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물서 속살 드러낸 채 고려인들 혼욕 즐겼다고?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도기(陶器)에 푸른 빛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한다. 근래에 들어 그 제작기술이 정교해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사자 장식의 향로는 짐승이 웅크리고 있고 아래에는 봉오리가 벌어진 연꽃무늬가 떠받치는 형상이다. 이는 여러 그릇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빼어나다.”
1123년(인종1년) 송나라 사절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1091~1153)은 고려에서 경험한 문물 가운데 고려청자를 최고로 쳤다. 12세기 초는 고려청자가 한창 전성기로 접어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서긍은 한 달간의 사행 기간 동안 경험한 견문을 바탕으로 40권의 책을 지었는데 ‘고려도경’을 말한다. 한 달 남짓한 체류 기간 동안 보고 들은 고려의 역사, 정치, 경제, 문화, 종교, 인물 등 광범위한 부분을 글과 그림으로 빠짐없이 정리했다. 고려도경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 한정된 고려시대 사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을 전하며 도자기, 궁궐, 군사와 병기제도, 복식, 선박 등의 분야에서도 당시의 기술을 연구·복원하는 중요한 근거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책은 철저히 중국의 시각에서 쓰였다. 서긍은 고려를 오랑캐 국가로 인식하면서도 중화의 풍속을 잘 모방해 사이(四夷)와는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종묘와 사직을 세웠으며 문궐도 졸렬하기는 하나 옛 제후(기자)의 예를 따라 지었고 관복도 송의 제도를 따라 입어 의복제도가 잘 갖춰졌다고 했다. 음식을 먹고 마실 때 그릇을 사용하고 문자는 해서와 예서를 모두 쓰고 서로 주고받을 때 무릎을 꿇고 절하며 엄숙히 공경하므로 충분히 우러러볼 만하다고 추어올렸다. 그러나 실제에서는 난잡스러운 오랑캐의 풍속을 끝내 다 고치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고려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을 좋아하며 쉽게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긴다. 남녀 간의 혼인에서도 가볍게 합치고 쉽게 헤어진다. 참으로 웃을 만한 일이다”라고 했다.
고려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목욕을 한 후에야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했다. 흐르는 시냇물에 남녀가 모여 모두 의관을 언덕에 놓고 속옷을 드러내는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서긍은 “고려인들은 중국인들을 때가 많다고 늘 생각했다”면서 “중국문헌에 고려인은 예로부터 깨끗하다고 했는데 여전히 그러했다”고 적었다.
부처를 숭상하고 살생을 경계해 국왕이나 재상이 아니면 양과 돼지고기를 먹지 못했다. 따라서 도축기술도 매우 서툴렀다. 도축할 때는 짐승의 네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었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 배를 가르는데 장과 위가 다 끊어져서 똥과 오물이 흘러넘쳤다.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않았다.
고려의 형벌제도는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대했다. 서긍은 “대역불효한 큰 죄인은 참형에 처해졌지만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는데도 산과 섬에 유배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돈을 내면 처벌을 면제받기도 한다”며 고려의 풍속이 인자한 것이라고 했다. 상업은 발달하지 않았으며 주산조차 사용하지 않아 돈이나 비단을 출납할 때 회계관리는 나무조각에 칼로 그어 새기는 한심한 수준이었다.
조선시대 모자를 중시했지만 이 풍습은 이미 고려 때도 존재했다. 고려인은 모자를 쓰지 않은 맨머리는 죄수와 다름없다고 수치스러워했다. 고려인은 무늬가 들어간 비단 재질의 두건을 소중히 여겨 두건 하나의 값이 쌀 한 섬에 달했다. 가난한 백성은 이를 마련할 길이 없어 죽관(竹冠)을 만들어 썼다. 전국에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짚신을 신었지만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그 모양이 괴이하다고 했다.
서긍은 넓적한 고려인의 머리두상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고려인은 대개 머리에 침골(뒤통수뼈)이 없다. 승려는 머리를 깎았으므로 그 두상이 드러나는데 매우 이상하게 느꼈다. 진사(晉史)에서는 삼한(三韓) 사람들은 아이를 낳자마자 돌로 머리를 눌러 넓적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체질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다.”
고려의 과일 중에서는 밤을 최고로 꼽았다. 크기가 복숭아만 하며 맛도 달고 좋다고 했다. 능금, 푸른배, 참외, 복숭아, 대추 등은 일본에서 건너왔는데 맛이 약하고 모양이 작았다.
고려의 인재가 동남쪽 여러 나라 중 가장 많다고 하면서 다양한 인물평도 다룬다. 고려 인종 때 척족인 인주 이씨의 중심 인물로 국정을 농단한 것으로도 모자라 결국 반란까지 일으킨 이자겸에 대해 “풍채가 단정하고 거동이 온화하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겁게 여겼다. 국정을 잡고서도 자못 왕씨를 높일 줄 알아서 고려의 신하 중에서는 왕실을 보호하고 융성케 하니 현신(賢臣)이라 할 만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런 평가로 미뤄 이자겸에게서 군자풍의 면모가 전혀 없지는 않았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물론 인종 초기는 이자겸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기 전이어서 자신을 의도적으로 낮췄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미 이 시기 이자겸의 야욕은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서긍은 말미에서 “다스리는 농장에는 전답이 이어졌고 저택의 규모는 사치스러웠다. 사방에서 선물을 하여 썩은 고기가 늘 수만 근이었으며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고 부연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인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도 거론하고 있다. 서긍은 “김씨는 대대로 고려의 문벌가문이며 그 자손 가운데 글을 잘하고 학문에 정진함으로써 등용된 사람이 많다”고 소개하면서 “(김부식은) 장대한 체구에 얼굴은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두루 통달하고 기억력도 탁월하여 글을 잘 짓고 역사를 잘 알아 학사들에게 신망을 얻는데 그보다 앞선 사람이 없었다”고 기술했다. (서긍은 고려도경을 송나라 황제에게 바치면서 김부식의 초상화까지 그려 보고했다.)
고려도경은 자신이 경험한 것뿐만 아니라 송에 알려진 고려의 정보를 총망라하고 있다. 따라서 12세기 초 송의 고려에 대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지만 당대 시대상과 생활상을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긍은 송나라 문신으로 시가와 그림에 능통했다. 그는 고려 인종원년 6월 고려에 왔다. 승하한 고려 예종을 조문하고 송나라 휘종 황제의 국서를 전달하는 임무를 받았다. 요나라가 끊임없이 송나라를 압박해 오는 상황에서 1115년 여진이 금나라까지 건국하자 위기감이 가중된다. 송나라는 고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다. 송나라는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해 황제의 친서를 전달했고 전례 없는 극진한 예물도 함께 보냈다. 귀국 이듬해 고려도경 한 부를 지어 송나라 휘종에게 바친 서긍은 다른 한 부를 작성해 집에 보관했다. 휘종에게 바친 책은 전란의 와중에 사라졌고 서긍 집안에 보관된 책이 남아 전해져 20세기 들어 그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배한철 영남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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