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교사 박모(83·전남 목포)씨는 2018년 4월 하인두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인두는 식도와 후두에 붙어 있는 깔때기 모양의 신체 부위로 다른 두경부암보다 치료하기 어렵다고 알려져 있다. 목 주변에 혹 같은 게 만져져서 대학병원에 갔더니, 손쓰기 힘든 상황이었다. 의사는 수술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지 않았다. 원하면 수술하지만 결과가 좋을 것이라고 장담하지 못한다고 했다. 1년 시한부를 선고받은 박씨는 병원을 나서며 큰아들에게 "전남 영암으로 가자"고 부탁했다. 박씨가 세 아들과 여행한 곳이다. 2년 전 사고로 숨진 막내 아들의 흔적을 찾아간 것이다. 박씨는 이곳에서 2박 3일을 홀로 보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뒤 자식들(4남매)을 불러 모아 비장한 각오로 말했다.
“너희들은 내 말을 잘 듣고 존중해주길 바란다. 내 선배나 친구들을 보면 모두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나도 지금 병원에 들어가면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집에서 죽고 싶다.”
이어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나를 입원시킨다면 극단적 선택까지도 생각할 게다.” 박씨의 며느리 김모(62)씨는 "확고하고 단호한 말씀에 숨죽여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누구도 말씀을 거역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고 말한다. 박씨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갈 것이고 처방해주는 약은 잘 먹겠다”며 “내 뜻을 존중해달라”고 재차 말했다.
2일 서울적십자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 가족이 환자의 손을 잡고 있다. 김종호 기자.
그 날 이후로 박씨는 차분하고 계획적으로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해 나갔다. 혼자 남게 될 아내 생활비가 든 통장을 막내 딸에게 맡겼다. 부고를 보낼 지인 명단을 만들고, 연락처를 남겼다. 또 2019년 7월 평생 구독해온 신문을 끊었다. 박씨는 그 달 세상을 떴다. 마치 떠날 날을 예견이라도 한 듯했다. 박씨는 그 달 자식들을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달라고 한 뒤 큰아들과 작은 사위의 품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큰 통증 없이 원하는 대로 그렇게, 집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떠났다. 자식들도 허둥대면서 119를 불러 응급실로 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장례식장에서 알려졌다. 김씨는 “장례를 치르고 식구들이 다 모였을 때 시누이(막내딸)에게 이야기를 듣고 소름이 돋았다. 그렇게 당신의 죽음을 준비해 두고 떠난 것 같아 감동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막내아들을 보낸 장례식장으로 가겠다며 장례식장을 미리 정해놨다. 추모관 납골함도 막내아들 바로 윗칸으로 정했다. 김씨는 “모든 걸 정해 놓으니 자식들이 굉장히 편했다”며 “돌아가신 게 너무 슬프지만, 행복하다는 말이 진심”이라고 한다.
2일 서울적십자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환자 가족이 환자의 손을 잡고 있다. 김종호 기자.
젊은층서도 의향서 등록↑…30~50대 19만명
웰다잉 바람이 불면서 건강할 때부터 생의 마무리를 미리 준비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박씨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나 연명의료계획서 같은 문서를 작성하지 않고 “(언론에 나온대로) 저렇게 해야(연명치료 거부)한다”며 자식들에게 못 박았다. 이렇게 할 수도 있지만 문서를 작성하면 더 분명해진다. 김홍덕(74)씨는 4년 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다. 다니던 종로노인종합복지관에서 죽음 준비 교육 프로그램을 들은 게 계기가 됐다.
김씨는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생명을 무의미하게 연장하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40대 두 자녀가 “무슨 그런 걸 했느냐”고 했지만, 김씨는 “아무래도 자식 입장에서 부모의 연명치료를 그만하겠다고 말하는 게 어렵지 않겠냐. 미리 해두면 의사도, 자식도 큰 짐을 더는 것”이라고 믿는다. 홍양희 사전의료의향서실천모임 공동대표는 “의향서 상담을 오는 사람의 상당수는 병원에 오래 누워있으면서 가족에 짐이 되는 게 싫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했다.
지난 달 27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종로노인종합복지관에서 만난 김홍덕(74)씨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을 보여주고 있다. 이우림 기자.
젊은 층 등록자도 늘고 있다. 30대 A씨는 지난해 5월 벼르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의향서 작성을 도운 상담사는 “여기 방문자 중 제일 젊다”고 했다. 장기 기증도 2년 전 신청했다. 의향서 등록증까지 손에 쥔 A씨는 그제야 “드디어 숙제를 다 끝낸 기분이 든다”고 했다. A씨는 “죽음은 늘 예기치 않게 온다”라며 “아름답게 사는 것보다 아름답게 죽는 것이 더 어려운 것 같다. 매년 1월 1일 유언장을 쓸까 생각 중”이라고 말한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종로노인종합복지관 양수경(35) 디지털문화과 과장도 마지막에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사를 뚜렷이 밝혀놨다. 두 달 전까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 사업을 담당하면서 결심이 섰다. 양 과장은 “복지관에 들어와 웰다잉 관련 수업을 들으면서 죽음이 노인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더라”라며 “죽음을 항상 생각하고 살아야 현재를 더 충실히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2018년 4월~2022년 12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이들은 60대 이상이 87.5%로 압도적이지만 30~50대도 19만1804명에 달한다. 30세 미만도 4288명이다. 사전의향서는 전국 건보공단 지사, 주요 종합병원, 노인복지관 등 374곳에서 작성할 수 있다. 상급종합병원 45곳, 종합병원 189곳 등 전국 339곳의 의료기관에서 이 문서를 조회·확인할 수 있다.
특별취재팀=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이에스더·황수연·이우림 기자 ssshin@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23.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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