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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모 평양과기대 명예총장 - 北, 유치원부터 영어 열풍

해암도 2023. 2. 27. 08:30

“北, 하드웨어 부족하니 소프트웨어에 사활 걸어… ”

14년째 북한에 과학기술 가르치는 박찬모 평양과기대 명예총장

 
 
 
박찬모 평양과기대 명예총장이 지난 22일 컬럼비아대 강연차 뉴욕 맨해튼을 찾아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북한의 잇단 핵·미사일 도발에 따른 국제 제재로 모든 교류가 멈췄지만, 드물게 잘 운영되는 글로벌 합작 프로젝트가 있다. 북한의 유일한 국제 사립대학이자 이공계 인재 양성소인 평양과학기술대학(평양과기대)이다. 평양과기대는 2001년 남북 정부 협약하에 한·미 기독교계와 과학계 지원으로 2010년 평양 중심에 개교했다. 지금도 미국·유럽 등 서방 교수진 60여 명이 학부생과 대학원생 640여 명에게 선진 과학 지식과 영어를 가르친다.

재미 공학자 박찬모(87) 명예총장은 평양과기대 건립부터 운영을 이끌어온 주역이다. 그는 2017년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망 이후 미국인 방북이 금지되기 전까지는 1년에 절반을 평양에 머물렀다. 지금도 원격으로 학생들을 지도한다. 지난 22일(현지 시각) 미 컬럼비아대 북한인권단체 링크(LiNK) 지부가 개최한 학술 행사 참석차 뉴욕을 찾은 박 총장을 만났다.

평양과학기술대 전경. 2010년 한국 기독교계와 과학계가 투자하고 북한이 부지와 인부, 자재를 대 건설해 2010년 개교했다. 지금도 한국 교회와 재미 한인들의 기부로 운영되고 있다. /평양과기대 제공
 

-코로나 팬데믹 이후 북한 국경이 닫혔는데 수업을 어떻게 하나.

“사전 녹화 강의나 스카이프 영상 통화로 한다. 나는 석사논문 심사와 박사과정 학생 지도를 맡고 있다. 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학부생은 1년, 대학원생은 6개월 영어만 집중적으로 배운 후에도 전 과목을 외국 교수가 100% 영어로 강의한다는 점이다. 평양과기대 학생들이 해외 유학에 지장 없을 정도로 영어를 잘한다. 최근 대면 수업할 교수가 필요해 김일성종합대와 김책공대 교수들을 파견받았는데, 대부분이 조선말로 강의했다. ‘영어 대면 수업을 못 받는다’고 학생들 불만이 크다.”

 

-서구와 연을 끊은 북한에서 학생들이 왜 영어 강의를 듣나.

“ ‘미제(美帝)를 그렇게 미워하면서 왜 영어를 배우냐’고 물으면 ‘영어는 국제어이지 미국어가 아니다’ ‘우린 미국 시민은 미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북한에선 (비핵화와 연계된) 개혁·개방이란 말을 싫어하지만 ‘국제화’는 좋아한다. 국제화의 핵심은 영어 아닌가. 유치원 아이들부터 영어 열풍이다. 가상현실을 만드는 과제를 줘봤더니 인터넷에서 찾은 미국 워싱턴 거리를 배경으로 흑인 소녀의 힙합 댄스를 만든 학생도 있었다.”

 

-서구 문물이 전파되는 평양과기대를 북한 당국이 유지하는 이유는.

“평양과기대는 북한이 원해서 만든 것이다. 주체사상에서 고등과학기술을 예외로 하고 ‘과학기술은 서구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정책이 김정일 때부터 이어지고 있다. 젊은이들 유학 보내려면 돈이 많이 들고 체제가 흔들릴 우려도 있으니, 아예 서양 교수진을 불러들인 것이다. 당국이 우리에게 ‘MIT와 UC버클리 등 미 명문 공대 커리큘럼을 가져와 가르쳐달라’고 요구할 정도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평양과기대 개교 당시인 2010년 입학생들이 기술영어를 듣는 모습, 2015년 첫 여학생 입학, 그리고 학생들이 북한 미 구글과 유튜브 등 해외 인터넷에 접속해 자료를 찾는 모습, 박찬모 명예총장이 학생들과 구내식당에서 식사하는 모습. /박찬모 총장 제공
 

북한의 과학·공학 인재 특별 대우는 유명한 이야기다. ‘과학자는 사상 문제 외엔 건드리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전 국민의 이공계 지식을 4년제 대학을 졸업한 공대생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전민 과학기술 인재화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주요 공대 교수와 연구원 등 핵심 인재에겐 집과 차를 주고 생필품도 싸게 사도록 해준다.

“한국의 과학고·영재고에 해당하는 제1고등중학교를 나와 명문대에 가면 남자는 10년, 여자는 6년씩 해야 하는 군 복무가 면제된다. 특히 평양과기대에 오면 영어 배우고, 국제학술대회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만나고, 영국·스웨덴·스위스·브라질·중국 등에 유학 가고, 외국 합작기업에 취직할 수도 있어 매우 선망한다. 부모들이 자녀에게 이 길을 열어주려고 난리다. 자식을 향한 마음, 교육열은 어디나 비슷하다.”

 

-세계 정세에 눈뜬 학생들이 북한 체제에 만족하는가.

“아이들이 중국 대도시만 다녀와도 달라지는 게 눈에 보인다. 태영호(의원) 가족이 영국에서 탈북할 때와 같은 생각 같은 게 왜 안 들겠나. 그러나 과학 인재 대우는 본국이 좋으니 ‘그래도 고국에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평양과기대 출신 대부분 북한 연구소와 대학에 정착하는 것으로 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피터 아그레 미국 듀크대 교수가 평양과기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해 학생들과 대화하는 모습. 북한에서 이례적인 이 국제학술대회는 코로나 팬데믹 직전인 2019년까지 격년으로 열렸다. /박찬모 총장 제공
 

박 총장에 따르면 평양과기대의 외국 교수들도 큰 통제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교내에서 예배를 보고, 구글·유튜브 등 미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하고, 해외 대학 전자도서관에서 학술 논문도 찾아봤다고 한다. 대학원생과 교직원들의 인터넷 접근도 이례적으로 보장돼 있다. 박 총장은 “이는 통제 가능한 소수의 학생들이 다니는 평양과기대에서나 가능한 일로, 수천 명이 다니는 큰 대학에선 못 한다”고 했다. 그는 북한에서 쓰던 휴대폰을 켜서 기자에게 보여줬다.

 

“교내 인터넷을 이용해 카카오톡으로 미국에 있는 아내와 수시로 통화했다. 북한을 나올 땐 촬영한 사진을 검열받는데, 그것도 카메라로 찍던 시절 이야기지, 카톡과 이메일로 사진 파일 전송해놓고 지워버리면 당국이 어쩌겠나. 2017년 3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재판이 있던 날 학교에 출근했더니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남조선은 대통령도 끌어내린다’며 술렁이더라. 정보의 흐름은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박찬모 평양과기대 명예총장이 북한에서 쓰던 휴대폰을 보여주고 있다. 2017년까지 동료 교직원들과 주고받은 메시지가 그대로 남아있다. 미국은 2017년 미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망을 계기로 미국인의 방북을 금지했으며, 미 국적자인 박 총장 등 미국 교수진도 이후 만 5년간 방북을 못 하고 원격 수업을 하고 있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북한이 대화형 인공지능(AI) 챗GPT 같은 IT(정보기술) 트렌드도 알고 있나.

“당연하다. AI나 클라우드 컴퓨팅, 자율주행 등 한국에서 하는 건 북한도 다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북한은 물자 부족으로 하드웨어가 달리니 지식으로 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에 사활을 건다. 소프트웨어 수준만 보면 북한은 선진국이다. 내가 북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1998년 일본에서 북한이 만든 바둑 프로그램 ‘은별바둑’을 접하면서다. 은별바둑은 당시 세계 컴퓨터 바둑대회에서 7년간 우승했다. 북한은 수학적 사고가 강하다. 초등학교 수학 시간만 한국의 2배쯤 된다.”

 

-북한에 과학 지식을 어디까지 전수할 수 있나. 사이버 해킹이나 핵무기 개발에 전용될 수 있는 기술과 물자는 유엔과 미국이 철저히 유입을 막는데.

“우린 군사적으로 악용될 수 있는 건 가르치지 않았다. 가상현실과 프로그래밍 등 경제 발전에 도움 될 것만 가르쳤다. 해킹은 나도 할 줄 모른다. 평양과기대엔 농업생명과학·국제금융경영학·전자컴퓨터공학·의대·치대가 있지만, 원자핵공학과는 없다. 미 상무부가 북한 학생들에게 어떤 걸 가르쳐도 되고 어떤 건 안 되는지 적은 방대한 가이드라인이 있다.”

 

-해킹 기술이 모르는 새 전수됐을 가능성은.

“해킹은 별도 루트에서 10대 때부터 교육하는 것으로 안다. 평양 금성학원, 군 직속 미림학교 같은 곳이다. 2017년 이후 우리가 평양에 못 가게 되면서 다른 나라 교수들이 뭘 하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이탈리아 교수 한 명이 ‘수업 중 블록체인 기술을 소개했다’고 하기에, 내가 ‘그거 가상화폐 탈취와 직결될 수 있는데 왜 가르쳤느냐’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북한 국경이 닫히면서 평양과기대의 수업도 원격으로 이뤄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의 교수들이 평양의 대학원생과 박사 후보생 등을 스카이프 영상통화로 지도하는 모습. /박찬모 총장 제공
 

‘북한을 옳은 방식으로 국제사회로 끌어내려면 미국이 주도해야 한다’는 게 박 총장 생각이다. 과학은 그나마 정치색이 옅은 분야이고, 북한도 이 분야에 목말라하는 만큼 교류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 과학기술은 결국 세습 독재를 떠받치는 수단 아닌가”라고 묻자 그는 “미·소 냉전 시대에도 우주정거장 등 과학기술에선 경쟁과 협력을 병행했다. 동·서독도 그렇게 교류했다”며 “이 상태로 통일이 닥치면 엄청난 혼란이 올 것”이라고 했다. 문화·지적 격차를 최소화해야 통일에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북한 학생을 다 가르쳐보니 어떻게 다른가.

“열성만으론 서울 명문대생들이 북한 학생들 못 당할 것이다. 한국은 올라갈수록 나태해지는 게 있다. 평양과기대생들은 ‘교수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하겠다’고 한다. 교수가 들을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말이다.”

-요즘 한국에선 이공계 인재의 의대 쏠림 현상이 심각하다.

“과학 인재를 우대했던 박정희 정부 때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포항공대 명예교수들도 단톡방에서 그 문제로 개탄하더라. 돈 잘 번다는 이유로 의대 가려는 학생들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AI가 진단부터 수술까지 하는 시대엔 의사가 할 일이 줄어들 수 있다.”

지난 2015년 한국에 온 평양과학기술대 교수들. 이들은 평양에서 이틀간 중국을 거쳐 서울에 왔다. 왼쪽부터 브루어 웨슬리 전자컴퓨터공학대학장, 박찬모 명예총장, 에인젠바스 스티븐 전자컴퓨터공학대 교수. 모두 미국시민이다. /조선일보 DB
 

-박 총장을 친북 인사로 의심하는 시선도 있다.

“북한 주민들하고 친하니 친북이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나는 6·25 때 중공군 치하에서 며칠을 굶고 죽도록 고생한 사람이다. 이명박 대선 후보를 도왔고 청와대에서 일했다. 이런 내가 무슨 종북을 하겠나. 경기고 동창들이 나더러 ‘너 빨갱이냐’고 하던데, 진짜 빨갱이는 북한에 가보지도 않고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사람들이지.”

 

-평양만 오갔으면 굶어 죽는 주민은 본 적 없을 텐데.

“황해도 오지 등에서 밥 굶는 사람들 봤다. 파리가 까맣게 달려든 옥수수도 없어서 못 먹더라. 지금 금강산이 어찌 된지 아나. 중국 관광객이 몰려들어 엉망이 됐다.”

 

-북한 주민들은 한국의 친북 정치인들을 어떻게 보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김정일하고 같이 받아야 할 노벨상을 혼자 받았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북한도 국제사회 인정을 받고 싶은데 한국이 가로챘다는 것이다. 북한과 정치적 거래를 할 때는 꼭 이룰 수 있는 것만 약속해야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좀 불만이 있는 것 같더라.”

 

-문 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건넨 USB에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들어 있던 것인가.

“그런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는 바 없다.”

 

☞박찬모

1935년 충남 천안 출생. 경기고와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메릴랜드대에서 화학공학과 컴퓨터공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메릴랜드대와 아메리칸가톨릭대, 카이스트(KAIST)와 포항공대 교수, 포항공대 총장을 역임했다. 201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 공동선대위원장과 청와대 과학기술특보를 지냈고, 학술연구 통합 지원 기관인 한국연구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국민훈장 동백장,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미국 국적자로서 2010년부터 북한 평양과학기술대 명예총장으로 평양과 미국을 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