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최악의 이별이란?

해암도 2015. 4. 25. 06:47

[연애를 노래와 드라마로 배웠네]

겨우 이대로 끝날 거라면
정말 마지막이라면
지금 돌아가.
그때로. 서로 몰랐던 그때로
- 허각, Hello

문제의 포스트잇 남, 잭버거


21세기 도시 생활과 연애의 바이블 ‘섹스 앤 더 시티’ 시즌6에는 잭 버거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처음에는 제법 총기 있는 작가처럼 묘사되지만, 캐리와의 관계가 진행되면서 이 남자는 시리즈 사상 최악의 남자 캐릭터 중 하나로 전락한다. 그 이유는 캐리와의 이별 방법.

이 남자는 캐리와 결별 - 재결합을 거듭하다 어느날 큰 꽃다발을 안고 찾아와 달콤한 밤을 함께 보낸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캐리의 노트북에 포스트잇 한 장을 붙여 놓고 남자는 사라진다. 내용은 ‘I’m sorry, I can‘t (love you again 정도로 추정). Don’t hate me’. 쪽지를 본 캐리는 꽃다발을 내팽개치며 분노를 터뜨린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를 느낄 필요 없이, 이런 식의 이별은 모든 사람이 싫어한다. 2013년 한 결혼정보업체가 돌싱 남녀 8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왜 하필 돌싱 남녀들인지는 모르겠으나)한 결과에 따르면, ‘가장 싫은 이별 통보 방법’으로 남녀 모두 압도적 1위로 ‘갑자기 사라진 뒤 잠수타기’를 꼽았다. 그 뒤에는 순위 차이는 있었지만 ‘문자를 이용한 결별’, ‘친구를 통한 전달’ 등이 이어졌다. 이 ‘싫은 방법’의 공통점은 모두 상대방이 ‘마지막 만남’을 기피하고 달아났다는 데 있다. 물론 이 순위는 ‘내가 이별을 통보받는 방법’을 전제로 물어 본 것이다.

물론 ‘좋은 이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이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는다는 것을 덜 고통스러운 경험이 되게 할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그런 이별법은 없다.

‘잠수’가 최악의 이별 통보라는 사람들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매일같이 하루에도 열두번씩 전화와 문자, 톡을 주고 받던 사람이 어느날 연락이 끊긴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난 게 아닐까 걱정이 시작되고, 걱정이 분노로 바뀌면서 끝없는 자책이 밀려온다. 대체 왜? 내가 뭘 잘못했길래? 다른 사람이 생긴 건가? 나에게 내가 모르는 무슨 문제가? 이런 지옥 같은 경험을 하고 나면 잠수를 타 버린 그(혹은 그녀)에 대한 처절한 원망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게 된다.

오늘 정말 많은 가수가 등장합니다

길 건너 멀리 니가 보인다
지루했나봐 발끝만 바라보네
온 힘을 다해 나는 달려간다
이제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몰라
눈물이 흘러 아니 내 얼굴
가득히 흐르는 땀방울
- 성시경, 안녕 나의 사랑

그럼 이렇게 마지막 만남을 위해 성의껏 달려온, 그 사람의 목소리로 이별을 통보받으면 좀 나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직접 얼굴을 보고 저 질문들은 던진다고 해서 솔직한 답이 나올까? 천만의 말씀이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만남’을 통해 이별을 전달받은 때가 인생 최악의 경험이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이별을 말하던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며 살의에 가까운 분노를 느꼈다. 당신도 나를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한 건 아니잖아. 우리는 더 잘 맞는 상대가 있을 거야. 절대 그렇지 않다고 쥐어짜듯 외쳤지만 옅은 미소와 함께 돌아온 답은 차라리 무서웠다. 당신은 당신을 잘 몰라. 그리고 난 좋은 추억으로 당신을 남기고 싶어. 저런 말들을 듣느니 차라리 그녀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상대가 잠수를 타든, 만나서 통보를 하든, 편지를 쓰든 바로 전날까지 간을 빼 줄 것처럼 잘 해주다가 갑자기 이별을 선언하는 경우는 없다. 있다면 그 상대가 당신과 헤어져 준 것을 고마워해야 한다. 그건 진짜 사이코패스나 하는 짓이니까. 절대 다수는 헤어지기 전에 충분히 이별을 예감할 수 있는 징후를 남긴다. 그 징후를 애써 부정하는 마음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예감할 수 있는 이별은, 깔끔하게 정리하기만 한다면 최악의 이별은 아니다. 오히려 헤어지고 싶은 상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는 마지막 만남의 자리가 아니라, 이별을 충분히 예감할 수 있도록 서서히 마음이 식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도 나와, 너의 뒤에서~

언제나 힘들어 하던 너를 바라보면서
이미 이별을 예감 할 수가 있었어 워~
너에겐 너무 모자란 나란걸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떠나는 널 나는 잡을수 없는 거야
- 박진영, 너의 뒤에서

내 생각에 진정한 최악의 이별은 ‘여지를 남기는 이별’이다. ‘이 고비만 넘기면’, ‘나의 문제를 내가 극복할 수 있다면’, ‘현실이 좀 나에게 관대해 질 때’, ‘힘든 시간이 지나가면’ 나는 너에게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하는 이별이야말로 가장 나쁜 이별이다. 이별을 선언하는 사람이 조금 마음이 편해지려고 하는 이런 말들이, 당하는 사람에게는 티끝같지만 희망의 말로 들리기 때문에, 괴로움은 더 길어진다. 결심을 했다면 단칼에 잘라야 한다. 냉정하게. 조금이라도 좋은 사람으로 보이려는 사심을 버리고.

부끄러운 눈물 흘러
어서 빨리 떠나가
초라한 날 보기전에
냉정한 척 해 준 니 고마운 마음 나 충분히 알아
어서 가..
마지막 돌아서는 떨리는 너의 어깨
안스러워 볼 수 없어
많이 힘들었겠지
니 어른스러운 결정 말없이 따를게....
- 토이, 거짓말 같은 시간

저도 한 곡 부릅니다 세월이 가면~
사실 살다 보면 어떤 이별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버림을 받은 쓰라림도, 버리고 달아나야 했던 괴로움도 그리 오래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최악의 상황에서 이별한 옛 연인들도 10년, 20년만에 만나면 반가워하는 경우를 참 많이 봤다.

결국 중요한 건 사랑했던 추억이지, 사랑을 끝내는 방법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긴 시간이 지나면, 그런 아픔조차도 그리워 질 때가 있다.

그래서 ‘세월이 가면’이란 두 곡의 노래는 오래도록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 최호섭, 세월이 가면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에 호숫가 가을에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희, 세월이 가면




이별방식이 진짜 문제였을까



잭샌드위치 기자 nogoodbye@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15.0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