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은 지난 5월호 ‘스승의 날’ 기획으로 <나의 선생님> 코너를 진행하며 김대진 한예총 총장, 오효진 소설가, 김도연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 정호승 시인 등과 함께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의 스승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세상을 긴 대롱을 통해 보는 것처럼 삶의 랜드마크 같은 결정적 순간을 스승이란 인물을 통해 깊숙이 포착할 수 있었다. 윤동한 회장은 원고에서 ‘사실 내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인생을 살면서 만난 크고 작은 인연의 합(合)’이라고 했었다. 값진 인연들이 그에게 귀한 스승이 되어 인생을 변화시켰다는 의미다.
잠시 윤 회장의 스승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언급하자면, 아버지의 급서(急逝)로 외가 쪽 어른들이 그가 집안 장남이니 ‘강한 호랑이’처럼 자라야 한다는 뜻에서 ‘강호’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거나 고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 “아버지도 안 계시고 밑으로 줄줄이 동생이 넷이나 된다”며 평소 그가 원하던 사학과(史學科)보다 경영학과 진학을 권했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자전거로 인연을 맺은 동네 쌀가게 아저씨가 훗날 농협에 취직하기 위해 신용보증인이 필요했을 때 망설임 없이 나서준 이야기, 고학생 시절 그의 끼니를 챙겨준 공사판 김 목수 아저씨, 돌산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오동나무처럼 되라는 뜻에서 석오(石梧)라는 호를 지어준 소목장 장인(匠人) 이야기까지 인생을 변화시킨 남다른 스승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어쨌든, 이런 계기로 창업 34년 만에 매출액 3조원의 화장품·제약 회사로 우뚝 세운 윤 회장과 점심을 먹게 되었고 인터뷰라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공식적인 인터뷰라기보다 뭐랄까 식사를 겸한 인생(人生) 강연회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신화(神話)가 있는 재계의 어른을 곁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개인적으로 큰 행운이었다. 우리는 지난 5월 22일 서울 서초구의 한 조용한 식당에서 밥을 같이 먹었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이 말이, 이 표현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명문을 넘어선 삶의 지혜였다.
“도토리의 미래가 떡갈나무가 되듯 돌멩이의 미래 역시 탑(塔)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중간의 단계를 건너뛰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걸어야 천 리에 닿을 수 있듯 보잘것없는 돌멩이도 석탑을 꿈꿀 수 있다”는 윤 회장의 우보천리론(牛步千里論)이 기자의 마음을 설렘으로 채웠다.
― 기업가라는 입지(立志)는 어떻게 세웠습니까. ‘꿈에 30년을 곱하면 부(富)가 된다’고 하셨는데 정말 가능할까요?
“고교 동창 친구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유학길에 오르기 전날 제 하숙방에서 하룻밤 묵었습니다. 친구는 같이 가자며 제게도 유학 시험을 보라고 권했지만 저는 집안의 가장이었기에 그럴 수 없었죠. 다음 날 김포공항까지 친구를 배웅한 뒤 제 방으로 돌아왔는데 마침 친구가 놓고 간 책이 눈에 보였습니다. 책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서러움이 복받쳐 이불을 뒤집어쓴 채 30분이나 울었습니다.”
― 왜 울었습니까.
“‘친구는 유학을 가는데 나는 뭐냐’ ‘내가 명문대를 나왔다면 해외 파견을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실컷 울어서 그런지 속이 아주 후련했습니다.”
이순신 전문가인 윤동한 회장은 2021년 대구가톨릭대에 전국 최초로 ‘이순신학과’를 설립토록 이끌었다. 윤 회장은 이 대학원 박사과정을 모두 수료했다. 학위 논문 심사를 받고 있다. 사진=한국콜마
“꿈에 30년을 곱하면 富가 됩니다”
― 책에 어떤 문장이 있었기에 가슴을 복받치게 했나요?
“책장을 넘기다 보니 ‘자신감을 잃으면 온 세상이 나의 적(敵)이 된다’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미국의 사상가 겸 시인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한 말이죠. 가장 필요한 시점에서 만난 문장이라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 살면서 ‘자신감’이 왜 중요한 것일까요?
“생각해 보니 진짜 그렇습니다. 자신감을 붙들지 않으면 나보다 잘나가는 사람을 시기하게 되고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를 원망하는 마음으로만 가득 차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감이 사라진 자리는 공터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불신, 불안, 시기, 원망 등의 감정들이 영토(領土) 싸움하듯 그 자리를 꿰차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마음이 사라지는 곳에서 불온한 감정들이 생겨나는 것. 이것이 마음의 이치예요.”
― 무너진 자신감을 일으켜 세워주는 ‘문장’과 절묘한 타이밍에 만나셨군요.
“네, 저만 정신 차리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학 갈 형편도 안 되고, 지방대를 나와 어느 정도까지 회사 생활에 한계가 있다. 그러면 사업을 해서 내 머리맡에 놓인 유리천장을 없애자’며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기업가가 되겠다는 뜻을 세운 뒤로는 거짓말처럼 마음의 갈등이 사라졌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가 공자가 말하는 입지(立志)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 기업가로 ‘입지’하는 꿈을 세우셨군요. 가끔 사람들은 형편이 어려워 자신의 꿈을 포기한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는 1년에 한 번씩 우리 회사에서 장학금을 주는 대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져요. 장학생을 선발할 때는 성적보다 집이 가난한 친구들을 우선해요. 그들과 만나면 ‘지금 가난한 것은 네 탓이 아니지만 30년 후의 가난은 네 탓’이라는 말을 꼭 전합니다.”
― 30년 후의 가난은 너의 탓이라….
“그리고 꿈을 가지라는 당부도 잊지 않습니다. 꿈에다 30년이라는 세월을 곱하면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도 충분히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윤 회장은 “살다 보면 가끔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덜 상처받기 위해서 지혜를 모아야 할 때가 온다”는 점을 강조했다. “만약 지금 ‘나’를 아프게 만드는 것이 ‘눈’이고, 그것을 없애주는 것이 ‘이’라고 한다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니라 ‘눈에는 이, 이에는 눈’으로 교차하며 아픔을 상쇄시키는 겁니다.”
“포기하는 삶이 지는 것은 아닙니다”
― 상쇄시킨다….
“눈과 눈이 만나면 갈등(葛藤)의 폭이 커지지만 눈과 이가 만나면 되레 상쇄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학벌 때문에 느끼는 좌절을 학벌로 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만의 능력을 보일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찾으면 됩니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도 아픔을 이겨내는 효과적인 방법이 됩니다. 김 기자는 과연 무엇을 잘합니까?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무엇을 잘하는 분입니까?”
― 윤 회장께서는 어릴 때부터 역사 선생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셨습니다. 대학에 가면 사학을 전공할 거라고 일찌감치 진로를 정해 놓았었는지요?
“그렇죠.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집의 지붕 역할을 하던 아버지의 빈자리는 저나 가족보다 주변 어른들에게 더 진하게 남았나 봅니다. 고교 담임 선생님이 가정 방문을 오시더니, ‘사학과보다 경영학과에 가라. 아버지도 안 계시고 네 밑으로 동생이 넷이나 된다. 어머니와 외할머니까지 있지 않으냐. 잘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수십 년이 훨씬 지난 일인데도 마치 어제 있었던 일 같습니다.”
윤 회장은 “그때 처음으로 ‘이 집의 가장이 나구나’라는 사실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역사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을 두고 삼포 세대(연애·결혼·출산 포기), 오포 세대(3포+집·경력 포기), 칠포 세대(5포+꿈·희망 포기)라고 합니다. 그 시절, 저는 칠포 세대까지는 아니어도, 오포 세대의 조상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윤 회장은 자신의 삶을 잠시 뒤 돌아보며 꿈을 포기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가장 먼저 역사 선생님이라는 꿈을 포기했고, 학창 시절 또래 친구들과 추억을 쌓을 수 있는 대외 활동을 포기했습니다. 사회에 나와서는 첫 직장이었던 농협을 그만둬 괜찮은 직장을 포기했고, 고액 연봉의 스카우트 제의도 뿌리쳤으니 돈도 포기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화장품 제조 기업으로 사업을 시작했기에 갑(甲)으로 사는 인생도 포기한 지 오래…. 어떻게 저는 남들이 갖고 싶어 하는 순서대로 포기하면서 산 것만 같습니다.”
윤 회장은 “그래도 좋았다. 흙수저가 적성에도 잘 맞고, 포기하는 삶이 불편하거나 억울하지도 않았다”고 회상한다.
― 포기하는 삶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돈이 많든 적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낮든 사람은 일정 부분 ‘가난한 저금통’을 옆에 꿰차고 있어야 삶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 가난한 저금통이 무슨 의미인가요?
“진정으로 겸손한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쓸모 있는 가치들을 담을 수 있는 저금통 말입니다. 그래야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둘 수 있습니다. 차고 넘치는 사람 곁에는 그것을 얻으려는 자가 들끓게 되지만 부족한 사람 곁에는 모자란 부분을 함께 채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넘치는 福' 경계해야”
윤 회장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요즘 제가 즐겨 쓰는 말이 있는데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써 복을 오래 누린다는 ‘석복’이라는 개념입니다.” 아낄 석(惜), 복 복(福), ‘복을 아낀다’는 뜻이다. “석복에는 정상까지 가지 말고 허리에서 멈추라는 지혜가 들어 있습니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완성할 완(完), 맺을 결(結), 온전할 전(全) 다음에 ‘뿌듯함’이 올 수도 있지만 때로는 오히려 허무함이 오기도 합니다. 온 힘을 기울여 어떤 목표를 이루었으면 행복하고 기뻐야 하는데 왜 허무함이 올까요?”
― 왜 허무할까요?
“그 목표에 ‘넘치는’ 복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포기했다는 내용을 가만히 살펴보면 결혼, 내 집, 인간관계, 취업 등이 있습니다. 어느 세대든 그걸 20대 때 전부 이룬 세대는 하나도 없어요. 만약 다 이뤘다면 그 사람은 남은 인생에 써야 할 복을 어느 한 시점에 몰아서 쓴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윤 회장은 “무언가를 획득하는 일 못지않게 ‘포기하는 용기’도 가져야 인생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넘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또 “보통 사람들은 포기를 의지가 빈약해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자포자기 개념으로만 정리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도 덧붙였다.
“하나의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다른 것을 꺼두는 지혜로 기능할 때도 있는데 저는 이것을 포기의 순(順)기능이라고 표현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포기할 계획입니다.”
― 무얼 포기하고 싶습니까.
“경험상 어느 하나를 포기하면, 그것이 간절한 것일수록 다음 것에 대한 열정(熱情)이 배로 불어납니다. 정말 갖고 싶은 것을 포기했으니 얼마나 한(恨)으로 남겠습니까? 그 한을 다음 소망을 이루는 연료(燃料)로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 주십시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대로 저는 역사 교사라는 꿈은 포기했지만 인문학 독서 모임인 ‘계영계(戒盈契)’를 통해 14년간 원 없이 역사 공부를 했습니다. 한 달에 두 번 호학(好學)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역사를 공부하고 철학을 논하고 문학을 음미하는데 그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만약 제가 역사 교사를 직업으로 삼았다면 바쁜 시간을 쪼개서 10년이 넘도록 호학할 수 있었을까요?”
한국콜마의 어제와 오늘
윤동한 회장이 이끄는 한국콜마는 지난해 2조9055억원의 매출(전 관계사 포함)을 기록했다. 2021년 2조4136억원이던 매출이 2년 사이에 거의 3조원에 이르는 매출 기록을 세운 것이다. 화장품부터 건강기능식품, 제약까지 고루 국내외 시장에서 성장하고 있다. 윤 회장은 “회사를 세우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의식주(衣食住)가 해결되면 사람들은 어디로 눈을 돌릴까’를 고민했는데 그것이 바로 화장품과 의약품, 건기식(건강기능식품)이었다”며 “세 가지 영역에서 꾸준히 노력한 결과가 좋은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 한국콜마는 코로나19 위기를 어떻게 이겨냈는지 궁금합니다. 극복 비결은 무엇입니까.
“한국콜마의 경영철학으로 자리 잡은 ‘우보천리 정신’을 말하고 싶습니다. 우보천리는 ‘소의 걸음으로 천 리를 간다’는 뜻입니다. 일정한 속도로 걸어가는 소처럼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정진하면 궁극적으로 목표에 가장 먼저 이를 수 있다는 의미죠. 어려운 상황에서도 연구개발(R&D)에 대한 투자를 꾸준히 이어갔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온 한국콜마만의 기술력이 위기를 극복하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 어떤 위기가 생각나십니까.
“기업 경영을 하다 보면 수많은 위기와 선택의 순간을 겪잖아요. 창업 초기 단전 예정 통보를 받을 정도로 자금난을 겪었던 일부터 무자료 거래나 리베이트 거래를 요구했던 제안을 단호하게 뿌리쳤던 일 등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면 늘 위기와 선택의 연속이었죠. 코로나19 당시 어려운 경영 상황에 처했는데 그럼에도 인재를 모으고 성장시킬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집중했어요. 정부나 외부의 지원을 기다리기보다는 적극적인 R&D 투자로 핵심 경쟁력을 확보했습니다. 이런 노력들이 결국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한국콜마는 ‘가격이 아니라 기술로승부한다’ ‘작지만 큰 기업은 기술력이 있을 때 가능하다’라는 말을 앞장서 실천해 왔다. 창업 초기부터 직원 30% 이상을 연구원으로 구성한다는 원칙을 현재까지 지키고 있으며, 연 매출 5% 이상을 신소재·신기술 연구개발에 지속적으로 투자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기업가 정신과 기술혁신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해주십시오.
“1990년 직원 3명으로 시작해 약 34년 만에 연 매출 3조원의 기업으로 성장한 원동력은 R&D였습니다. 창업 당시 작은 기업이었지만, 외부 환경을 탓하거나 국가의 지원만을 기다리지 않았어요. 시장의 경쟁에서 차별화를 꾀하고 한국콜마의 핵심 성장 동력을 만들기 위해 연구개발에 집중했죠.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또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해 나가는 중요한 핵심 요인 중 하나가 연구개발입니다. R&D야말로 타사와의 차별 포인트가 되고 기업 성장의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죠. 중소기업이 R&D할 여력이 어디에 있느냐고 생각하면 안 돼요. 기업 규모에 따라 전략적으로 나서면 돼요. 기존 기술 개량을 통해 연구 효율성을 높이거나 융합 기술을 개발하는 것만으로 기업의 큰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 서초구 석오빌딩 집무실에서 윤동한 한국콜마 회장. 이순신 장군의 영정 앞에 서 있다. 사진=조선DB
“이순신은 역사상 최고의 경영인”
윤 회장은 이순신(李舜臣·1545~ 1598년) 장군을 역사상 최고의 경영인으로 꼽았다. 이유는 이랬다. 이순신 장군은 일찍이 R&D의 중요성을 간파해 거북선과 천자총통 등의 무기를 개발하고 학익진(鶴翼陣) 전술을 사용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 이순신 장군 말씀을 하셨는데 이 시대에 왜 충무공 정신이 필요할까요?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이념으로 갈라지고 남녀노소로 갈라지고 빈부 간의 격차로 갈라지고 세대 간에도 갈라져 있어요.
“갈라진 것만 문제가 아니라 갈라져서 서로를 미워하고 반대를 위한 반대가 난무하는 세상이 된 것이 문제입니다. 물질적으로는 사는 것이 분명히 나아졌습니다. 우리나라가 세계 3대 주요 선진공업국으로 성장하면서 의식주 면에서는 우리 역사상 가장 좋아진 것도 사실이죠. 자동차, 전기차 배터리, 선박, 반도체, 가전 등 못 만드는 것이 없는 나라인데 정신적으로는 피폐해지다 못해 자살률 OECD 1위국이 될 정도로 살기 힘든 나라가 된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분열의 나라를 치유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를 다듬고 보듬어줄 지도자는 없는 것일까 심각하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그 갈망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 이순신이라고 믿습니다.”
기자는 점점 윤 회장의 ‘이순신론’에 신경을 집중해서 듣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동인과 서인, 연령, 지역과 신분 고하에도 차별 없이 대했던 보기 드문 정돈된 인격자였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적을 공략할 때는 추상(秋霜)과 같이 엄(嚴)하고 담대했으면서도 백성을 대할 때는 한없이 따뜻했습니다. 전사한 군졸을 위해 제문을 지으며 ‘내 탓’이라고 가슴을 쳤고 전쟁 중에 소(小)빙하기 강추위에 벌벌 떠는 선상(船上)의 수군을 염려하느라 육지에 거의 내리지도 않고 불편한 선상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윤 회장은 “이순신이야말로 분열된 이 나라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해법(解法)이자 치료약(治療藥)”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고위직의 농단에는 서릿발처럼 강하게 대처하면서도 굶어 죽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가슴 아파했어요. 수군 병졸이나 의병, 어촌의 촌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을 위로하며 생사를 같이했죠. 제가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점점 빠져든 분이 바로 이순신입니다. 이순신은 서울 충무로 옛 건천동(현 명보아트홀 부근)에서 태어나 열 살 무렵까지 살았고 부모님과 아산으로 이사해 문과에서 무과로 방향을 바꾸었으며 마침내 무과에 급제하고 무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서울, 함경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어디서도 자기 연고를 주장할 수 있어요. 그야말로 전국구입니다.”
“이순신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성장모델 제시”
― 요즘 기업의 화두는 지속 성장입니다. 기업의 경쟁 우위를 확보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저는 이순신 장군이 기업으로 치면 지속 가능한 성장모델을 제시한 분이라고 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시절, 조선과 명나라, 일본 모두가 그랬고 전쟁에 임한 장수들도 혼돈 속에 살길을 찾아 몸부림쳤습니다. 그런데 이순신은 달랐습니다.”
― 어떻게 달랐습니까.
“칠천량 전투 이후 이순신이 임시 지휘부를 개설하고 전투를 준비하려다 보니 꼭 필요한 군사와 군량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이에 참모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피란민을 군사로 활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전란(戰亂)을 피해 섬으로 흩어져 있던 백성 중에서 장정들을 구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먼저 피란민들을 정착시키고 안전하게 보호한 후에 그들의 일부를 군사로 활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윤 회장은 그 당시 이순신이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을 실시해 군량미 보급을 실현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류성룡(柳成龍·1542~1607년)의 《징비록(懲毖錄)》에는 다음의 내용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순신은 배의 크고 작은 차이에 따라서 쌀을 바치고 통행첩을 받게 하였는데, 큰 배는 3섬, 중간 배는 2섬, 작은 배는 1섬으로 정하였다. 이때 피란하는 사람들은 재물과 곡식을 다 싣고 바다로 들어오는 까닭으로 쌀 바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며 통행을 금하는 일이 없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10여 일 동안에 군량 1만여 섬을 얻었다.>
윤 회장의 말이다.
“이로써 장군은 군량미를 얻으며 왜군 첩자를 막을 수 있었고, 어민 등 피란민들은 수군으로부터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이 생긴 것이니 신의 한 수라는 말이 딱 어울립니다.”
그는 또 “해로통행첩은 조금 앞선 시기 포르투갈이 사용했던 카르타스(Cartaz·일종의 통행첩)와도 비교된다”고도 했다. “카르타스는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 상인들이 현지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특정 항로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이지만 수탈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해로통행첩과는 목적부터 다릅니다. 수군 정비가 본격화되자 이순신은 통제영이 들어설 만한 곳을 찾는데 그곳이 바로 고금도 군영(軍營·1598년 2~11월)이었습니다.”
“카르타스는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 상인들이 현지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특정 항로를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이지만 수탈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순신의 해로통행첩과는 목적부터 다릅니다. 수군 정비가 본격화되자 이순신은 통제영이 들어설 만한 곳을 찾는데 그곳이 바로 고금도 군영(軍營·1598년 2~11월)이었습니다.”
이순신 리더십과 해로통행첩, 고금도 軍營
이순신은 1958년 2월 17일 보화도에서 100km 떨어진 전남 강진 앞바다의 고금도로 진(陣)을 옮겼다. 그곳은 봉황산(鳳凰山, 215m), 덕암산(德巖山, 189m) 등 해발 200m내외의 산지가 발달하였고, 좁은 평야가 산재해 있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참깨·마늘 등이며, 연안의 간석지에서는 굴·김·미역 등이 생산되니 어느 정도 식량 자급이 가능한 곳이었으며 위치적으로는 방어가 쉽고 공격하기에는 어려운 천혜의 요새였다는 것이 윤 회장의 생각이다.
“고금도 시절은 비록 일 년도 못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새로운 수군과 환경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意義)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섬은 한산도보다 2.8배나 크고 둔전(屯田)과 해로통행첩으로 거둬들이는 군량미가 막대했죠. 군선(軍船)을 건조하는 데 무리가 없었고 백성들이 몰려들면서 생업에 걱정이 없어지자 물류와 경제가 살아났습니다. 삼도수군통제영이 실질적인 경제 유통의 중심지가 된 셈이었고 해상왕국의 기지가 되었어요.
윤 회장은 “이러한 이순신의 통제영 경영에서 기업 경영철학을 배운다. 전방위적 도전이 몰려오는 오늘날, 이순신이 보여주었던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준비자세는 기업의 갈 바를 보여준다”고 했다.
“일어날 모든 가능성을 살피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쳐두었기에 그는 위기에도 초연하게 맞설 수 있었습니다.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괴롭힌 조정 내부의 적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옳다고 믿는 일에서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당장의 근사한 모양새나 혀로 아첨하는 미사여구의 칭찬, 시시때때로 조정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비난과 조롱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이순신의 강점이요, 문제 해결책이었습니다.”
― 이 시대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오늘날 청년들은 참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어요. 미래는 불확실하고 앞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경쟁이 심화되고 있어요. 그럼에도 용기를 내라고 격려하고 싶고 ‘남다르게 살아라’고 주문하고 싶어요. 남과 똑같이 하면서 일등을 기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에요. 또 우리는 늘 비교하는 데 익숙하지만 비교하기 시작하면 늘 불행해집니다.”
― 경쟁을 피할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 경쟁을 피할 수는 없어요. 그럼에도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남들과 비교하지 말며 차별화하는 방향으로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비록 직장은 다를지라도 내가 한평생 몸 바칠 직업을 찾아가야 합니다. 좀 늦어도 됩니다. 서두르면 오히려 실패하기 십상이죠. 스펙을 쌓기보다 평생 직업을 준비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길이 열려요. 준비되어 있으면 기회가 옵니다.”
워런 버핏과 점심 식사를 같이하는 일명 ‘파워 런치’는 한화로 30억원이나 한다고 알려져 있다. 기자는 윤동한 회장과 점심을 같이하며 그로부터 얻은 삶의 지혜와 혜안은 금전적 가치를 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사치스러운 ‘공짜 점심’에 큰 기쁨을 느꼈다. 인터뷰를 통해 얻은 지혜를 독자들에게도 ‘공짜’로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식당을 나섰다. 봄 햇살이 눈 부셨다.
[월간조선]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입력 2024.06.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