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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인 한옥 건축가 신영훈 선생의 제안으로 1991년 첫 삽을 뜬 이후, 꼬박 5년 만에 완성한 건물입니다. 『삼국유사』에 ‘탑들이 기러기 행렬 같다(塔塔雁行)’는 시 구절이 나오지요. 아름다운 다층탑이 그림처럼 그려지잖아요. 이 건물을 지을 때, 우리들은 백제에서 불려와 신라 경주에 황룡사 탑을 세운 걸출한 건축가 아비지를 꿈꾸며 설렜습니다. 그런데 막상 재현하려니까 막막했어요. 황룡사 탑은 고려 때 이미 불타 없어져버렸고, 전승된 기술도 없는 데다 아이디어조차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1300년전 황룡사 양식 이은 진천 보탑사
문화재 보수기술자이자 고건축 전문가인 김영일(『한옥, 사람이 살고 세월이 머무르는 곳』 저자) 씨는 이곳 공사를 총괄한 총감독이다. 전통장인들의 용어로는 행수(行首)가 된다.
“한국은 석탑, 중국은 전탑, 일본은 목탑이 많지요. 두루 답사하고 다니다가 남원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에 새겨진 비파 연주하는 장면과 경주 남산 탑골 암각화에서 결정적인 힌트를 얻었습니다. 탑의 난간에 사람이 올라갈 수 있게 할 방도가 바위그림에 담겨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천년이 가도 끄떡없도록 혼을 불어넣어 이 특수한 한옥을 지었어요. 나중에 후손들이 보고, ‘서기 1996년에 우리 선조가 저런 목탑도 만들었구나’하고 알아만 준다면 더없는 보람입니다.”
김영일 씨는 탑에 얽힌 일화와 요소요소에 담긴 건축적 의미들을 소개했다. 높이 108척(32.7m) 규모의 웅장한 3층 목탑은 그야말로 스토리 뱅크였다. 계단에서부터 피뢰침이 꽂힌 꼭대기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와 건축기법이 서려 있었다.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엔 망울진 연꽃을, 내려가는 계단엔 활짝 핀 연꽃을 조각해놓는 식이다.
가람을 둘러싼 산 자체가 연꽃 모양이고 그 터 중심에 앉힌 목탑은 꽃술이었다. 배 형국으로 치면 돛대가 된다. 자연과의 절묘한 조화다.
“부속 건물의 배치는 물론 지붕의 모양이나 재료도 다채롭네요. 한 건물에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 함께 있기도 하고 4각, 7각, 8각, 9각, 원형까지 다양할뿐더러 기와집, 너와집, 귀틀집까지 있군요. 지형과도 잘 어울리고 건물들끼리도 조화롭습니다. 건축을 공부하는 이들이 병산서원만 갈 게 아니라 이곳도 꼭 와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구가도시건축 조정구 대표는 현대건축을 전공하고 한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그 경계를 허문 건축가 1세대다. 그가 설계한 경주 한옥호텔 라궁, 서울 글마루한옥어린이도서관, 진관사 템플스테이 역사관, 대구 임재양 외과 등은 도시한옥의 새 길을 열었다.
“과찬입니다. 탑을 먼저 세우고 나서 바람 길을 따라 부속건물들을 배치했지요. 공을 하고 어느 이른 봄날 아침, 보탑사에 갔어요. 높은 지붕 위에 쌓였던 눈이 가속도가 붙어 떨어져 내려서 사람 다치게 생겼지 뭡니까. 아차, 큰 실수를 했구나. 바람과 비와 햇빛을 충분히 고려하여 남남동향으로 앉혔던 것인데 북쪽지붕에 쌓이는 눈을 계산하지 못했던 것이죠. 죽고 싶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아비지가 황룡사 탑을 바람 골에 지은 까닭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눈이 쌓이지 않게끔 일부러 겨울바람이 부는 지형을 택했던 겁니다. 고민하다가 서북쪽 산의 잘록한 허리에서 겨울바람이 불어온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풍수용어로 요풍(凹風)이라는 거죠. 부속건물들을 세우기 전이라 바람개비 형태로 배치했습니다. 그 지붕을 타고 오는 바람을 이용해 탑 지붕의 눈을 날렸어요. 천만다행이죠.”
자연과의 절묘한 조화다. 한옥의 처마는 바람과 햇살의 과학을 담고 있다. 건강에도 좋다. 하지만 지금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한옥은 한번쯤 꾸어보는 꿈으로 그친다. 아산정책연구원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한옥 선호도가 높아진 것으로 나왔다. 살고 싶은 집이 아파트냐, 한옥이냐에 똑같이 48%의 선호도를 보였다. 한옥에 살고 싶은 이유로 45.8%가 ‘친환경적이어서’라고 답했고,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로는 54.6%가 ‘생활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서’라고 답했다. 두 요소의 결합, 곧 생활 인프라를 잘 갖춰놓으면 친환경적인 한옥에서 살고 싶어 한다는 결론을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나온 게 한옥 아파트다. 아파트라는 기존의 주거 공간에 목재나 황토, 한지 등 자연 마감재로 한옥식 인테리어를 한다. 유행성 독감에 잘 안 걸리고 머리도 맑아지더라는 것이다. 아파트의 거실 중심 방 배치가 마당 중심의 한옥에서 변형된 형태라는 견해도 많다. 그런 아파트에 한옥식 인테리어를 곁들였으니 한옥 아파트라는 주장이다. 쉽게 동조할 수 없더라도 독특한 한국식 주거문화임에는 틀림없다.
전통·현대 융합한 일본 사례 참고해야
한옥 상편(제382호)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전통한옥이나 개량한옥의 개·보수, 복원만으론 한옥시장 활성화가 어려운 상황이다. “의미는 차이에서 발생하죠. 양옥이 등장하면서 한옥이라는 용어가 생겨난 겁니다. 저는 한옥전문가도 아니고 그저 지금 우리에게 어울리는 집을 추구할 뿐입니다. 마당과 처마만 있으면 한옥이라고 봅니다. 굳이 기와지붕이 아니고 슬라브주택이라도 상관없지요. 정부가 만든 한옥의 기준이나 그에 따른 한옥마을 조성책과 지원책은 오히려 한옥의 자생력을 떨어뜨릴 여지가 많습니다. 한옥 공사비가 비싸다며 비용 절감에만 치중하는데 그러다간 시대와 걸맞지 않는 어색한 한옥만 남게 돼요. 우리가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집, 한옥은 문화적 총체입니다. 문화융성의 기회로 볼 필요가 있어요. 해외의 한국공관부터 멋진 한옥으로 짓고 국내에서는 산후조리원, 어린이집, 경로당을 한옥으로 짓는 데 과감하게 지원하는 겁니다. 연구개발도 태양열과 한옥, 지열과 한옥 같은 걸 해야죠. 창의적인 건물이 많이 들어서면 삶의 질도 더욱 나아질겁니다.”
조정구 대표는 일본의 화풍(和風) 건축시대 100년을 예로 들었다. 건축계에도 전통과 현대를 융합시키는 세대와 역사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차차 경계가 사라져버린다. 건축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상(Pritzker Prize) 수상자 세지마 카즈요, 이토 토요 같은 건축가가 일본에서 거듭 나오는 바탕이다. 조 대표가 존경한다는 스리랑카의 국보급 건축가 제프리 바와 역시 같은 유형의 인물이다.
“2~4층짜리 살림집을 한옥으로 지어달라는 건축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경험이 축적된 원로 장인들과 함께 500년 세월을 이고 가는 문화재 같은 집을 짓고 싶소. 자꾸 한옥이 비싸다며 반값 한옥 얘기가 나오는데 평당 건축비만 놓고 봐서 그래요. 한번 지으면 50년 가는 아파트와 500년 가는 한옥, 어느 게 더 비싸요. 콘크리트집이 훨씬 더 비싼 거요. 게다가 한옥은 처마 안 공간을 활용할 수가 있어서 건평도 50%가 더 나오는 겁니다.”
김영일 행수의 우렁찬 목소리다.
한옥은 현재 원형과 변형 사이에서 주춤거리고 있다. 건강하고 행복한 자연친화적 삶의 출발은 사람이 사는 집에서부터다. 한옥 아파트는 물론 신한옥 교회, 신한옥 학교, 신한옥 병원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짐짓한 ‘소화 기간’을 가질 때다. 성급한 비판보다 실패를 보완해가며 경험을 축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빨리빨리’를 ‘은근과 끈기’를 가지고 줄기차게 해온 한국인은 이제 어떤 집에서 어떤 삶을 살까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김영일 고건축 전문가가 한옥 애호가에게 주는 Tip
▶주춧돌과 닿는 기둥 아래쪽에 굽을 파고 그 안에 숯과 소금을 넣어두면 흰개미 같은 벌레 예방. 마루 밑에는 소금항아리를 묻어 벌레를 막아라.
▶기둥과 거기에 붙여 세우는 벽선(각목)에 홈을 두 개 파느냐, 하나 파느냐, 안파고 바로 붙이냐에 따라 단가와 내구성이 크게 달라진다.
▶지붕의 합각머리 삼각형 벽에 가문을 상징하는 장식을 넣어 기념하라.
▶바람과 숲, 담장을 이용해 습기의 침입을 다스려야 집이 오래간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4.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