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1650년 무렵, 동남아시아 정글엔 적색야계(red jungle fowl)라 불리는 야생닭이 살았습니다. 아열대 우림에 사는 동물답게 화려한 깃털 색을 자랑했죠. 불그죽죽한 볏이 머리를 감쌌고 노란빛, 초록빛, 갈색빛이 어우러진 깃털엔 윤기가 돌았습니다. 이즈음 이 야생닭은 우연히 인간과 접촉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때만 해도 이 새는 몰랐을 겁니다. 자신의 후손이 평균 수명 ‘한 달 반’밖에 안 되는 지구 최대 규모의 동물 집단이 된다는 사실을요.
이 병아리도 언젠가 사람에게 먹힐 것이다. 하지만 닭이 처음부터 인간의 ‘도시락’과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이렇게 인류가 대량으로 닭을 섭취하게 된 건 역사에서 극히 최근의 일이다. 사진은 2021년 3월 31일 아프가니스탄의 한 양계장. 사진 신화=연합뉴스
동남아에 살던 적색야계(학명 Gallus gallus)는 신석기 시대의 어느 날 인간과 어울려 살기 시작했다. 인간은 그때부터 닭을 보고 맛있는 먹을 거리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처음 밝혀진 ‘치킨의 기원’
2013년 9월 영국 예술 및 인문학연구위원회는 ‘닭과 인간의 상호 교류’을 연구하는 과학자에게 40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합니다. 사실 소나 돼지와 비교하면, 닭의 가축화 경로에 대해선 당시 연구된 게 많지 않았거든요.
닭은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소비하는 육류다. 하지만 닭과 인간이 관계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대부분 인류 역사에서 닭은 초자연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 때문에 추앙 받는 존재였다. 사진은 2019년 6월 9일 독일에서 열린 닭 흉내 경연대회에 참여한 사람들. 사진 DPA=연합뉴스
물론 영국 납세자 연맹 같은 단체에서 “이런 새대가리 같은 아이디어(실제 워딩입니다)에 세금 낭비하지 말라”고 비판했지만, 연구 지원금은 무사히 전달됐습니다.
그리고 9년이 흘렀습니다. 치킨 역사상 가장 큰 스케일의 연구가 지난 6월 마무리됐습니다. 그레거 라슨 영국 옥스퍼드대 고유전학ㆍ생물고고학 연구네트워크 디렉터가 연구를 이끌었고, 영국과 유럽 과학자 다수가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우선 세계 89개국 600개가 넘는 선사시대 유적지를 뒤져 언제 어디서 가축화된 닭이 나타났는지 조사했습니다.
사실 이 연구 전까진 치킨의 기원에 대해 기술한 연구 자료가 적었습니다. 그나마 1988년 영국국립역사박물관의 바바라 웨스트 박사와 중국사회과학원의 저우벤슌 박사가 쓴 논문 한 편이 치킨계의 전설과 같은 논문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이 논문의 주장에 따르면, 적색야계는 기원전 6000년 동남아에서 가축화한 후, 북쪽 중국으로 전해졌다고 합니다. 이후 기원전 300년에서 기원후 300년 사이에 한국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인도에선 기원전 2000년쯤 들어왔고, 철기 시대에 유럽으로 보급됐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논문이 제시한 ‘고고학적 증거’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후대 연구자들도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치킨의 기원을 추적하는 일은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차 라슨 박사 등 영국 과학자들이 나선 것이죠. 이들은 세계 곳곳 유적지에서 나온 닭 뼈 화석을 모두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했습니다. 고대 문헌에 기록된 닭의 흔적과 그림ㆍ조각ㆍ벽화를 샅샅이 훑으며 교차 검증을 했죠.
그랬더니 닭 뼈 화석 대부분의 연대 기록에 큰 오류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5500년 전 닭 뼈라고 기록된 자료가 알고 보니 20세기 것이었고, 다른 새의 뼈를 닭 뼈라고 기록한 자료도 있었죠.
이번 연구 과정에서 나온 무수한 오류들. 세계 여러 유적지에서 발굴한 닭뼈에 대한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다. 왼쪽 유적지 옆에 쓰인 것이 닭 뼈에 기록된 추정 날짜이고, 오른쪽이 검사 결과. 기원전에 나온 것으로 기록된 닭 뼈가 극히 최근인 경우도 있었다. 사진 Larson et al, Antiguity, 2022
무수한 보정, 재증명과 검증을 거치며 10년 가까운 노력 끝에 연구진은 지구 상 한 곳을 가축화된 닭의 기원지로 지목했습니다. 닭 뼈 화석 중 가장 오래된 녀석이 발견된 곳이죠.
태국 중부에 있는 반논왓이라는 지역입니다. 이곳의 닭 뼈는 기원전 1650~1250년에 나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원전 6000년이라는 기록보다 훨씬 최근의 일이죠. 물론 이후 추가로 닭 화석이 다른 곳에서 발견되면 이 기원도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닭은 동남아에서 가축화됐을까요.
치킨 연구자들이 내세우는 유력한 가설은 이렇습니다. 일단 가축화된 닭의 조상인 적색야계가 동남아 지역에 분포해 살고 있었습니다. 목청이 크고 색깔이 수려한 이 새는 정글에 숨어 살았죠.
그러다 신석기 시대 농업 혁명이 시작되면서 인간들이 대규모 농사를 짓기 시작합니다. 당시 반논왓에서도 쌀과 기장 농사가 지어졌죠.
농사를 지은 밭에는 추수 뒤 씨알 굵은 알곡이 흩뿌려져 있었습니다. 야생닭은 알곡을 주워 먹으려고 정글에서 나왔던 것이죠. 그러면서 인간과 교류가 시작됐고, 닭이 인간의 생활 속에 스며들었다는 겁니다.
가축화된 닭이 처음 등장한 시기. 연구진이 가장 보수적으로 잡은 날짜다. 태국 반논왓에선 지금으로부터 3650년 전에서 3200년 전 사이에 가축화한 닭이 등장한 것으로 나온다. 이 표에는 3200으로 표시돼 있다. 닭의 등장 시기를 살피면 닭이 바다를 건너 점점 유럽으로 퍼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진 Larson et al, PNAS, 2022
이 가설의 근거로 연구자들은 쌀농사의 전파 경로를 듭니다. 쌀농사가 중국 남부에서 시작돼 세계로 퍼져나간 추이와 닭의 전파 경로가 거의 흡사하다는 것이죠. 라슨 박사는 “여러 데이터 오류를 제거하고 보면 닭의 전파와 쌀의 전파는 매우 닮았다”며 “닭이 인간과 어울려 살게 된 이유가 인간의 신석기 농업 혁명 그리고 이 양식이 퍼져나가는 경로와 닮았다는 건 매우 흥미로운 메커니즘”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럽으로 간 닭, 처음엔 외계인 취급 받았다
신석기에서 청동기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배를 타고 물건을 사고팔았습니다. 먼 지역까지 교류한 것이죠.
닭도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넓은 대양을 건넜습니다. 동남아에서 가축화된 닭은 그로부터 500년쯤 뒤부터 유럽으로 퍼집니다. 1000년쯤 흐르면 영국과 북유럽까지 퍼지죠.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유럽을 향한 닭의 기분이 어땠을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본 유럽인의 반응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라슨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 유럽엔 깃털이 화려한 새가 없었다. 대부분 갈색의 새뿐이었다. 그런데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의 닭을 보면 어떨까. 그 새가 그리고 100만 킬로미터는 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곳에서 왔다면? 아마 외계인을 보는 듯했을 것이다”
유럽 사람들은 닭에게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당시 유럽에선 더 먼 곳에서 온 것일수록 신비로운 힘이 더 크다고 생각했죠. 당시 유적을 살펴보면 닭이 사람과 같이 묻힌 무덤도 발견됩니다. 부러진 닭의 다리를 고이 고쳐준 흔적도 발견되죠.
유럽에서 처음 닭을 본 사람들은 닭에게서 초자연적인 힘과 신비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죽은 닭을 장사지내기도 하고(사진 B), 인간이 죽으면 함께 묻기도 했다(사진 C, 원 안이 닭 뼈). 사진 Larson et al, Antiguity, 2022
닭이 경외심을 부른 존재였다는 증거는 중세 유럽에서도 발견됩니다. 가톨릭 교회의 첨탑에 붙은 닭 형상이죠. 라슨 박사는 “성경을 보면 예수의 부활과 닭 울음소리를 함께 언급한다. 그만큼 닭을 신성과 가까운 존재로 여겼다는 것이다. 여러 주화에 닭을 새겨넣은 것도 닭을 경외했다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닭이 처음 전래한 곳에선 먹을 엄두를 못 냈다고 합니다. 닭이 들어오고 500년은 지나야 사람들은 닭을 먹기 시작했다고 라슨 박사는 말합니다. 그는 “닭은 외계인 같은 존재였다. 아주 먼 곳에서 온, 본 적도 없는 새니까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봤을 것이다. 외계인이 도착했는데, 그걸 바로 먹지는 않지 않을까”라고 했죠.
유럽 성당 첨탑엔 닭 형상이 세워진 경우가 많다. 예로부터 닭을 상서로운 동물로 여긴 데서 유래했다. 닭의 울음소리는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진 Historic Ipswich
브리타니아(현재의 영국) 같은 곳에서는 닭이 처음 들어온 뒤 먹는 데까지 700~800년이 걸렸습니다. 시저는 갈리아 전기에서 “브리튼 인은 산토끼, 닭, 거위를 안 먹는다. 신의 법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한다”고 기록하기도 했죠. 당시 시저의 로마인들은 닭도 훨씬 먼저 들여와서 이미 닭을 먹기도 했습니다.
아마 닭은 유럽 거리를 지금의 비둘기나 고양이가 돌아다니듯 돌아다녔을 겁니다. 사람과 어울려 살며 사람이 남긴 먹이를 주워 먹는 동물들처럼 말이죠.
닭을 ‘벌크업’ 시킨 전쟁
닭은 인류와 함께한 3650년 역사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3600년쯤은 삐쩍 마른 동물이었습니다. 키워봤자 먹을 게 없으니 대량으로 사육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유럽 전역이 식량난에 시달립니다. 전쟁이 끝나고 초토화된 유럽엔 먹을 것이 크게 부족했죠. 미국 사람들은 친절하게도 유럽에 소고기, 돼지고기를 비롯한 식량을 수출합니다.
그러니 미국에서도 먹을 고기가 크게 모자랐죠. 이때 생각한 아이디어가 닭을 먹자는 것이었습니다. 그전까지 닭은 소나 돼지를 못 먹는 빈민들이 근근이 키워 잡아먹는 존재였죠.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과 1947년 미국에서 전국적인 행사가 열립니다. 타이틀은 ‘내일의 치킨(Chicken of Tomorrow)’. 세계 최고의 치킨을 뽑는 대회였죠. 전국에서 닭 좀 친다는 사람들은 다 몰려들었습니다.
우수한 닭은 ‘내일의 치킨’ 위원회가 준 상을 받기도 했다. 이때 상을 받은 닭들이 개량에 개량을 거듭해 지금 세계인들이 즐겨 먹는 품종이 됐다. 사진 내일의 치킨 위원회
이렇게 1940년대의 닭들은 보통 살집이 없었다. 요즘 육계와 비교하면 비쩍 말랐다. 사진 내일의 치킨 위원회
러시아 옥차브리스카야 양계장에서 나온 육계. 위 사진의 1940년대 닭과 비교하면 크기 차이가 확연하다. 사진 타스=연합뉴스
어떤 닭이 생김새가 아름답고, 어떤 닭이 먹음직스러운지를 겨뤘죠. 이때 출품된 닭 품종은 미국뿐 아니라 유럽까지 공급되면서 세계를 휩쓸게 됩니다. 코브, 아버 에이커스, 인디언 리버, 피터슨, 로스 등 사실 우리가 먹는 육계 품종은 다 이때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50년간 이뤄진 닭의 품종 개량으로 말라깽이 닭은 엄청난 덩치를 갖게 됐다. 생후 56일 된 닭이 1957년엔 905g이었지만, 2005년엔 4202g으로 성장했다. 50㎏짜리 사람이 개량을 통해 232㎏이 된 셈이다. 사진 Zuidhof et al., Poultry Science, 2014
닭 품종 개량은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57년엔 두 달 쯤 키운 영계가 1㎏이 안 됐지만, 2005년엔 4㎏이 넘는 엄청난 양적 개량이 이뤄집니다. 그러면서 닭은 세계 최고의 육류로 등극합니다. 2015년부터는 가금류의 생산량이 소와 돼지를 앞서게 됩니다.
육류별 생산량 추이. 자료 UN식량농업기구
3650년 전 쌀밭에 남은 낟알을 주워 먹으려고 인간을 처음 찾아온 닭은 이제 인류의 최대 단백질 공급원이 됐습니다. 한때 추앙받기까지 했던 닭은 현대 사회에선 그저 먹을거리에 불과합니다. 한 해 대략 700억 마리가 도축되죠.
닭은 먹이에 이끌려 인간과 교류하면서 한때는 경외와 축복의 대상으로 추앙받다가 이제는 먹힐 운명으로 태어나는 기구한 신세가 됐습니다. 지구 상 그 어떤 동물의 역사보다 드라마틱합니다.
그레거 라슨 교수
그레거 라슨 박사는 옥스퍼드대 고고학과 교수입니다. 진화생물학적 지식과 고고학 발굴조사로 다양한 동물이 어떻게 인간과 더불어 살아왔는지를 연구해왔습니다. 그는 특히 개와 돼지, 닭이 인간과 교류한 역사를 추적해 왔습니다. 개와 돼지가 동서양의 각각 다른 곳에서 따로 가축화됐다는 연구 결과를 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죠. 지난 10년 닭의 기원을 추적한 그를 지난 9일 화상으로 인터뷰했습니다.
이정봉 기자 mole@joongang.co.kr, 영상=정수경 PD, 이가진, 박지은 인턴 중앙일보 입력 202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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