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교만한 A 에게 하버드 문은 열리지 않는다

해암도 2014. 8. 7. 06:40

[꿈꾸는 목요일] 요즘 대학·기업이 뽑는 인재는

“지식이 없는 선함은 약하고 선하지 않은 지식은 위험하다.”

 졸업생의 30%가 아이비리그(Ivy League·미국 동부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미국 최고 명문 고교인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의 교훈(校訓)이다. 이 학교는 부시 대통령 부자를 배출한 자매교 필립스 앤도버와 함께 ‘고교 하버드’로 불린다. 이 학교 졸업생인 마크 저커버그가 회사를 창업하며 학교 출석부의 이름을 따 ‘페이스북’을 개발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 교훈은 1781년 존 필립스 박사가 건학 이념으로 삼은 이래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교장은 매년 초 전체 학생을 모아놓고 설립자의 교육철학을 주제로 인성(人性)의 중요성을 강의한다. 학교 곳곳엔 ‘자신만을 위하지 않는’이란 뜻의 라틴어인 ‘Non Sibi’라는 단어가 쓰여 있다. 교사들은 “항상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이타적 인재가 되라”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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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엑시터에선 수업과 학교생활의 밑바탕에 인성교육이 깔려 있다. 교실마다 ‘하크니스’라 불리는 원형 테이블이 있는데 여기서 교사 1명과 학생 12명이 둘러앉아 수업한다. 학생들은 일방적 강의를 듣는 게 아니라 팀별 과제 발표와 토론을 통해 스스로 학습한다. 공부는 ‘남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나누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업에선 협력이 제일 중시된다.

 이 학교 입학사정관을 지낸 최유진 노스파크대 교수는 “엑시터는 단순히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타인을 배려하고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인재를 키운다”고 강조했다. 그는 “교류·협력·존중을 통해 함께 공부하는 과정에서 성실성·책임감·배려심 같은 인성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다”고 설명했다. 학생평가 때도 시험점수만이 아니라 토론 준비와 태도,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 미국의 다른 명문고와 마찬가지로 스포츠·예술 등 다양한 체험 활동으로 리더십을 기른다. 이 학교엔 스포츠클럽만 20개가 넘고 신문사·봉사단체 등 동아리도 70여 개나 된다.

 인성을 중시하는 교육철학은 아이비리그와 같은 명문대에도 그대로 연결된다. 하버드 학생들의 주 출입구 중 하나인 덱스터 게이트엔 앞뒤로 두 개의 문구가 쓰여 있다. 들어올 때는 ‘enter to grow in wisdom’, 나갈 때는 ‘depart to serve better thy country and thy kind’다. ‘대학에 와서는 지혜를 배우고, 졸업한 뒤엔 더 나은 세상과 인류를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다. 실제 입시에서도 하버드는 실력이 아니라 인성이 좋은 인재를 선호한다. 조우석 전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입학사정위원은 “SAT(미국 대학입학자격시험) 만점을 받고도 떨어지는 학생들이 많다”며 “하버드는 실력이 조금 못해도 인성과 리더십이 뛰어난 ‘인성 엘리트’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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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제로 조 전 위원이 입학사정위원으로 활동했던 2009년에 홍콩대를 졸업한 수재 A씨는 스펙이 뛰어났지만 면접에서 탈락했다. 성적과 스펙 모두 뛰어나 무난한 합격이 예상됐지만 면접관으로부터 ‘교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떨어졌다. 반면 평범한 네팔 출신의 B씨는 A씨에 비해 학업능력은 부족했지만 사람 됨됨이를 인정받아 높은 점수로 합격했다. 조 전 위원은 “환경이 열악한 네팔의 청소년들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이타적인 철학을 지닌 것이 합격에 큰 영향을 줬다”며 “공부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인성 좋은 학생은 드물어 인성이 진짜 실력”이라고 설명했다.

 하버드대·MIT에서 입학사정관을 지낸 앤절라 엄 보스턴 아카데믹 컨설팅그룹 대표는 “고교 수석 졸업생의 상당수가 하버드에 떨어진다”며 “공부와 스펙을 뛰어넘는 열정·헌신·리더십 등 인성 덕목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하버드에 진학하기 위해선 학업 성적보다 자원봉사와 동아리 활동 등 지원자들의 평소 성품이 드러나는 학생부 기록이 중요하다. 교사 추천서와 면접 등에 큰 비중을 두는 것도 같은 이유다. 보여주기 위한 스펙만 쌓고 단순히 입시 공부만 잘하는 학생인지, 아니면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리더십 등 인성을 길러온 학생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다.

 최근엔 기업도 스펙보다 인성을 중시하는 추세다. 삼성전자는 신입사원 채용 시 필기시험인 SSAT(삼성직무적성검사) 이후 직무역량면접과 인성면접으로 나눠 최종 평가한다. 김종헌 인사담당 상무는 “박사급이 아닌 이상 전문성을 많이 따지지는 않는다”며 “회사 생활 태도, 남들과 협력하는 자세, 배우려는 의지 등 사람 됨됨이가 가장 중요한 능력”이라고 말했다. 3명의 임원이 한 명의 구직자를 놓고 30~40분 동안 심층면접을 하는데 자기소개서를 바탕으로 인생관·철학이 드러나도록 구체적인 경험을 얘기하도록 한다. 예를 들어 동아리 회장을 했다면 동아리에서 뭘 배웠는지, 회장으로서 실패한 경험은 무엇이고 이유는 뭔지, 조직원과 마찰이 생겼을 때 어떻게 극복했는지 등을 자세히 물어본다. 김 상무는 “인성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며 “깊게 면접을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온전한 성품이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인성을 중시하는 풍토는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지난 4월 한국고용정보원이 500개 기업에 채용할 때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설문조사 했더니 93.6%(복수응답)가 인성이라도 답했다. 인성에 이어 직무역량(80.4%)과 전공 자격증(52.6%)이 뒤를 이었다. 흔히 학생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외국어 점수(7%)와 어학연수 경험(2.2%), 공모전 입상(1%) 등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지난달 1일 정부가 기업가에게 주는 최고 상훈인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한 박기석 시공테크 회장은 “30년간 기업을 운영하며 느낀 것은 인성 바른 사람이 일도 잘한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세상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높은 성과는 남과 협력하고 시너지를 낼 때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윤석만 기자   [중앙일보] 입력 2014.08.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