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제빵기 '도우컨' 디지털 국산화 김대인]

해암도 2014. 6. 7. 07:17

기술과 경험까지 넘겨줘야 '진짜 장인' 아닌가

10대부터 익힌 냉동·전기기술 활용, 360도에서 스팀 쏘는 오븐도 불티
찔끔 배우고 떠나는 청년들 안타까워 작년 40억 들여 무료 실습학원 개설
"실력으로 인정받는 기술인 키울 것"

버스를 타면 승객들은 슬금슬금 그를 피했다. 눈은 충혈돼 있고, 팔뚝은 싸움꾼처럼 굵고, 손은 철판에 긁힌 상처로 우툴두툴하니 겁날 만도 했다.

그는 공장에서 인생을 배웠다. 1969년 서울 경일중을 자퇴하고 들어간 데가 산업용 냉동고 공장이었다. 낮엔 톱으로 쇠를 자르고, 밤엔 직원들 작업복을 빨았다. 선배들은 '엄마 젖이나 더 먹고 오라'고 놀렸다. 종일 용접한 날이면 눈이 모래를 들이부은 것처럼 아파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럴수록 이를 악물었다. 일이 끝나면 선배들은 술 마시고 신세 한탄을 했다. 그는 혼자 앉아 냉동공학·전기 분야 책을 읽었다. 인천항·부산항을 뛰어다니며 수입 고철도 뒤졌다. 폐고철을 닦고 기름 쳐서 새 부품으로 만들면 최고 기술자로 대우받았다. 구로공단 월급이 3만원일 때 그는 6만원 받았다. 사장이 시키는 일은 뭐든 해내는 소년공이었다. 김대인(59) 대흥소프트밀 대표의 10대 시절이다.


	얼굴과 머리 전체가 땀으로 젖은 김대인 대흥소프트밀 대표가 도우컨 냉각장치에 들어가는 압축 유니트를 용접하고 있다. 하얗게 타오르는 이 불꽃이 가족과 직원들을 먹여 살리고 자신의 삶도 불태웠다.
얼굴과 머리 전체가 땀으로 젖은 김대인 대흥소프트밀 대표가 도우컨 냉각장치에 들어가는 압축 유니트를 용접하고 있다. 하얗게 타오르는 이 불꽃이 가족과 직원들을 먹여 살리고 자신의 삶도 불태웠다. /성형주 기자
김 대표는 빵 반죽 자동 숙성 기계인 '도우컨디셔너(Dough-Conditioner·이하 도우컨)'를 국내 최초로 디지털화해 생산했다. 베이커리 뚜레쥬르의 1호점부터 시작해 전국 1400개 매장에 납품했다. 동네 빵집까지 더하면 3000곳이 넘는다. 정부가 선정한 '기능한국인'(2010년)이자 공조냉동기계 분야 '대한민국 명장'(2011년)이다. 제과제빵 기계 특허만 8개 갖고 있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사무소에서 동쪽으로 6㎞ 가면 무갑산 아래 3000평(9920㎡) 대지에 건평 180평(595㎡)짜리 작업장 5채가 있다. 그가 빵 만드는 데 필요한 갖가지 기계를 생산하는 공장이다. 그는 공장 옥상에 올라 "풍광이 그림 같지 않으냐"고 자랑했다.

도우컨과의 인연은 2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24세이던 그는 10년 만에 냉동설비 공장을 나와 정육점용 대형 냉장고 제조와 에어컨 수리 사업에 도전했다. 피 같은 자본금만 날렸다. 술 먹고 동네 아이들과 싸우는 불량배가 됐다가 오토바이 폭주족이 돼 떠돌았다. 그러다가 1989년 1000만원으로 청계천 골목에서 냉각 장치를 유지·보수하는 용역 사업을 시작했다. 그때 수리하려고 찾아간 한 제과점에서 고장 난 도우컨을 처음 봤다.

도우컨의 원리는 이랬다. 모양을 잡은 생지(밀가루 반죽)를 기계에 넣으면 영하 10도 이하 상태로 보관되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냉동에서 냉장으로 바뀌면서 생지가 천천히 녹더니 섭씨 40도에서 서서히 발효됐다. 냉동·해동·저온발효·고온발효가 자동으로 이뤄지는 게 재미있었다. 반죽을 만들어놨다가 원하는 시각을 정해 굽기만 하면 되므로 인력 2명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

외제 일색이던 도우컨을 국산화하기로 했다. 기계 옆에 스티로폼 깔고 새우잠 자며 그간 체득한 냉동·전기·알곤용접 기술을 쏟아부었다. 본체는 우레탄 패널을 쓰고, 운전 패널은 마이크로프로세서 기능을 탑재한 인쇄회로기판을 사용했다. 최초 시도였다.

1994년 디지털 방식으로 작동하는 도우컨을 개발했다. 기계를 안고 꺼이꺼이 울었다. 한층 성능이 좋아진 컨벡션오븐도 개발했다. 기존 오븐은 열풍을 한곳에서 쏘기 때문에 빵 색깔이 고르지 않았다. 그가 만든 오븐은 섭씨 250도의 미세한 스팀 입자를 전(全) 방향에서 뿜는다. 물기가 재료 깊이 스며들어 지방과 염분을 내보내기 때문에 바삭한 빵을 만들 수 있다. 빵 굽는 레시피도 30가지 이상 입력했다. 수입산은 1000만원이 넘는데 그는 700만원에 팔았다. 매출이 점점 늘었다. 직원 52명에 연매출 100억원을 달성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다. 사람을 뽑아 기술을 가르쳐도 쓸 만하면 다른 공장, 다른 회사로 가 버렸다. 중소기업의 한계였다. "그렇다고 떠나간 친구들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에요. 기술을 완전히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이거 찔끔, 저거 찔끔 하니까 이직률만 높아요. 저는 처음 들어간 공장에서 10년을 버틴 덕에 숙련공이 될 수 있었어요. 젊은이들에게 이 점을 알려줘야겠구나 다짐했어요."

지난해 11월 공장 부지 한쪽에 실습 장비를 갖춘 아카데미를 만들었다. 청년 15명을 채용해 2년간 일 시키고(연봉 1800만원), 먹이고 재우고(전원 기숙사), 기술(제빵기계 설계·용접·조립)을 가르친다. 정부가 산업 현장에서 월급 받으며 교육도 받을 수 있도록 도입한 '일·학습병행제'에 동참한 것이다. 공장 증설하고 기숙사·구내식당 짓고 교육 장비들 사는 데 들인 돈이 40억원이다. 회사 돈 18억원에 고용노동부 융자 22억원을 보탰다. "후배들을 위해 기술과 경험까지 넘겨줘야 진짜 '장인' 아니겠어요?"

그는 "나의 대화와 소통 대상은 기계"라고 했다. 지금도 공장에서 365일을 보낸다. "세계가 인정하는 제과제빵 기계의 공돌이가 되고 싶어요. 기술인 장학재단도 만들고요. 학력이 아니라 실력으로 인정받는 기술인을 키워 내보내면 괜찮게 산 것 아닐까요?"                        광주(경기)=김경은 기자 입력 : 2014.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