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에 맞서다 사형선고 받기도
“스무 살이던 4·19 시절부터 가르침과 깨우침을 줬던 사상이 민세(民世) 안재홍의 중용(中庸)이었다. 내가 평생 걸어온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서 큰 힘이 된다.”
8일 별세한 시인 김지하(81·본명 김영일)는 지난 2011년 민세상 사회통합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직후 본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민세상은 일제 강점기와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민족운동가·언론인·역사학자로서 민족 통합을 실천했던 안재홍(1891~1965) 선생을 기리는 상이다.
전립선암 등으로 투병하던 시인이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생전 고백처럼 그의 80여 년 삶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역설적으로 ‘중용’이었다.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청년 김지하는 학부 시절부터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64년 한일 회담 반대 투쟁에 나섰다가 4개월간 복역한 것이 시작이었다.
1970년에는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과 장성(將星),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대서 부정부패와 비리를 질타하는 저항시 ‘오적(五賊)’으로 다시 필화를 겪었다. 당시 시인이 풍자적 의미로 썼던 ‘오적’은 지금도 사회적 병폐를 풍자하는 상징적 언어가 되고 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가 1980년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다. 그의 미학과 8년 후배인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굴곡진 삶 중에서 시인과 민주화 운동 투사로서의 업적뿐 아니라 ‘민족 예술 1세대 대부’로서의 역할도 컸다. 특히 1960년대 서울대 문리대에서 시인이 길러낸 후배들이 ‘김지하 사단’이 되어 미학·예술 분야의 중추가 됐다”고 말했다.
투옥을 거듭하는 중에도 시인의 절창(絕唱)은 대학가와 저항 세력 사이에서 시와 노래로 은밀하지만 지속적으로 불려나갔다. 그의 시에 곡조를 붙인 ‘타는 목마름으로’와 ‘새’ 같은 민중 가요가 대표적이다. 1975년 옥중에서 ‘제3세계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의 ‘로터스’ 특별상을 받았다. 당시 수상을 계기로 그의 석방 여부가 국제사회의 인권 문제로 떠올랐다.
역설적으로 그가 유불선(儒佛仙)과 동학 사상, 생명론에 경도되기 시작한 것도 투옥 시절이었다. 1980년대 들어서 시인은 본격적으로 생명 사상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1991년 일부 학생 운동권이 반독재 투쟁을 이유로 분신이라는 극단적 방식을 택하자,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조선일보 칼럼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시인은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면서 생명을 경시하는 투쟁 방식을 정면 비판했다.
일부 세력은 그를 ‘변절자’와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시인은 그의 구명운동이 계기가 되어 출범한 민족문학작가회의로부터 제명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인은 “나는 작가회의에 아예 가입한 적이 없다”고 받아쳤다. 훗날 “박정희 독재 시절에는 민주화 운동으로 7년이나 수형 생활을 했고, 좌파 진영이 극단적이던 시절에는 그들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좌우로부터 지독한 비판을 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시인이 중용의 길을 걷고 있다는 방증”(김진현 민세안재홍선생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이라는 재평가를 받았다. 2018년 본지 인터뷰에서 시인은 “나는 우파도 좌파도 아니오. 중간파도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걸 내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토지’의 소설가 박경리(1926~2008)의 외동딸인 김영주(1946~2019) 전 토지문화재단 이사장과 1973년 4월 결혼했다. 유족으로는 장남 김원보(작가)씨와 차남 세희(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학관 관장)씨가 있다.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김성현 기자 조선일보 입력 2022.05.08
김훈 “김지하는 암흑시대를 밝힌 촛불 하나”
이문열 “한때 헹가래 받았다가 떨어져 냉담한 대접받는 사람 돼”
유홍준 “민족 예술 1세대의 대부”
정과리 “詩로 현실문제 적극 대응”
김지하 시인의 갑작스러운 부고에 문단 및 문화계 인사들은 큰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들에게 김지하는 촛불이었고, 민족 예술 1세대의 대선배였으며, 한편으로 인간 생명을 재해석한 시인이자 철학자였다. 시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문화계 인사 4인의 육성(肉聲)을 싣는다.
●이문열(소설가)
젊은 시절 내 소설 ‘황제를 위하여’를 읽고서 보자고 해 만났다. 그때 난초 한 포기를 그려준 것이 첫 만남이었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자꾸 나보고 내가 죽기를 바라는가보다, 왜 죽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거 같다”면서 그는 괴로워했다. ‘한때 헹가래를 받으며 솟구쳤다가 다시 떨어져 냉담한 대접을 받는 사람 기분이 이렇겠구나’ 생각했다. 2005년 독일에서 만났을 때 여러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게 마지막이다. 쓸쓸하고 슬프다.
●김훈(소설가)
암흑시대에 촛불 하나가 살아서 감옥에서 깜빡이고 있었다. 솔 출판사 김지하 전집에 연보가 자세히 나와 있다. 김지하가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무진기행’의 김승옥 선생이 “나는 김지하와 서울대를 같이 나왔는데 이 사람은 빨갱이 아니다”라고 증언을 했다. 김승옥 선생, 선우휘 선생이 그분을 위해 탄원서를 참 많이 썼다. 말년에는 내면에 너무 몰두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후배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많이 했다.
●유홍준(전 문화재청장)
시인, 민주화 운동 투사로서의 업적도 크지만 ‘민족 민중 예술 1세대의 대부’로서 우리 문화사에 큰 업적을 남긴 분이다. 1960년대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을 중심으로 민족 예술을 이끌 후배들을 길렀다. 당시 교유한 이애주, 임진택, 김민기, 오윤, 김영동 등 소위 ‘김지하 사단’이 춤, 연극, 미술, 국악 등 각 예술 분야에서 김지하 미학의 각론을 폈다.
●정과리(문학평론가)
저항 반독재투쟁 선봉에 섰던 분이다. 투쟁의 방식을 시를 통해 했고, 시가 바로 현실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분이다. 동시에 후배들에게는 천진하면서 허심탄회했고, 달변이었다. 말년에는 적막하고 외로운 심상이 시에 그대로 드러났다. ‘민족시인’으로 축소되기엔 생명주의라는 강한 선이 그분의 시에 있었다. 그걸 온전히 밝혀 재평가하는 것이 한국 시문학의 중요한 관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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