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그 과부 암사자에겐 왜 갈기가 돋았나

해암도 2022. 11. 9. 20:01

[수요동물원] 

2년전 짝 잃은 암사자, 수컷처럼 갈기 돋기 시작
’친자매 보호하려 수컷 호르몬 분비’ 관측도
야생서도 갈기성성한 암사자 존재 확인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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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남부 캔자스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환타지 소설 중의 하나인 ‘오즈의 마법사’의 배경이라는 점 때문에 마법과 환상의 동네라는 인상이 강한 곳입니다. 실제로 캔자스의 작은 시골 마을 와메고에 있는 오즈 박물관에는 매년 이곳에서 마법의 기운을 느끼려는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지요. 그런데 자연의 이치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마법 같은 장면이 캔자스주 토피카 동물원의 사자우리에서 벌어졌습니다. 지역 신문 캐피털 저널이 지난 10월 22일 게재한 기사 내용을 소개합니다.

최근 갈기가 돋기 시작한 토피카 동물원의 18살 암사자 주리. 18살은 사람 나이로 치면 거의 80살 전후에 해당하는 노령이다. /Evert Nelson. The Capital-Journal.

 

주인공은 올해 18살로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든 암사자 ‘주리’입니다. 우아하고 기품있으며 대담하기까지 한 멋진 암사자입니다. 쌍둥이 친자매 아산테와 함께 두살때였던 2005년 텍사스 포트워스 동물원에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황갈색 털을 휘날리며 어슬렁대며 사육사들이 준비한 고기를 받아먹고, 가끔씩 우렁차게 그르렁거리는, 평범한 일상을 살았습니다. 평생의 반려자였던 동갑내기 숫사자 ‘애버스’와의 사별하기 전까지 말이죠.

암사자 주리-아산테 자매의 파트너로 동고동락했던 동갑내기 숫사자 애버스. 2020년 10월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다. /The Capital-Journal

 

애버스는 주리보다 한 해 늦은 2006년 위스콘신주 매디슨에서 이곳 토피카로 전입왔습니다. 애버스는 여느 숫사자보다도 갈기가 성성했습니다. 식스팩 근육으로 무장한 몸짱 사람에 비할만합니다. 갈기는 남성미, 아니 수컷미의 상징이거든요. 다른 수컷들과 세력 다툼을 할 때, 혹은 떼로 덤벼드는 하이에나나 표범을 상대할 때 얼굴에 가하는 치명적 공격을 막아주는 방어선 역할을 합니다. 또한 짝을 짓을 때 덥수룩한 갈기는 상대방을 향한 매력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해줍니다.

짝을 잃은지 2년 뒤 갈기가 돋기 시작한 18세 암사자 주리. 여느 수컷의 갈기와 달리 밝은 노란색을 하고 있다. /Evert Nelson. The Capital-Journal

 

비록 광활한 아프리카의 그것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만의 소박한 프라이드(pride·사자들의 무리)를 꾸렸습니다. 애버스는 친자매지간인 주리와 아산테 모두를 파트너로 맞아들였습니다. 애버스의 씨를 받은 아산테가 암사자 ‘아디아’를 낳았고, 이 아디아가 다시 새끼를 낳으면서 프라이드의 혈통은 근근히 이어지고 있지요.생물은 태어나면 성장하고, 정점을 지나면 사그러듭니다. 두 마리의 암사자와 금슬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스태미너를 과시하던 갈기 성성한 숫사자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 갈기가 돋기 시작한 토피카 동물원의 암사자 주리가 성큼성큼 걷고 있다. /Evert Nelson. The Capital-Journal.

 

부쩍 쇠약해지고 잔병치레가 심한 애버스는 2020년 10월 동물원의 판단으로 안락사됐습니다. 같은 파트너를 공유하며 함께 나이든 암사자들도 서로를 의지하며 여생을 살아가야 할 처지가 됐습니다. 그런데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리에게 갈기가 돋기 시작한 것입니다. 반려자 ‘애버스’가 안락사된지 2주기를 맞아 시작된 변화입니다. 맹숭맹숭했던 머리 뒤편으로 갈기가 돋기 시작한 겁니다. 듬성듬성하고 삐죽삐죽하긴 해도 그것을 ‘갈기’외의 다른 말로 표현할 방법은 없어보였습니다.

토피카 동물원의 암사자 주리와 아산테. 원래 친자매지만, 주리가 최근 갈기가 돋게 되면서 마치 암수 한쌍 커플 처럼 보인다. /토피카 동물원 인스타그램

 

여느 숫사자들의 거무튀튀하고 덥수룩한 갈기와는 달리 암사자 주리의 갈기는 얼굴 색깔보다 밝고 화사한 옅은 노란색입니다. 금발같기도 해요. 오즈의 마법사 주인공 도로시가 모험을 떠나며 걷던 그 노란색 벽돌길처럼 말이죠. 동물원은 경악했습니다. 주리의 갈기를 처음 발견한 사육사 섀너 심슨은 “이제 어른으로 자라나는10대 소년 숫사자 같다”고 발견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생의 황혼녘에 서 있는 이 암사자는 왜 갑자기 갈기가 돋은 것일까요? 한 때 뜨거운 열정을 불살랐던 파트너가 빙의된 것일까요? 늙고 병든 동물을 ‘인도적 차원에서 어렵게 내린 결정’이라는 상투적 문구를 앞세워 안락사 시키는 동물원의 조치에 대한 무언의 항의일까요?

 
최근 갈기가 돋는 신체변화를 겪기 전 주리와 아산테. 평범한 암사자들의 모습이다. /토피카 동물원 인스타그램

 

여러 가정 중에 그럴법하게 제시된 것은 ‘자매애’입니다. 세마리로 꾸려졌던 소박한 프라이드의 구성원이 자매 암사자만 남게 된뒤, 남은 쌍둥이 자매 ‘아산테’를 지켜줘야겠다는 보호본능이 강렬하게 발산되면서 이례적으로 테스토스테론(남성 또는 수컷 호르몬)의 발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설이 제기됐습니다.

 

그 곡절은 아직 미궁에 빠져있습니다. 다만 이번 일을 계기로 ‘갈기돋은 암사자’의 사례가 일어날 수 없는 일만은 아니라는 점이 조명되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캔자스주와 멀지 않은 오클라호마의 오클라호마시티 동물원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1년여간 각종 질병을 앓다가 2017년 안락사된 암사자 ‘브리지트’입니다. 그런데 브리지트의 경우 비교적 신체 상태가 건강했지만, 갑자기 갈기가 돋으면서 몸 상태가 나빠져 결국 안락사에 이르렀어요. 갈기를 돋게 한 신체변화가 몸 상태를 전반적으로 악화시킨게 아닌지 의심해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갈기돋은 암사자의 존재는 야생에서도 확인됐다.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암수 커플이 나란히 걷고 있다. 둘다 수컷같지만, 왜소한 몸집을 한 사자는 암사자다. /Simon Dures Twitter

 

대표적인 동물의 왕국인 보츠와나의 오카방고 삼각주에서는 ‘갈기 돋은 암사자’의 존재가 집단으로 확인됐습니다. 2016년 영국 서섹스대의 제프리 길필런 연구팀은 2년간 진행된 현지 연구조사에서 34마리의 사자 무리 중에서 최소 다섯마리의 갈기돋은 암사자의 존재를 확인했습니다. 머리에는 덥수룩한 갈기가 돋아있었지만, 꼬리와 엉덩이 사이에 확연히 생식기가 돌출돼있는 수컷과 뚜렷하게 구분됐고 덩치도 왜소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갈기만 돋은 것이 아니라 여느 수컷들처럼 낮은 울음소리로 그르렁대기도 하고, 자신들의 냄새를 묻혀 세력권을 과시하는가 하면, 갈기가 없는 다른 암컷의 위에 올라타서 마치 사랑을 나누는 듯한 모습도 연출했다고 합니다. 반면, 보통의 숫사자들과 이성으로 어울리기도 했다고 연구진은 전했습니다. 모종의 환경변화가 이들의 호르몬 분비를 이끌어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입니다.

보츠와나 현지 연구팀에 의해 확인된 갈기돋은 야생의 암사자. 꼬리 아래 생식기관이 없는 등 암컷임을 알 수 있다. /Simon Dures Twitter

 

사자는 맹수 중에서 의인화 캐릭터가 유독 두드러진 짐승입니다. 그건 수컷과 암컷의 외모가 뚜렷하게 두드러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러 암컷을 거느리는 일부다처제, 프라이드를 지켜내기 위한 협력과 투쟁, 그리고 배신의 스토리. 프라이드의 우두머리를 쫓아내고 반란에 성공한 수컷은 적의 씨를 받아 태어난 새끼를 모조리 죽여버리고 마는 잔혹한 습성 등이 인간의 권력투쟁과 흡사한 측면이 많거든요. 여기에 최근 ‘암’과 ‘수’의 성별 구분을 모호하게 하며 등장하는 새로운 스토리는, 이 백수의 왕의 살아가는 모습이 생각 이상으로 다채로울 수 있겠다는 짐작을 하게 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