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하는 외로움 사업
'렌털 여친' 이용해 보니
약속 시간 30분 전 ‘발신번호 표시 제한’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오고 계시죠? 저 검정 재킷에 아이보리색 롱치마 입고 있어요.” 이윽고 본 기자의 의상을 물어왔다. 서로 알아봐야 하니까. 이름도 얼굴도 연락처도 모르는 여성, 오늘 딱 세 시간 동안 빌린 이른바 ‘렌털 여친(여자 친구)’. 며칠 전 포털사이트 검색으로 알게 된 업체 운영자가 이용 요금의 50% 선결제를 요구하며 원하는 연령대와 이상형을 물어봤을 때, 얼렁뚱땅 “심성이 고운 분”이라고 대답했었다.
“선하게 예쁘고 마음씨 착한 친구로 매칭해 주겠다”는 약속이 돌아왔다. 30분 뒤 강남역 3번 출구 앞에서 우리는 마주했다. 초면의 여성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 건넸다. 핫팩이었다. “날씨가 많이 춥죠?”
◇전국에 퍼지는 ‘애인 대행 서비스’
2024년의 마지막 날에도 누군가는 혼자일 것이었다. ‘연말’ 추가 요금을 요구하는 업체도 있었다. “전화 문의가 폭주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예약된 30대 초반의 이 여성은 “이따 저녁에도 데이트 일정이 잡혀있다”며 “주기적으로 만나는 고객이 10여 명쯤 된다”고 말했다. 12시였으므로 일단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국숫집에 앉아 나머지 50% 잔금을 계좌 이체했다. 서로의 실명(實名)이 드러나는 유일한 순간. 업체마다 다르지만 시간당 5만~10만원 수준에, 두 시간 혹은 세 시간 이용이 필수다. 여성이 미인 대회 출신이거나 인플루언서인 경우 15만~40만원까지 뛴다. 물론 밥값·찻값 등 데이트 비용은 별도 부담. 송금이 끝나자 본격 대화가 시작됐다. 시답잖은 얘기에도 리액션이 대단했다. “적성에 맞아 전업으로 뛰어들었다”고 했다.
식사 후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어정쩡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미리 “스킨십은 불가하다”는 고지를 받았다. 일부 업체는 ‘손잡기’ ‘팔짱’ 등을 옵션으로 제공하지만 그 이상은 허용되지 않는다. “과도한 불쾌감을 줄 경우 곧장 서비스 종료”라고. 애인이라기보다 말동무에 가까운 셈이다. 말하자면 20만원어치 대화. 그런데도 인기는 확산세다. 최근 국내 업체가 10곳 가까이 늘었고, 서비스 지역이 수도권뿐 아니라 제주도까지 뻗어있으며, 지난달에는 일본 오사카에 한국인 관광객을 위한 회사까지 들어섰다.
“의사·변호사·군인 등 고객 직업군은 다양해요. 밥 먹고 카페·노래방 가는 평범한 데이트도 있고, 놀이공원이나 워터파크에 같이 놀러 가기도 하고요.” 지난달 국내 한 유튜버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렌털 여친’과의 1박 2일을 진행해 화제를 모았다. 총 요금이 198만원이었다.
◇모태 솔로인데요… 좀 도와주세요
그래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이해가 안 됐으니까. 너무 고가(高價) 아닌가. 그러나 ‘외로움’은 지불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 어디까지나 대행이지만 “이 서비스가 아니면 데이트가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장애인이 그 대표적 유형이다. “거동이 마음대로 안 돼 연애는커녕 여자를 한 번도 못 만나본 장애인 남성에게 ‘렌털’ 요청을 받은 적이 있어요. 밥도 먹여드리고 산책도 하고 ‘평생 이런 하루는 처음이었다’는 감사 인사를 받았을 때 뭉클했어요. 일종의 심리 치료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우울증을 앓는 고객 분이 해준 얘기예요.”
그러나 가장 자주 따라붙는 비판은 성 상품화. 애인 대행 업체 쏠메이트 박서연 대표는 “고객 성비는 남녀가 6대4 정도”라고 말했다. “데이트 요청만 있는 건 아니에요. 여성 고객은 동성의 ‘절친 대행’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어릴 때 학교 폭력 등으로 트라우마가 생겨 친구가 없는 분들요. 결혼식 축사를 요청하거나, 자기 생일 파티에 서너 명을 한꺼번에 부르기도 하죠. 인간 관계의 단절은 심화됐지만 그걸 해소하려는 감정적 요구는 여전해요.
시장이 커진다는 건 이런 사회 변화의 증거라고 봐요.” 10여 년 전 일본에서 태동한 이 서비스가 한국으로 번진 이유일 것이다. 한 30대 남성은 “살면서 여자 친구와 미술 전시장에 가본 적이 없어 그 로망을 실현하고 싶었다”며 “돈 주고 전문 인력을 구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는 후기를 남겼다.
◇모두가 무대 위에서 연기한다
애인 대행의 주요 역할은 또 있다. ‘질투심 유발’이다. 자신을 버린 전(前) 연인에게 후회를 안겨 주기 위해, 연예인급 외모의 여성 혹은 남성(애인 대행)을 대동하고 등장하는 것이다. 최고의 복수는 ‘잘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사례 하나. “의뢰인은 30대 남성,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여자 친구가 바람을 피워 헤어진 상황. 키 170㎝의 현직 피아니스트를 애인 대행으로 섭외하고 온갖 명품을 동원해 작전을 진행했다. 의뢰인과 팔짱을 낀 채 평소 전 여친의 퇴근길 경로에서 자연스레 마주치는 시나리오였다. 즉석에서 3자 대면이 이뤄졌다. ‘언제부터 알게 된 사이냐’며 따지는 전 여친에게 ‘헤어졌으면 상관 말라’고 말하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 연출됐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제는 아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중이다. 갤럽과 메타가 공동으로 한국 등 142국을 조사한 ‘사회적 연결 상태 보고서 2023′에 따르면, 성인 네 명 중 한 명(24%)이 “매우 또는 상당히 외롭다”고 응답했다. 외로움의 경제(loneliness economy)가 각국에서 계속 커지는 배경이다. 중국에서는 뽀뽀·포옹·영화 보기 등의 메뉴판을 내걸고 노점 형태로 ‘길거리 애인 대행’을 판촉하는 여성들까지 등장했다. 지난달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베트남에서는 최근 부모의 결혼 재촉을 피하기 위해 남자 친구를 빌리는 여성이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성공적인 커리어 없이 결혼하는 것은 많은 문제를 야기합니다. 파트너를 빌리는 건 부모님을 기쁘게 하고 스스로도 부담을 덜 수 있어 윈윈입니다.”
◇착각은 금물, 진상은 사절
드물지만 ‘진짜 애인’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혼신의 ‘감정 노동’을 진심으로 착각해 혼자만의 소설에 갇히거나, 애초에 음흉한 목적으로 데이트 매칭을 신청하는 ‘진상’도 존재한다. 규정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만나자마자 손부터 덥석 잡거나, 젠틀하게 굴다 막판에 본색을 드러내는 경우다. 가끔 1박 2일 여행(숙박은 각자) 요청이 들어오는데, 합의를 깨고 갑자기 “한방에서 자자”며 들이대는 식이다. 범죄 피해 가능성에 노출되는 것이다. 해당 서비스가 대중화돼 ‘여친, 빌리겠습니다’ 같은 인기 만화·드라마까지 제작된 일본에서는 스토킹 피해자도 나온다고. “낌새가 이상하면 사전에 신청을 거절하거나 업체끼리 블랙리스트를 공유한다”고는 해도 실질적인 위험을 방지할 안전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예약금만 받고 잠적해버리는 사기 업체나 일부 음성화된 돈벌이도 존재한다. “사업 차원에서 소중한 시간을 제공하고 싶어하는 고객을 위한 VIP 매칭”을 광고하는 곳도 있었다. ‘접대부’를 에두른 표현이다. 동반 해외여행을 주선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난달에는 중고 거래 앱 당근에 선정적인 사진과 함께 ‘1박 2일 애인 대행 티켓’을 판매한다는 글이 잇따라 게재돼 논란이 일었다. 이후 해당 게시자는 이용이 정지됐다.
정상혁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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