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외국인 첫 가야금 이수자 된 '알래스카 조씨'

해암도 2025. 4. 8. 06:14

미국인 조슬린 클라크 배재대 교수

 
 
지난 3월 21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국내 최초로 외국인 가야금 이수자 된 조세린 클락 배재대 교수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처음 선정 소식을 듣고, 스스로도 믿기질 않았죠.”

 

전북무형유산 제40호 가야금 산조 이수자로 최근 선정된 미국인 조세린(본명 조슬린 클라크·55)씨는 곱게 쪽진 갈색 머리에 아름다운 자개 장식 비녀를 꽂은 머리가 무척 자연스러웠다. 그는 지난달 10일 국내 첫 외국인 ‘무형유산 이수자’로 선발됐다. 과거 판소리 분야에서 해외 거주 한국인이 이수자로 선정된 사례가 있지만, 실제 외국인이 선정된 사례는 처음이다. 전북도청 유산관리과는 “무형유산 이수자는 10년 이상 배운 한국인들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장기 체류가 어려운 해외 국적자들에겐 쉽지 않은 과정”이라고 했다.

 

현재 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동료 교수들과 등산 중 스승님(지성자 명인)에게 ‘됐다. 됐어!’라는 전화를 받았다”며 “산속에서 정말 뛸 듯한 기쁨을 만끽했다”고 했다. 국가유산청과 전국 각 지방자치단체가 각각 선발하는 ‘무형유산 이수자’는 국악계 명인과 무형유산이 되기 위한 초입길로 통한다. 전국 단위와 지자체로 인재 선별 과정이 이원화되어 실제 현장 실력자들을 세밀하게 발굴할 수 있다.

 

미국 워싱턴DC에서 태어났고, 알래스카에서 자란 그는 활동명 ‘조세린(조世麟)’도 직접 지었다. 특히 “조씨의 경우 임의로 새 조(鳥) 자 위에 북녘 북(北) 자를 붙인 ‘알래스카 조’를 창작해 쓰고 있다”면서 웃었다.

 

학창 시절 일본 음악을 접하면서 동양의 현악기에 홀렸다. 이미 고등학생 때 나고야, 도쿄 등을 오가며 일본의 현악기인 ‘고토’를 배웠다. 웨슬리언 대학에 진학 후 중국어와 서예에 빠졌고, 그 다음엔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예술대에서 칠현금과 쟁을 배웠다. 그는 “하필 천안문 사태가 터진 때라 외국인은 음악 대학교 안에 들어가는 자체가 힘들었고, 출입문도 따로 있었다. 정말 고생해서 배웠다”고 했다.

 

가야금은 돌고 돌아 가장 늦게 찾아온 인연이었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재즈를 배우러 온 거문고 연주자 김진희씨를 우연히 만나 가야금을 알게 된 것. 조씨는 “당시 한국은 예산 문제로 해외 국악 홍보를 전혀 못 할 때라 정보가 거의 없었고, 그래서 더욱 신기했다”고 했다. 이후 직접 국립국악원장에게 편지를 띄워 1992년 국립국악원 장학생으로 입학해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본래 1년만 체득하고 갈 요량이었는데, 서양은 물론 중국, 일본 악기와 미학적으로 완전 달라 쉽게 배울 수 없었어요. 결국 체류 기간이 길어졌죠.” 이때부터 조씨는 가타카나와 한자로 쓰던 ‘조세린’을 점차 한글로 쓰기 시작했고, 2005년 미국 하버드대 박사 과정을 밟을 땐 판소리 가사를 논문 주제로 삼을 만큼 우리 가야금에 푹 빠져들었다.

 
21일 서울 중구 조선일보미술관에서 국내 최초로 외국인 가야금 이수자 된 조세린 클락 배재대 교수./고운호 기자
 

조씨에게 가야금은 “만지는 만큼 사랑이 돌아오는 악기”다. 고토, 쟁과 비교했을 때 가장 큰 차이점은 “흥을 자아내는 장단과 그 속의 철학”이라고 했다. 고토와 쟁은 서양식 박자와 큰 이질감이 없이 2박, 4박의 정박으로 떨어지는 연주법이 많은 반면, 우리 가야금은 주로 3박 장단을 뼈대로 삼고 변주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조씨는 “고토와 쟁은 대부분 혼자 연주하지만, 우리 가야금은 반주자와 자주 합주하고, 춤에 잘 어우러진다. 특히 상황과 감정에 따라 연주가 달라진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했다.

 

조씨는 또 “국악과 가야금은 한국인이 가장 장단과 조를 잘 알 수 있는 소리인데, 점점 시도하는 이가 줄어 슬프다”고 했다. 그는 “국악을 시작할 때 자주 들은 꾸중은 ‘넌 한국인 피가 없어서 우리 소리를 잘 낼 수 없어’였다”면서, “그땐 속이 좀 상했지만, 33년간 직접 해보니 다 틀리는 말이 아니더라”고 했다. 조씨는 “그런데 최근 젊은 한국인들은 전통 소리를 듣지 않고, 귀가 점점 서양화되고 있다”며 “전통 소리는 한국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땅과도 같다. 그 뿌리가 안 깨지면 좋겠다. 한번 없어지면 끝까지 안 돌아온다”고 말했다.

 

조씨는 “이제야 본격적인 국악 길이 시작됐다는 신호탄 같다”면서 “그간 자격이 없단 생각에 미뤄온 공연 실황 녹음과 아직 서툰 가야금 병창 연마도 본격적으로 다시 도전해 볼 생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