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현지시각) 세계 최대 전자제품 박람회인 CES(Consumer Electronics Show)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
코스모폴리탄호텔.
메르세데스 벤츠 전시장 무대 오른쪽에서 은색 자동차 한 대가 등장했다. '가르릉' 엔진 소리를 내며 자동차가 무대
중앙의 디터 제체 벤츠 회장 옆에 멈추고, 푸른 스포트라이트가 내리비쳤다. 순간 무대 아래 있던 3000명의 관람객이 동시에 "아" 하는 탄성을
터트렸다. 차 안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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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코스모폴리탄호텔에서 열린 CES 기조연설에서 디터 제체 메르세데스 벤츠 회장이 무인 자동차 ‘F015 럭셔리인모션’을 소개하고 있다. / 벤츠코리아 제공
제체 회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무선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당신은 벤츠의 미래 무인(無人) 콘셉트카 'F015 럭셔리인모션(Luxury
in Motion)'을 보고 있습니다." 이어 "놀라운 혁신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차 안을 보시죠"라고 하자 천천히 앞문이 열리고 운전석이
뒤쪽으로 180도 회전했다. 운전자가 핸들을 잡지 않고 뒤로 돌아 책을 보거나, 뒷좌석의 승객과 대화를 나눠도 된다는 것이다. 제체 회장은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사치품은 개인의 공간과 시간"이라며 "자동차는 단순한 운행 수단을 넘어 궁극적으로 움직이는 생활공간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난 6일부터 9일까지 열린 CES의 주인공은 가전제품이 아니라 자동차였다. 적어도 세계 언론의 관심만 놓고 보면 그랬다.
글로벌 자동차 업체들이 차세대 자동차 기술을 선보이는 각축장이었다.
왜 자동차 회사들이 가전 전시회에 나타났을까? 자동차가 종합
전자기기처럼 돼가기 때문이다. 정보통신기술(ICT)이 기계 기술을 밀어내고 자동차의 핵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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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유로워진 손 - 아우디의 무인차 ‘잭’이 운전자의 핸들 조작 없이 도로를 주행하고 있다. / 아우디 제공
①"무인차 시대 5년 안에 열린다"
아우디는 무인차로 고속도로 주행까지 시연했다.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를 출발해
이틀간 900㎞를 평균 시속 112㎞로 무인 주행해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했다.
'잭(Jack)'이란 명칭이 붙은 이 차는 길이 막히면
스스로 속도를 줄이고, 저속 차량이 앞에 나타나면 안전하게 추월해 나갔다. 운전석에는 미국 IT 전문 매체 기자 5명이 번갈아 타서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잭의 무인 주행 과정을 기록했다. 그중 한 기자는 이렇게 썼다. "옆 차량 뒷좌석에 앉아있던 소녀와 눈이 마주쳐 두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그러자 소녀는 큰 사고라도 날 것처럼 놀라며 방방 뛰었다. 아마 내가 미친 줄 알았을 거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포드의 마크 필즈 최고경영자(CEO)는 "운전대와 브레이크 페달이 필요 없는 무인 자동차가 5년 안에 도로에 등장한다"고
했다.
물론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아우디의 잭은 교통이 혼잡한 라스베이거스 시내에 진입하면서 안전을 이유로 무인 주행을
해제했다. 도로 위에 차와 행인이 너무 많아 센서가 대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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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능 더한 운영체제 - 현대차 전시관에 설치된 자동차 운영체제(OS) 시연 시스템. / 현대자동차 제공
②시동 걸린 자동차 운영체제(OS) 경쟁
폴크스바겐 전시관에서는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한 장면과 같은
시연이 펼쳐졌다. 시연자는 차의 내비게이션을 손가락으로 누르지 않고 손짓으로만 조작했다. 책을 넘기듯 손을 좌우로 흔들어 화면 전환을 하고,
손가락을 몇 개 펼치느냐에 따라 앱을 켜거나 끌 수 있었다. 대시보드에 내장된 카메라와 적외선 센서로 동작을 인식한다.
현대차는
CES에서 자동차 내비게이션 3대를 차 밖에 떼어 놓고 따로 전시했다. 어른 손바닥 만한 크기의 화면에 대고 "MGM 그랜드 호텔로 가줘"라고
말했다. 그러자 5초 뒤 화면에 지도가 작동되면서 길을 알렸다.
이 시스템은 구글의 자동차용 운영체제(OS)인 '안드로이드 오토'나
애플의 '카플레이'를 내장한다. 스마트폰 환경을 차로 옮긴 것이기 때문에 모바일 OS 양대 축인 구글과 애플이 관련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기존 내비게이션은 공장에서 처음 설치된 기능만 수행할 수 있으나, OS가 내장된 내비게이션은 음성통화, 정보검색, 자동주차
등 새로운 기능들이 인터넷을 통해 자동 설치·업그레이드된다. 휴대전화로 치면 내비게이션은 '피처폰', OS는 '스마트폰'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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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웨어러블기기 접목 - BMW는 삼성전자의 ‘기어S’로 작동되는 무인 주차 기술을 선보였다. / BMW 제공
③자동차도 웨어러블… 시계로 차 부르고 주차
1980년대 미국에서 방영된 인기 드라마 '전격Z작전'의 주인공은
손목시계에 대고 "키트, 도와줘"를 외친다. 그러면 인공지능 자동차인 '키트'가 어디선가 나타나 주인공을 구해낸다. 이번 CES에서는 '키트'에
근접한 기술들이 대거 등장했다.
삼성전자 전시관에선 삼성전자의 웨어러블 기기 '기어S'를 이용해 BMW i3를 무인주차하는 시연이
열렸다. 시연자가 손목에 찬 '기어S'에 대고 "주차해 줘"라고 지시하자, 옆에 주차돼 있던 i3가 자동으로 시동이 걸렸다. 운전자가 없는
상태에서 차의 핸들이 좌우로 회전하면서 주차 각을 맞췄고, 이어 약 3m를 후진한 차는 폭 1.8m 정도의 가설 주차장에 쏙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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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장·사고 예측 - 볼보는 도로 상황을 분석해 운전자에게 사전 경고하는 충돌방지시스템(ACS)을 선보였다. / 한동희 기자
④新 사고 예측 시스템 등장
자전거가 우회전하자 마주 오던 차의 속도가 저절로 줄어든다. 동시에 자전거 운전자의
헬멧에서는 경고등이 켜지고, 자동차 운전자는 사고 위험 경보를 내비게이션에서 나오는 육성을 통해 안내받는다. 볼보의 충돌 방지
시스템(ACS)이다. 특수 제작한 자전거 헬멧에 신호 발송 장치를 달았고, 여기서 나오는 신호를 분석해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통해 운전자에게 경고
신호를 보낸다.
GM은 자동차의 어느 부분이 고장 날지 미리 예측해 주는 '드라이버 어슈런스(driver assu
rance)'시스템을 공개했다. 엔진, 배터리, 연료 펌프에 달린 센서들이 정보를 수집해 GM이 운영하는 클라우드로 전송하면, 데이터 분석을
통해 운전자에게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로 고장 발생 가능성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