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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피는 공짜 예약은 초고속 마감… '파크골프' 열풍

해암도 2025. 1. 26. 08:32

시니어 몰리는 파크골프의 세계

 

직장인 김동기(가명·45)씨는 최근 경남의 본가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농한기를 맞은 부모님이 각각 200만원 안팎의 ‘파크골프’채를 구입했기 때문. 드라이버부터 퍼터까지 12개를 사용하는 김씨의 골프 클럽 세트가 약 200만원이다. 반면 파크골프는 사과 크기의 헤드가 달린 채 하나, 테니스공만 한 공 하나로 전체 플레이가 가능하다. 고작 채 한 개 값이 일반 골프 클럽 세트에 육박하는 것. 20만~30만원대 저렴한 채부터 금(金) 한 돈이 들어갔다는 500만원짜리도 있다고 한다. 김씨는 “샤프트(골프채의 기둥 부분)의 탄성이나 헤드의 각도 등 기술력이랄 게 보이지 않는 파크골프채 하나가 기백만 원이라니 놀랐다”면서도 “별다른 여가 활동이 없는 부모님이 즐거워하시고 운동도 되니까 그것으로 만족했다”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중1 이호연군은 매달 20일을 기다린다. 할아버지가 주는 ‘공돈’ 1만원을 벌 수 있는 날이기 때문. 매달 20일에 다음 달 안양천 파크골프장의 예약이 오픈된다. 거의 30초 만에 한 달치 예약이 마감된다. 독수리 타법 속도로는 도저히 불가능. 할아버지는 몇 달 전부터 건당 1만원에 ‘손자 알바’를 동원해 예약을 따내고 있다.

지난 23일 서울 양평동 영등포파크골프장에서 동호회원들이 파크골프를 즐기고 있다. 전국적으로 파크골프가 폭증하는 가운데 회원은 60~70대가 많다.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전국에 ‘파크골프’ 열풍이 번지고 있다. 1983년 일본 홋카이도에서 시작돼 2000년대 초반 한국에 상륙한 파크골프는 쉽게 말해 일반 골프의 축약 버전이다. 골프보다 훨씬 짧은 100m 안팎 거리를 채 하나로 끝내는 게임. 힘을 주어 허리를 빠르게 돌려야 하는 ‘보디 턴(body turn)’이 빠지기 때문에 허리·손목 등 부상의 위험이나 체력적 부담이 적다. 2시간쯤 전체 구장을 걷기 때문에 ‘걷기 운동’으로 또 이만 한 게 없다. 또래 노인들과 사교 활동도 즐겁고, 우후죽순 늘어난 파크골프 대회에 참가하면 부수입도 짭짤하다.

 

2020년 약 4만5000명이었던 전국 파크골프 동호회 회원은 작년 말 기준 18만4000명으로 4배로 불어났다(대한파크골프협회). 등록하지 않은 애호가들을 합하면 30만명에 육박한다고 파크골프인들은 말한다.

그래픽=송윤혜
 

◇골프 그까짓 거!

‘일반 골퍼’들에게 동절기는 입춘을 기다리는 개구리의 심정으로 연습에나 매진할 시기다. 그런데 시니어가 주류인 파크골프는 다르다. 과격한 동작이 적고 대부분의 구장이 평지이기 때문에 겨울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더욱이 대부분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파크골프장은 공짜로 이용할 수 있고, 집 근처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반 골프와 견주면 비용이나 체력, 장비 등 진입 장벽이 매우 낮은 셈이다.

 

따뜻한 삼남 지방은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안양천 파크골프장은 2021년부터 동절기 휴장을 없앴다. 최근 서울시파크골프협회장에 당선된 이영우(66) 전 영등포구파크골프협회장은 “동네 구장이 휴장하면 회원들이 전국에서 운영 중인 구장으로 유랑을 다녀야 한다”며 “1600명에 달하는 영등포 파크골프인들의 의욕과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고 했다.

1월의 추운 날씨에도 파크골프인들의 열정은 식지 않는다. 지난 23일 서울 영등포구 파크골프 동호회원들이 공과 채를 들고 웃고 있다.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영등포구도 2021년만 해도 파크골프 인구가 300명 안팎에 불과했다. 3~4년 만에 4배 넘게 급증한 것. 전체 회원 중 허리에 해당하는 나이가 51년생, 75세라고 한다. 최고령자는 92세, 막내는 48세. 50대도 몇 안 되고 사실상 60~70대가 압도적이다. 이 회장은 “집에서 리모컨, 화투나 만지작거리던 노인들이 파크골프를 하면서 신체·정신 건강 모두 좋아진다”고 했다. 몇 해 전 수해가 났을 때 안양천파크골프장도 엉망이 됐지만, 회원 200여 명이 자발적으로 나와 청소를 했다. 인근 야구장·테니스장이 망가진 채로 내버려져 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노년에 시작한 여가 생활이 활기 넘치고 주도적인 삶을 이끈다는 방증.

 

경남 진주에 사는 김기춘(70·가명)씨는 재작년 골프에서 파크골프로 환승했다. 젊어서는 골프를 즐겼지만 허리디스크가 생겼다. 체력적·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골프 대신, 허리 근력에 도움이 되는 걷기가 포함된 파크골프로 건너간 것. 김씨는 “옛날에 골프 치던 때처럼 게임이나 내기의 재미도 있고 친구들과 다칠 걱정 없이 놀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홀인원’을 했을 때 동반 플레이어들에게 밥을 한 끼 대접했고, 지난해에는 골프를 즐기는 아들(42)과 함께 가족 파크골프 대회에도 출전했다. 손주까지 3대(代)가 참여하는 파크골프 대회에 나가는 게 올해의 목표다.

 
드라이버부터 퍼터까지 10개 안팎의 클럽이 필요한 일반 골프와 달리 파크골프는 사과만한 헤드가 달린 채 하나로 플레이한다. /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여느 스포츠처럼 파크골프에도 ‘장비발’이 있다. 외국산이 점령한 일반 골프채 시장과 달리 업력이 길지 않은 국산 브랜드가 강자라는 게 특징. 이 업체는 250만원짜리 ‘럭셔리 프리미엄 상급자용’을 팔고 있다. 부산에 사는 이모(69)씨는 “30만원짜리로 시작했는데 비싼 걸 써 보니 같은 힘으로 쳐도 훨씬 멀리 나가더라”며 “칠순 선물로 딸에게 200만원짜리를 선물 받았다”고 했다. 이렇듯 ‘자식 자랑’과 곧장 연결되는 데다, 하나뿐인 골프채 외에 달리 힘을 줄 아이템이 없다 보니 가격 인상을 견인하기도. 대한파크골프협회 관계자는 “파크골프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만큼 장비 시장에도 새로운 업체들이 등장하고 있다”고 했다.

 

◇파크골프의 성지 ‘화천’

강원도 화천의 ‘산천어 파크골프장’은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2월 시즌 오픈 대회를 앞두고 벌써부터 전국에서 온 동호인들로 북적인다. 입상을 노리는 파크골프인들이 원정 훈련에 나선 것. 이번 대회는 시니어(남성 69세·여성 65세 이상)부와 일반부가 동성 2인1조로 짝을 지어 나오는데, 1등 상금이 1000만원이다. 2월 4일 예선이 시작돼 19~20일 결선이 치러진다.

지난해 2월 강원도 화천의 산천어파크골프장에서 열린 파크골프 대회 모습 / 화천군파크골프협회 제공
 

대회는 36홀을 꽃나무로 아름답게 장식한 산천어구장에서 열린다. 파크골퍼들이 꼽는 ‘가보고 싶은 골프 코스.’ 지난해에만 전국 대회를 네 번 치렀고, 우승 상금이 3000만원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명품 구장’을 보유한 덕에 화천은 ‘파크골프 성지’로 이름을 떨치게 됐다고. 화천군 인구가 2만2000여 명인데 파크골프 회원이 약 1200명이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녀 각 3명으로 구성된 실업팀도 운영 중이다. 지역 초등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도 파크골프를 가르쳐 학생부 대회도 따로 열린다.

 

화천이 이렇게 강호가 된 배경에는 ‘비즈니스’도 있었다. 화천은 지형적으로 지나가다 들를 만한 곳이 아니라 ‘일부러’ 찾아가야 하는 고장. ‘산천어축제’를 만들어 겨울마다 지역 경제를 활성화했지만 코로나19로 몇 년간 관광이 뚝 끊기면서 지역 경기가 어려워졌다. 오경택 화천군 파크골프협회장은 “산천어구장이라는 명품 구장을 만든 것을 계기로 지역 관광 산업과 파크골프를 결합한 것”이라며 “대회를 많이 유치하다 보니 산천어구장을 경험한 동호인이 늘어나면서 소문이 났다”고 했다.

 

지난해 화천군에서 파크골프를 친 사람은 55만명으로, 외지 관광객(28만명)이 과반이었다. 대회를 앞두고 전지훈련을 오는 사람이 많아 하루에 700~800명이 머물면서 숙박업·외식업계도 덩달아 웃게 됐다고.

 

파크골프대회 상금을 3000만원까지 끌어올린 것도 화천이다. 통상 500만원 선이 평균치. 그래서 ‘상금 사냥꾼’까지 생겼다. 한 지역 동호회 관계자는 “누구는 1년에 5000만원 벌었다, 8000만원 벌었다는 얘기가 돈다”며 “입상만 해도 100만원 정도는 벌 수 있으니 더 관심이 쏠리는 것 같다”고 했다.

3대가 함께하는 파크 골프대회도 열린다. '친정엄마', '딸', '손주'라는 티셔츠를 맞춰 입고 '전국 어르신 가족 사랑 파크골프대회'에 참여한 가족의 모습이 정겹다. / 대한파크골프협회
 

◇동네마다 경쟁 치열

파크골프 수요가 폭증하면서 지자체마다 구장 건설 경쟁도 불붙었다. 전남에는 ‘국내 최대’를 자랑하는 87홀의 화순파크골프장이 있고, 경북 구미에도 63홀짜리 구장이 있다. 충남도는 108홀 규모의 도립파크골프장을, 대구 군위는 180홀의 천연잔디 파크골프장 건립을 각각 추진 중이다.

 

‘노는 땅’이 없는 서울은 몸살을 앓는다. 현재 강남구·강동구·금천구·동대문구·강서구·양천구·마포구·송파구·노원구 등에 파크골프장이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여유 공간이 있는 월드컵공원 파크골프장은 올해 9월부터 36홀(현재 18홀)로 확장한다”며 “거의 모든 구에서 파크골프장을 만들어달라는 민원이 쏟아지는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는 최근 대모산 부지에 18홀 규모 파크골프장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내놨지만 자연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다. 대부분 하천 변에 파크골프장을 만드는데 수해 관리 등 치수(治水)도 어렵다. 인가가 완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운영되는 파크골프장도 있다. 사람이 모이자 정치도 개입한다. 한 서울 지역구 국회의원은 “노인 표(票)와 즉각 연결되기 때문에 파크골프 동호회는 특별 관리 대상”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