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주의 순간보다는 출발선에 섰을 때 가슴이 더 벅찼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내가 사막을 달린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고생했던 일들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어요.”(정현강 씨·22)
“어릴 때부터 좋아한 경관이 사막이었어요. 커서 마라톤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생각해 보니 두 개를 합치면 ‘사막 마라톤’이더라고요. 꼭 하고 싶은 일이었어요.”(정송강 씨·25)
정송강, 현강 남매는 6월 18일부터 24일까지 열린 ‘2017 고비사막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20세기 초 이곳을 횡단하고 그 경험을 글로 남긴 유럽의 여성 탐험가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시작됐다는 이 대회는 매년 코스가 바뀌지만 7일 동안 250km를 걷고 달린다. 총 6개 구간이 있는데 마라톤 풀코스와 같은 거리의 42.195km 코스, 마지막 이틀 동안 잠을 자지 않고 80km를 주파하는 코스는 반드시 포함된다. 중국과 몽골에 걸쳐 있는 고비사막, 칠레 아타카마사막, 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 그리고 남극까지 포함하면 그랜드슬램이라고 부르는 ‘4대 극지 마라톤’이 완성된다. 누나 송강 씨와 동생 현강 씨가 사막 마라톤에 참가한 것은 처음이었다. “해병대 전역을 앞두고 올해 1월 말 마지막 휴가를 나왔는데 누나가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더라고요. 듣자마자 ‘이거다’ 싶었어요.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강해지고 싶어 무언가에 도전하고 싶었거든요.”(현강 씨)
“사막 마라톤 얘기를 꺼냈을 때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이 동생이에요. 다들 ‘멋지다’고 호응하면서도 결국은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했거든요. 해보기 전에는 절대 이 매력을 모를 거예요.”(송강 씨)
해병대에서 한 구보가 달려본 전부였다는 대학생 동생은 처음 도전한 사막 마라톤에서 완주에 성공했다. 마지막 80km 구간은 섭씨 5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 속에서 26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열사병 증세에 꼬박 3시간을 누워 있어야 했고, 11kg이 넘는 배낭을 멘 채 졸면서 걷기도 했지만 끝까지 레이스를 마쳤다. 몸무게는 일주일 만에 6kg이 줄었다. 700만 원에 육박하는 참가비를 마련하기 위해 4개월 동안 하루에 10시간 이상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현강 씨는 “부모님에게 조금이나마 도와 달라고 하지 그랬느냐”는 질문에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면 아예 도전하지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같은 길도 다른 느낌” 트레일 러닝

트레일 러닝은 트레일(trail·자취, 흔적, 산길)과 러닝(running)을 합친 말로 포장된 도로가 아닌 길을 달리는 것을 일컫는다. 국제트레일러닝협회(ITRA)에서는 ‘모든 자연환경을 달리는 활동’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날 행사를 주최한 런엑스런의 유지성 대표(46)는 “과거에는 산악 달리기, 사막 마라톤, 어드벤처 레이싱 등 상황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 2012년 ITRA가 출범하면서 트레일 러닝이라는 용어가 자리를 잡았다”고 얘기했다.
유 대표는 명실상부한 국내 트레일 러닝의 선구자다. 2002년 4월 사하라사막 마라톤 대회에 처음 출전한 뒤 사막 마라톤 정보를 제공하는 한국어 사이트를 운영하면서 사막 마라톤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트레일 러닝에 빠져 직업이던 건축설계사도 그만둔 뒤 사막 마라톤만 30차례 뛰었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4대 극지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2차례 달성했다. 동호인들 사이에서 ‘대장님’으로 불리는 유 대표는 “호기심이 생겨 그냥 놀러갔다가 직업이 됐다.(웃음) 내가 깨달은 트레일 러닝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다. 달리기를 통해 많은 곳에 가고, 많은 사람을 만나 다양한 세상을 자유롭게 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 대표가 길라잡이로 나선 뒤 사막 마라톤을 경험한 사람이 크게 늘었다. 그중에는 ‘전체 몇 등으로 완주했다’는 이들도 꽤 있다. 하지만 유 대표는 “기록을 의식하면 즐거움이 덜할 수 있다”며 “처음 사막 대회에 나갔을 때 한 외국인이 출발과 동시에 휙∼ 하고 저만치 앞서 가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12분대에 뛰는 ‘프로’였다. 그런 사람들과 어떻게 경쟁을 할 수 있나. 기록은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게 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한 오후 7시 40분. 참가자들이 일제히 출발했다. 애초 참가 신청자는 200명에 육박했지만 추첨을 통해 40명을 추렸다. 유 대표는 “이 행사는 공식 대회와는 다르다. 트레일 러닝을 처음 하는 사람들도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체험 기회’ ‘미끼 상품’ 같은 것이다. 끝나고 뒤풀이도 있기 때문에 참가자가 많으면 핸들링이 안 된다. 4월에 경기 동두천에서 주최한 ITRA 인증 대회 ‘제3회 코리아 50K’는 풀코스 59km와 단축 코스 10km를 합해 참가자가 1100명이 넘었다”고 설명했다.
오후 8시가 넘어서면서 남산은 어둠에 싸였다. 참가자들이 착용한 헤드 랜턴의 움직임이 마치 반딧불이의 행렬 같다. 오후 8시 25분이 지나 첫 완주자가 나왔다. 45분57초 만에 레이스를 마친 김동민 씨(34)는 “대장님은 재미있게 뛰라고 했는데 오늘은 기록을 좀 내보고 싶어서 초반부터 세게 달렸다”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난해 9월 마라톤에 입문했고 한 달 뒤 트레일 러닝도 시작했다는 김 씨는 “오늘 코스는 너무 좋았다. 마라톤과 트레일 러닝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면 후자다. 같은 코스가 뛸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에 더 재미있다. 어제와 오늘이, 비 올 때와 안 올 때가 다르다. 무엇보다 힘들게 오른 산이나 언덕을 내려가는 재미가 너무 좋다”고 말했다.
출발한 지 1시간 25분이 지나 레이스가 끝났다. 모두 완주한 참가자들은 서로를 축하하며 활짝 웃었다. 남산도서관을 지나던 시민들이 한여름 밤에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거리는 이들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다단계’ 통해 중독된 극한의 즐거움

제갈혜화 씨(43)는 원래 등산과 마라톤을 즐겨 했지만 지금은 2년 전에 시작한 트레일 러닝에 푹 빠져 있다. 여러 대회에서 마주치다 보니 런엑스런 스태프들과는 막역한 사이가 됐다. 이날은 자원봉사자로 시설을 설치·철거하고 참가자들의 기록을 적었다. 김동민 씨처럼 트레일 러닝의 가장 큰 매력이 “내려가는 재미에 있다”고 한 제갈 씨는 고향인 충북 충주에도 걸어간 적이 있다고 했다.
역시 자원봉사자로 대회에 나온 김영일 씨(44)는 4년 전 겨울 “아무것도 모른 채” 30km가량을 달리는 태백 대회에 참가했다가 트레일 러닝의 ‘덫’에 걸렸다. “진짜 힘들었는데 끝나고 나니 다음 대회를 찾게 되더라”는 그는 “이왕 시작한 거 사막에 가고 싶다. 꼭 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장지윤 씨(41)는 아트 디렉터로 일하다 2012년에 사하라사막 250km를 완주한 뒤 아예 트레일 러닝 대회 기획자로 변신해 2015년부터는 ITRA 국제위원으로도 일하고 있다. 망설임 없이 “자연과 함께해서”를 트레일 러닝의 매력으로 꼽은 장 씨는 “사막을 달리면 심오한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는데 막상 해보니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더라. 바람 한 점이 정말 고맙다는 느낌, 그게 좋았다”고 했다.
앳된 외모의 김채울 씨(24)는 이 바닥의 ‘고수’다. 5월에 끝난 ‘2017 사하라사막 마라톤 대회’에 최연소로 참가해 250km를 완주했다. 대회를 앞두고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모금한 700여만 원을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에 전액 기부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 씨는 3년 전 ‘은총이와 함께하는 철인 3종 대회’에 자원봉사자로 참가한 것을 계기로 철인 3종을 시작했고 트레일 러닝에까지 발을 디뎠다. 김 씨는 “희귀 난치병을 앓고 있는 박은총 군(14)이 중증 장애인 친구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철인 3종에 도전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사막 마라톤을 통해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라톤을 즐기다 지난해 트레일 러닝을 시작했다는 김진영 씨(26)가 “이건 마약이에요.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어요”라고 하자 김채울 씨가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마약에 손대면 인생을 망치는 것처럼 이것도 그래요. 사막에 한 번 가려면 망했다 싶을 정도로 돈이 많이 들거든요(웃음). 혼자 망할 수는 없으니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여야죠. 하하.”
흔히 사막 마라톤을 설명할 때는 극한(極限), 극기(克己)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하지만 사막 마라톤을 다녀온 사람들은 ‘즐거움과 자연’을 이야기했다. ‘극한의 즐거움’이라고나 할까. 정현강 씨는 이런 말을 했다. “사막 마라톤 관련 사진과 영상을 처음 본 순간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어요. ‘지금까지 단 한 번이라도 내 가슴이 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 참가를 결심했어요.”
‘극한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는 쉬지 않고 이어졌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이들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밝았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 입력 2017-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