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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자 늘려라” 보조금 펑펑… “눈먼돈 챙기자”

해암도 2013. 6. 2. 10:48

 

 사기꾼 활개

범죄 부르는 ‘휴대전화 기형적 유통구조’ 대해부

 

서류뭉치를 뒤적대더니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판매원이 계산기에 찍힌 숫자를 보여주며 말했다. “24개월 약정에 LTE62(월 6만2000원) 요금제를 쓰면 최신 스마트폰을 65만 원까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박상현 씨(28·학생)는 3년 쓴 휴대전화를 바꾸기 위해 2주 전 서울 광화문 일대의 한 휴대전화 판매점을 찾았다. 판매원의 설명대로라면 출고가가 100만 원이 넘는 최신 스마트폰을 30만 원 넘게 할인받는 것이다. 박 씨는 얼마 전 LTE62 요금제로 같은 스마트폰 기종을 52만 원에 샀다는 친구의 말이 떠올라 “왜 같은 조건인데 가격이 다르냐”고 물었다. 판매원은 “요즘은 보조금이 적을 때다. 비싼 요금제를 선택하면 휴대전화 값을 더 할인받을 수 있다”며 다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박 씨는 요금을 더 내기 싫어 처음 제시받은 조건으로 휴대전화를 바꿨다.

휴대전화를 사려고 대리점을 찾은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이야기다. 휴대전화 값을 할인받으려고 비싼 요금제를 선택해 불필요한 통신비를 지출하고 있는 게 ‘통신 선진국’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소비자가 시기와 장소에 따라 다른 액수를 내고 휴대전화를 구입하는 건 공식적으로 지급되는 약정 보조금 외에 다른 명목으로 추가되는 ‘음성적’ 보조금이 매번 달라져서다. 음성적 보조금은 통신사가 대리점에 지급하는 판매·정책장려금 등과 휴대전화 제조사에서 주는 장려금 등으로 나뉜다. 정부는 통신사가 1인당 27만 원을 초과하는 보조금을 고객에게 제공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하지만 통신사와 제조사가 마케팅 비용 명목으로 지급하는 음성적 보조금은 막지 못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통신사들이 매년 쓰는 마케팅 비용 중 약 6조 원이 보조금으로 쓰이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휴대전화 판매점주는 “통신사에서 대리점, 판매점의 판매실적을 실시간으로 점검해 판매가 부진한 지역에 보조금을 더 푼다는 사실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했다.


○ 통신요금 끌어올리는 유통구조

약정 할인으로 포장된 ‘깜깜이’ 휴대전화 판매 방식 때문에 대부분의 고객은 자신이 휴대전화를 얼마 주고 샀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소비자들은 요금제 약정 할인 조건을 제시하는 판매원의 안내에 따라 계약한다. 그러다 보니 필요 이상의 고가 요금제를 선택하게 된다.

실제로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말 3G 및 롱텀에볼루션(LTE) 이동전화서비스 요금제를 2개월 이상 이용한 1511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LTE 서비스 응답자가 가장 많이 가입한 LTE62 요금제 이용자의 월평균 음성 통화량은 기본 제공량 350분의 68%(238분) 수준이었다. 이 요금제는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 모두 월정액 6만2000원에 통화 350분, 문자 350건을 기본으로 제공한다. 데이터는 SK텔레콤에서 5GB(기가바이트), KT, LG유플러스는 6GB를 쓸 수 있다.

 

하지만 문자 평균 사용량은 월 100건(28.6%), 데이터 평균 사용량은 3.2GB로 56.7%에 그쳤다. 비싼 요금제일수록 평균 사용량은 더 떨어졌다. 쓴 만큼 통신요금을 내는 게 아니라 미리 요금을 내고도 다 쓰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전응휘 녹색소비자연대전국협의회 상임이사는 “통신사가 일방적으로 정해 놓은 정액요금제는 불필요한 통신비 지출로 이어진다”며 “보조금 지급을 명목으로 정액요금제 가입을 유도하는 유통구조는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 유통구조의 수수께끼…그 내막은?

현재 유통구조는 통신사 산하 대리점과 판매점에서 휴대전화 판매와 통신사 가입이 동시에 이뤄진다. 고수익이 나는 비싼 요금제 가입자에게 보조금을 집중시킨다. 이에 따라 휴대전화 가격이 변하는 구조에서 소비자는 싼 가격에 휴대전화를 사기 위해 고가 요금제에 가입한다. 미국 등 선진국은 휴대전화 판매와 가입이 분리돼 있어 유통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국내 휴대전화 시장은 휴대전화를 많이 팔아 이윤을 남기는 게 아니라 고객을 많이 가입시켜서 통신비로 이윤을 남긴다. 예컨대 출고가 80만 원짜리 휴대전화를 제조사로부터 받아온 통신사는 대리점에 휴대전화를 공급하며 보조금을 얹어준다. ‘제 가격으로 팔면 가입자 유치가 어려우니 보조금을 활용해 휴대전화 가격을 깎아주라’는 게 보조금의 목적이다.

 

대리점 역시 산하 판매점에 휴대전화를 공급하며 추가 보조금을 얹어준다. 제조사, 통신사, 대리점을 거치면서 쌓인 보조금이 60만 원이라고 가정하면 80만 원짜리 휴대전화를 20만 원에 팔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2년 가입약정을 조건으로 추가 할인해 주면 ‘공짜폰’ 판매까지 가능해진다.


보조금의 원천은 고객이 내는 통신요금이다. 통신사와 대리점, 판매점은 고객의 요금 중 일부를 5년 동안 나눠 갖는다. 고객으로부터 통신요금을 많이 받을수록 보조금으로 돌릴 수 있는 금액이 늘어나는 셈이다. 경기지역의 한 휴대전화 판매점주는 “통신사는 보조금 액수와 수수료 차감을 무기로 판매망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며 “물량 할당 역시 잘 팔리는 지역에 통신사와 대리점이 일방적으로 할당하는 구조라서 판매점은 통신사와 대리점의 정책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통신사는 대리점과 계약하며 보증보험을 맺는다. 예컨대 1억 원의 보증보험을 맺으면 100만 원짜리 휴대전화 100대를 한 달간 대리점에 여신 형태로 공급한다. 한 달 안에 100대를 모두 팔면 보증보험액은 그대로 두고 추가로 100대를 공급하고, 50대밖에 못 팔았다면 보증보험에서 5000만 원을 제하는 방식이다. 정산 기간은 통상 한 달로 알려졌다.

대리점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판매점과 계약을 한다. 통신사와 판매점이 직접 연결돼 있지 않지만 사실상 하나의 연결고리로 엮여 있는 셈이다. 서울 강남구의 한 휴대전화 판매점주는 “판매점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건 통신사나 대리점이 일방적으로 정하는 차감료 정책”이라고 설명했다.

본보가 입수한 국내의 한 통신사 차감정책에 따르면 신규 가입 후 30일 이내에 명의가 변경되거나 기기 변경으로 개통한 후 6개월 이내에 해지하면 보조금을 전액 환수한다는 내용 등의 차감정책이 존재했다. 최근 국내 유통업체의 갑을 논쟁이 오가며 차감정책이 전부 사라진 것으로 확인됐지만 한 판매점 종업원은 “이런 유통구조 때문에 판매점에서는 물불 안 가리고 보조금을 최대한 많이 풀어 고객을 끌어 모아야 남는 장사를 한다”며 “정부에서 보조금 규제를 한다고 해도 새로운 형태의 보조금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번호 이동, 신규 가입, 기기 변경 등 통신서비스 가입 유형이나 가입하는 요금제에 따라 보조금을 차별 지급하는 행위를 막을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할 방침이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최근 이동통신 가입비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고 요금제에 따라 휴대전화 보조금을 차등 지급하는 것을 막는 법 개정 추진 계획을 청와대에 보고했다. 홍진배 미래부 통신이용제도과장은 “보조금 차등 지급을 막아 불필요한 요금 지출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휴대전화를 자주 바꾸는 소비자에게 보조금이 집중되는 것을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보조금이 아닌 통신비 할인을 통해 소비자를 유인하는 구조로 바꾸겠다는 게 정부의 구상이다. 홍 과장은 “휴대전화 보조금 혜택을 받지 않는 이용자가 통신요금을 덜 내도록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 방침이 실효를 거두기 힘들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 통신사 관계자는 “정부가 통신사의 보조금과 제조사 장려금이 어떻게 집행되는지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조금 차등 지급을 금지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며 “정부가 규제하더라도 다른 방식으로 보조금이 지급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 끊이지 않는 보조금 악용 범죄

기형적인 유통구조로 보조금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구조를 악용한 범죄도 끊이지 않고 있다. 최모 씨(42) 이모 씨(32) 등 일당 5명은 휴대전화를 개통할 때마다 통신사에서 약정보조금 외에 판매장려금을 지급하는 구조를 악용해 휴대전화 보조금과 휴대전화를 빼돌렸다. 이들은 콜센터 사무실을 차려놓고 ‘소액 대출을 해준다’는 문자메시지를 뿌렸다. 광고를 보고 연락해 온 소액 대출 희망자에게는 “휴대전화를 개통하면 선불금 20만 원을 즉시 대출해주고, 3개월 후 저금리로 고액을 추가 대출해 주겠다”고 유혹했다.

휴대전화 가입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받은 최 씨는 휴대전화 개통책을 통해 통신사로부터 휴대전화와 대당 약 40만 원의 판매장려금을 챙겼다. 서류상 개통자에게 휴대전화를 건네지 않고 밀수출업자에게 대당 50만 원에 되팔았다. 이런 수법으로 최 씨 일당이 빼돌린 휴대전화 5200여 대에 판매장려금은 20억9400여만 원이나 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부장판사 이정석)는 최근 서류모집책 최 씨(구속 기소)에게는 징역 3년을, 휴대전화 개통책 이 씨에게는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강경석·조건희·서동일 기자 
2013-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