이어지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의 늪에 빠졌다. 이후 일본에서는 매년 1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증발’하고 있다. 그중 8만5,000명 정도가 스스로 사라진 사람들이다.
체면 손상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일본인들은 빚이나 파산, 이혼, 실직, 낙방 같은 각종 실패에서 오는 수치심과 괴로움을 참지 못해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그들은 신분을 숨긴 채 도쿄의 슬럼 지역인 ‘산야’ 등에 숨어 산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레나 모제와 그녀의 남편이자 사진작가 스테판 르멜은 2008년 우연히 증발하는 일본인들에 대해 알게 되고, 이 이야기에 끌려 ‘인간 증발’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파괴된 인간과 그들을 방기하고 착취하는 일본 사회의 충격적인 민낯을 목격했다.
이들은 도쿄에서부터 오사카, 도요타, 후쿠시마까지 5년에 걸쳐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증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들의 슬픈 과거와 시대의 암울한 초상을 취재했다.
일본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압력솥과 같다. 마치 약한 불 위에 올려져 조금씩 끓는 압력솥 같은 사회에서 일본인들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러다 압력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린다.
빚이나 진학 실패, 이혼과 같은 실패 때문에 증발하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경우는 실직 때문이다. 오랫동안 자신을 희생해온 직장인들에게 해고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준다. 갑작스럽게 해고를 당한 한 남자는 평소처럼 아내의 배웅을 받고 출근하는 척 나와 지하철에 탄 채로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도주한 자들은 대부분 홀몸으로 나왔는데, 일부는 버리고 온 가족이 그리워 가까운 곳에 은밀히 머물거나 가명으로 다른 직장을 다녔다. 야반도주가 일상화되자 이삿짐센터들은 세 배나 비싼 가격으로 ‘야반도주 서비스’를 시작했다. 사회 문제에 맞게 이익을 추구하는 변형된 집단이 나온 것이다. 또한, 사라지는 사람들이 늘면서 이들을 찾는 탐정 업체도 성행하게 된다.
‘증발’이 꼭 어디론가 떠나는 도피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오타쿠나 코스프레처럼 현재를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 증발이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자신만의 취미에 몰두하며 혼자 방에 틀어박혀 생활하는 오타쿠는 일본 열도에만 약 30만 명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앞서 일본에서 일어났던 사회문화적 현상들이 일정 시간을 두고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났다는 점을 돌이켜 보면 일본의 이 끔찍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체면과 경쟁이 중요하고 실패한 개인들의 재기를 뒷받침해주는 사회 안정망이 부실한 우리에게, 일본의 ‘인간증발’은 경각심을 일깨운다.
조선비즈 문화부 입력 : 2017.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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