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별별다방 사연, 아버지의 황혼재혼으로 갈등하는 자녀들의 이야기에 수많은 댓글과 메일이 쏟아졌습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황혼의 로맨스를 적극 지지하며 자식들을 나무라는 분들도 많았고, 자식의 입장에서 실제사례를 들어가며 황혼재혼의 문제점을 지적해주신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혼인은 부자의 문제가 아니라 남과 여의 문제입니다.
재혼의 당사자인 여성들의 입장이 궁금해지던 차에, 마침 별별다방의 문을 두드려주신 초로의 여성 한 분이 계십니다.
아버지가 아직은 남자이기에 외롭듯이,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여자이기에 여자의 꿈을 갖고 계시군요.
그 꿈이 속된 현실 앞에서 서서히 시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닌지...... 홀로 되신 어머니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황혼의 로맨스...
여자로서의 자존심, 저 같은 사람에겐 사치인가요?
저는 올해 58세로, 11 년 전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 사는 여자입니다.
남매를 두었는데, 큰 딸은 시집을 갔고 아들 역시 곧 결혼할 예정입니다.
남편 생전에는 크게 어려움을 모르고 살다가, 그 양반이 갑작스럽게 쓰러지면서 사업이 잘못됐고, 또 투병하면서 더 힘들어졌습니다.
떠난 사람 애닯아 할 겨를도 없이 아이들 뒷바라지로 세월이 이만큼 흘렀네요.
아들녀석 신혼집 구하는데 얼마간 보태준 것으로 제가 할 일은 대충 다 끝내는 건가 싶으니,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허무한 생각도 드네요. 내 인생이 결국 이렇게 초라하게 마무리되는가 싶기도 하고, 다 떠나보낸 뒤 혼자 남은 삶은 지금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막막함도 있어요.
그래도 누추하나마 발 뻗고 누울 데는 있으니 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는 내 몸 부지런히 움직여 살아가자, 최대한 자식들한테 부담이 안 되는 어머니로 떠나는 게 내 마지막 숙제다 생각하며 살아갈 수밖에요.
현재 저는 어느 맞벌이 가정의 아이 둘을 봐주고 있습니다.
1시쯤 가서 집안 정리 하고 어린이집에서 막내를 데려오죠.
오후에 큰애 받아서 간식 먹이고 여기저기 학원 데려다주고, 저녁 식사에 숙제까지 시켜주고는 밤늦게 애들 부모 중 누구 하나 퇴근하면 저도 퇴근입니다.
저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그런지 일로 느껴지지 않고 할머니라 부르며 따르는 애들이 손자같이 귀엽습니다.
정해진 규칙도 없이 그저 내가 할 만한 일이면 다 해주며 진짜 할머니처럼 생활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런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었지만, 부끄럽다 비참하다는 생각은 안 합니다.
내 나이 여자가 할 수 있는 일 중에는 그나마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는 일이죠. 적성에도 맞고요.
그런데 지난 가을 어느 날, 애들 놀이터에 풀어놓고 벤취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낯익은 할아버님 한분이 곁에 와 말을 거시더군요. 가끔 엘리베이터나 놀이터에서 뵙던 분이라 저도 반가웠습니다. 평소 애들한테 장난도 잘 거시고 주머니에서 초콜렛 같은 것도 꺼내서 주시던 분입니다. 저한테도 애들 엄마냐 할머니냐고 농담을 하시기에 도둑이 제발 저린 기분으로 얼른 ‘봐주는 이모’라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날도 할아버지가 이런 저런 걸 물으시더군요.
어디 사느냐로 시작해서 애들은 몇이냐, 취직들은 했느냐, 친손주는 없느냐, 바깥 양반은 뭐하느냐....
처음엔 공손히 대답을 해드렸습니다. 그런데 얘기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마나님 돌아가신 뒤 이 아파트에서 혼자 오년 째 살고 계시다고 하시고 자식들 잘된 자랑을 좀 하시더군요.
의사 딸에, 대기업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아들이 있으시다고요.
그러고는 곧 본인 건강자랑, 재산 자랑으로 이어졌습니다.
여전히 골프를 치러 다니시는데 동년배들에 비해 체력이 월등하다는둥, 어디에 건물이 있고, 뭐가 있고.....
나 같은 사람 붙잡고 이 영감님이 왜 이러시나 하는데, 결국 본색을 드러내더군요. 무엇하나 아쉬울 것 없이 살지만 다만 한 가지, 죽게 외로우시답니다. 외로운 사람끼리 벗하면 안 되겠느냐고 하시더군요. 마음만 먹어주면 아쉬울 거 없이 해주겠다는 소리까지.......
너무 놀라고 어이없어서 단박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습니다.
애들 불러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죠. 생각할수록 불쾌했습니다.
일흔 서넛은 돼 보이는 분이시라 재작년에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생각나 말 한마디라도 잘 해드리려는 것이었는데, 이런 일 한다고 사람을 어떻게 보는 건가.......
연세보다도, 그 양반 태도가 불쾌했습니다. 대뜸 차나 한잔 하자고 하신다면 그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무슨 그런 거래를 하자는 것인지...... 저를 얕잡아 보지 않고서야.......
남부끄러워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친구들 모임에서 그 비슷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역시 혼자 사는 친구 하나가 기차타고 지방 내려가다가 옆자리 영감님한테 그런 비슷한 얘길 들었다는 겁니다.
대학교수로 은퇴했고 형편도 넉넉한데 짝이 없으시니 살 맛이 안 난다고요.
다들 기막혀 하면서도 깔깔대고 웃어대기에 저도 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 반응이 싹 달라지더군요. 그 친구 얘기는 웃으며 듣던 친구들이, 제 얘기에는 정색을 합니다.
다들 말이 없는 가운데 한 친구가 작심하고 시작을 하더군요.
그렇게 펄쩍 뛸 일만은 아니라나요? 인품은 어떤지, 얘기나 좀 해보지 그랬느냐는 겁니다. 그런 영감님이 자기 주위에 있었다면 진즉에 너하고 연결해주고 싶었을 거랍니다.
그 날 저는 더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혼자 사는 설움이 이런 건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진 거 없이 혼자 사는 여자의 설움이겠죠. 노후가 든든한 친구한테는 이런 일이 어이없는 횡액이지만 저 같이 가진 게 없는 과부에게는 더없는 기회라는 거잖아요.
저라고 왜 안 외롭겠어요. 벗이든 짝이든 저한테도 누군가가 간절히 필요합니다.
힘들고 외로울 때 차라도 한 잔 하며 얘기 나눌 수 있는 사람,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며 산행이라도 같이 할 수 있고, 젊은 애들 틈바구니에서 같이 영화라도 한편 볼 수 있는 짝이 있었으면 싶습니다. 재혼이요? 솔직히 말해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입니다. 늙어도 여자라 그런지, 상대가 능력이 있어서 저 하나 책임져 줄 수 있다면 재혼도 고려해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친구로만 지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나 세상 사람들은 제 생각을 답답해합니다. 남자는 그런 짝을 찾는 게 아니라네요. 남자 노인들이 바라는 짝은 한집에서 내 수발 다 들어주고 한 이불 덮고 사는 마누라라는 겁니다. 만나서 차 한잔 하는 친구를 찾는 게 아니래요. 그리고 남자를 보는 제 생각에 선후가 바뀌었답니다. 앞으로 살 날은 길고, 준비는 안돼 있으니, 능력 있는 재혼상대를 물색하랍니다. 사람 찾은 다음에 능력을 볼 것이 아니라 능력도 있고 인품도 좋은 영감님을 찾으라는 거지요. 그게 현실이랍니다. 이 나이까지 남자를 남자로 보고, 마음 통하는 남자를 찾는다면 그건 그러니까 ‘주책’이 되는 거냐고, 되묻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더 늙어서 자식한테 손벌려서는 안 되지 않느냐는 말에는 저도 할 말이 없더군요.
자식 얘기가 나오면 말문이 막힙니다. 자식들한테 제 존재가 어떻게 느껴질지....... 노후 준비도 안 돼 있고, 혼자 이러고 있는 엄마가 마음에 그늘을 지우기는 하겠지요. 내가 벌어 먹는다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 하니 그것도 장담은 못하는 노릇이고요. 각자 짝을 만나 애들 키우며 앞만 보고 뛰어야하는 우리 아이들, 엄마까지 책임질 형편들이 아닙니다. 엄마가 능력 있는 짝을 만나 걱정 없이 지내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존심이랍시고 붙들고 혼자 이러고 있는 제가 자식들에게는 오히려 부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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