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바티칸이 정순택 신임 대주교에게 ‘서울’을 맡긴 이유는…
⊙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시절 ‘신바람 나는 司牧’으로 평신도 참여 끌어내
⊙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겨
⊙ 1989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 준비하며 ‘한마음 한몸’ 운동… 국민 참여운동으로
⊙ 정의구현사제단에서 활동하며 서빙고 끌려가 고문당해
吳泰淳
1939년생. 가톨릭 신학대학 졸업 / 오류동·면목동·천호동·한강·신당동·역삼동·연신대본당 성당 주임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한마음 한몸’ 본부장 역임
원로(元老)가 귀한 우리 시대, 한국천주교 서울대교구 원로 사제인 오태순(吳泰淳·82) 신부를 만났다. 1969년 서품(敍品)을 받은 후 은퇴할 때까지 가파른 가톨릭 교세의 성장을 가까이에서 체험한 인물이다.
별명이 ‘작은 거인’ ‘오뚝이’ ‘불도저’. 키는 작지만 교회의 굵직한 일을 척척 이뤄냈다는 평가다.
염수정(廉洙政·78) 추기경과 정진석(鄭鎭奭·1931~2021년) 추기경이 “오태순 신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사업(1831~1981년), 1984년 한국천주교 200주년 행사,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성공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1970~80년대 그는 가톨릭 대학생회 지도신부로 경찰에 연행되는 학생들을 보호하는 입장에 서야 했고, 초창기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성에 관여한 일도 있다. 1980년 5·18 광주항쟁 당시 서빙고 보안사에 강제 연행돼 40일 동안 갇혔다가 법정에서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일부 사제가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상황이 되자 미련 없이 ‘정구사’를 떠났다. “예수님도 누구를 정치적으로 지지는 안 하셨기” 때문이다.
기자는 2021년 12월 4일 서울 연희동에서 오 신부를 만났다. 달변가답게 이야기가 막힘 없이 쏟아졌다. 기자는 그분 말씀에 깊이 빠져들었다.
“평신도들의 열기를 꺾지 마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
염수정 추기경(왼쪽)이 2021년 10월 28일 저녁 명동대성당에서 후임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된 정순택 대주교와 손을 맞잡고 있다. 사진=가톨릭 평화신문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1년 10월 28일 정순택(鄭淳澤·60) 베드로 주교를 차기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겸 평양교구 교구장 서리로 임명했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정순택 대주교는 가르멜회 출신 수도자다. 말하자면 서울대교구 출신이 아니다. 사제서품도 신학대학이 아닌 가르멜회 인천수도원에서 받았다. 서울 본당 사목을 맡은 적이 없으니 서울대교구 사제들로선 한솥밥 먹던 ‘우리 식구’가 아니다. 권좌의 교회 장상(長上)들과도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파격 인사라는 말이 나온다. 한국 천주교회를 바라보는 로마 바티칸의 시각을 느낄 수 있다.
― 로마가 수도회 출신을 교구장으로 임명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서울대교구의 변화와 혁신을 바라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말은 기존 장상들에게서는 변화와 혁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들린다.
“2014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訪韓)하셨을 때 ‘서울교구에 영적(靈的) 열정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셨다고 합니다. 이듬해 한국주교단들이 로마에 답방 갔을 때도 교황은 ‘한국 평신도들의 열기를 꺾지 마십시오’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교회가 평신도의 열기를 꺾어왔다는 얘기다.
“교황이 덧붙여 ‘한국 평신도들의 에너지는 다른 나라와 다르다’고 하셨어요.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이승훈(李承薰·1756~1801년)이 1784년 중국에 가서 세례를 받고 조선에 신부를 보내 달라고 교황청에 이야기하였지요. 파리 외방전교회 벽안(碧眼)의 신부님들이 조선에서 기꺼이 순교할 때 수많은 평신도가 따르면서 한국교회의 역사를 이뤘던 겁니다.”
로마의 정보 수집력이 FBI보다 낫다?
오 신부는 “정순택 대주교는 교구장 될 여건이 아닌데도 로마가 임명했다는 뜻은, 뒤집어 생각하면 교구 사정을 몰라야 눈치를 안 보고 일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부연 설명했다.
― 바티칸에서 한국교회를 깊이 들여다본다는 거네요.
“로마가 2000년 동안 교회를 이끌었기 때문에 나름 정보 수집이 FBI보다 훨씬 낫다고 하잖아요? 변화와 혁신의 핵이 서울(대)교구잖아요. 그래야 한국이 변화되는 것 아니겠어요?”
문득 김수환(金壽煥·1922~2009년) 추기경의 발탁이 오버랩됐다. 1968년 4월 27일 성 바오로 6세 교황(1963~1978년 재위)은 마산교구장이던 김수환 주교를 서울대교구장 대주교로 임명했다. 당시 47세의 세계 최연소 한국 최초 추기경이었다.
오 신부는 이런 이야기를 덧붙였다.
“김수환 추기경이 계실 때 후계자로 강우일(姜禹一·전 제주교구장) 주교를 뽑으려고 했어요. 중요한 교회 일을 강 주교에게 모두 맡기며 서울대교구 보좌주교로 발탁했지요.”
강 주교는 1977년 김 추기경의 비서가 된 이래 1998년 김 추기경이 은퇴할 때까지 21년간 곁에서 함께했다.
“(김 추기경의 뜻과 달리) 로마에서 강 주교에 대한 여론을 평신도들에게 경청했다고 합니다. 결국 서울을 떠나 제주교구장으로 내려갔어요. 그때부터 (강 주교가) 삐딱해졌다는 소문이 있어요.”
강우일 주교는 제주교구장 시절,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 반대 운동과 시국선언 등을 주도해 교회 안팎으로 “천주교를 4대강에 빠뜨렸다”는 원성을 낳았다.
‘골라잡는’ 십자가가 아니라 ‘주어진’ 십자가
1972년 9월 서울학생연합회 스카우트 지도신부 시절의 오태순 신부(왼쪽에서 네 번째)와 김수환 추기경(오른쪽에서 세 번째).
오 신부는 “김 기자! 기도하면서 기사를 써야 한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신임 정순택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 임명을 받은 다음 날(10월 29일) 혜화동 가톨릭 신학대학 내 성당에 안치된 ‘성 김대건 신부’ 유해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어제 너무나 뜻밖의 소식이었지만 이제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이 무거운 십자가를 잘 짊어지고 갈 수 있도록 김대건(金大建·1822~1846년) 신부님께 전구(轉求)를 청했다’고요.”
‘전구’란 성모 마리아나 천사 또는 성인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말한다.
― 정 대주교가 스스로 짊어지겠다고 한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입니까.
“‘골라잡는’ 십자가가 아니라 ‘주어진’ 십자가이지요. 주어진 십자가가 무엇이냐? 평신도들이 교회를 위해 일하고 싶어도 여태까지 끼워주지 않았잖아요. 다른 교구는 잘 되는데 서울(대교구)과 대구(대교구)만 안 끼워준 겁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조직의 변화와 혁신의 물꼬를 틔워야 합니다. 사제와 평신도가 함께 의논하고 일치를 이루면서 공동합의성에 도달해야 하는데, 잘하는 본당이 많지만, 안 하는(못하는) 본당도 많거든요. 안 하는 본당이 이상한 본당이라고 여기는 풍토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조직의 변화가 필요해요.”
가톨릭 교회는 ‘공동합의성’을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라고 부른다. 신(神)의 뜻을 식별하기 위해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친교하고 경청하며 논의하는 여정(旅情)을 뜻한다.
여의도에 나타난 십자가 형상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시절의 오태순 신부. 그는 1981년 10월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성공적으로 기획, 추진했다.
― 오 신부님은 어떻게 ‘평신도와 함께’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서울대교구 사목국장 시절 ‘신바람 나는 사목’을 외쳤잖아요. 그랬더니 평신도들이 자기 돈 쓰면서도 기분 좋게 참여했어요.
평신도의 전문 분야를 감안해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 봉사하는 기회를 준 것뿐이죠.”
오 신부는 서울대교구 사목국장(1979~81년)으로 있는 동안 한국 교회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대형 옥외 행사인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 북경(北京)교구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했다. 그로부터 꼭 150년이 되는 1981년 10월 한국천주교 최초의 신앙대회를 열었던 것이다. 당시 서울교구 내 10개 지구에서 각종 신앙대회, 학술연구와 심포지엄, 교회사 자료 전시, 웅변대회, 교리 경시대회, 100만인 걷기운동 등이 잇따라 열렸다.
“행사의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그해 10월 18일 열렸던 여의도 신앙대회입니다. 인파를 대략 25만 명 정도로 예상했지만, 실제 참석자는 세 배가 넘는 80만여 명이 참석했어요.”
그날 오전 8시30분 신자들의 마음을 모으는 미사 전 기도를 시작으로 기념 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하고 미사 후 질서를 유지하며 퇴장하기까지 모두 3부로 나눠 진행됐다.
십자가를 선두로 복음서와 ‘순교 복자’ 김대건 신부[그땐 성인(聖人) 반열에 오르기 전이었다]의 유해, 태극기, 교황기, 교구기, 본당기를 앞세운 사제단의 입장에 이어 주교단이 제단에 오를 때 오른쪽 성가대 부근에서부터 신자들의 작은 동요가 일었다고 한다.
“그날 여의도 상공에 십자가 형상이 뚜렷하게 나타났어요. 그 광경을 보고 김수환 추기경이 ‘우리가 져야 하는 십자가를 상징한다’고 하셨지요.”
“한국은 기적 심사를 안 해도 기적이 있다”
― 기적이었군요.
“그렇지요. 또 다른 기적도 있었어요. 수많은 인파가 몰렸으니 쓰레기가 나오기 마련이잖아요. 신자들이 쓰레기를 보속(補贖)하는 마음으로 다 가져갔어요. 그랬더니 다음 날 ‘여의도에 휴지 한 장 없더라’는 기사가 났어요.”
한국교회 사상 처음 있었던 대형 신앙대회는 사제와 수도자가 평신도와 하나 되는 첫 공동체험이었다.
그 저력이 3년 후 1984년 5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訪韓)해 가졌던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및 103위 순교자 시성식’으로 이어졌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와 함께 사제들의 위상, 신자들의 도덕성, 그리고 일치된 모습은 국민에게 천주교를 새롭게 알리는 계기가 됐어요.
이후 전국의 모든 본당에서 새 영세자들이 놀랍도록 증가하는 현상을 목도할 수 있었죠. 연(年) 9.1%씩 신자 수가 늘었다고 합니다.
순교자가 성인의 반열에 오르려면 교황청의 까다로운 기적 심사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은 기적 심사를 안 해도 기적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수도자와 함께 순교한 평신도의 희생, 영적 열성이 기적이라는 거지요.”
다음은 《조선일보》 1983년 7월 21일 자 7면에 실린 기사 〈교황, ‘기적심사 면제 공문’ 보내〉다.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순교복자 103위의 시성 추진을 위해 기적심사 관면을 윤허한 공문이 한국교회에 정식 접수됐다. 이 공문은 로마 주재 한국순교복자 시성시복 수속 담당관 윤(尹)민구 신부가 업무협의차 최근 일시 귀국하는 길에 갖고 온 것이다. (중략)
윤 신부가 가져온 83년 6월 9일 자 공문은 시성성 장관 팔라치니 추기경과 차관 크리산 대주교 연서명으로 된 것으로, 제목은 ‘한국 순교복자 김대건 신부와 앵베르범 주교 외 77명, 그리고 황석두와 베르뇌 장 주교 외 22명의 시성에 관한 사항’으로 표기돼 있다.…〉
‘한마음 한몸’ 운동
1981년 10월 18일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 후 감사모임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오태순 신부.
오 신부는 1989년 10월 서울에서 개최했던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준비하면서 ‘한마음 한몸’ 운동을 추진했다. 이 운동의 전국 본부장을 맡아 교회 내의 평신도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참여하는 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오태순 신부의 말이다.
“원래는 강우일 주교와 장익 신부가 함께 대표로 시작됐는데 장 신부가 편찮으셔서 대신 맡게 됐어요. 장 신부가 ‘성체대회만 하면 안 되고 생활운동을 해야 한다’고 해서 시작한 것이 ‘한마음 한몸’ 운동입니다.
기도운동이 아니라 신앙 실천의 구체적인 생활운동으로 만들자는 취지였어요. 예수님이 나[我]와 ‘한마음’ ‘한몸’이 된다는 의미에서 전국 운동본부가 꾸려졌습니다. 헌혈과 장기기증, 입양과 결연, 헌미(헌금), 봉사 운동 등을 병행했죠.”
세계성체대회를 두 달여 앞두고 그해 7월 17일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헌혈 잔치가 열렸다. 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사제단이 공동 집전한 미사에 신자 2만여 명이 참석했다. 그날 강우일 주교를 필두로 사제, 수도자, 평신도 5000여 명이 헌혈에 동참했다. 이 헌혈은 단일 장소, 단시간에 이루어진 헌혈 가운데 가장 많은 헌혈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한마음 한몸’ 운동은 사실상 서울대교구 주도로 시행된 운동이나 전국의 모든 교구가 1년 동안 참여한 운동으로 전 교구적, 곧 한국교회 전체의 운동이 되었죠. 계기는 세계성체대회였지만 한국교회가 신앙 쇄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마련한 행사로 기억됩니다.”
‘한마음 한몸’ 운동은 일회성 행사로 끝나지 않았다. 운동본부는 재단법인으로 변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국내를 비롯한 지구촌 50여 개국을 대상으로 나눔운동과 생명운동을 실천하고 있다. 기자도 ‘한마음 한몸’ 운동 회원으로 매월 3000원을 후원하고 있다. 회비가 너무 착하다.
다음은 《동아일보》 1992년 7월 3일 자 13면 기사다.
〈… 생명을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는 종교계에서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생명나눔’ 운동이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체적 장애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눈이나 장기를 기증하는 이 운동은 88년 천주교에서 시작된 후 개신교, 원불교로 번졌고 불교계도 동참을 선언, 점차 확산되고 있다. (중략)
천주교 한마음한몸운동본부가 지난 88년부터 벌이고 있는 헌안운동은 89년에 열린 제44차 세계성체대회를 계기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해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 지금까지 4300여 명이 사후 눈을 기증키로 약속했고 시각장애인 24명이 이들로 인해 새로운 광명을 찾았다.…〉
오 신부는 1988년 10월부터 1999년 2월까지 1대 ‘한마음 한몸’ 본부장을 맡아 신앙운동이 생활운동으로 뿌리내리게 힘을 쏟았다.
“‘한마음 한몸’ 운동이 너무 설쳤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저는 성령의 움직임이었다고 믿고 싶어요. 그때 ‘펄펄 뛰시는’ 성령께서 운동을 이끄셨습니다. 그러니 저도 같이 펄펄 뛸 수밖에요. 그게 바로 평신도와 함께한 운동이었죠.”
“함께 일할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1947년 4월 6일 서울 제기동 성당에서 아홉 살 소년 오태순(앞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 이날 첫 영성체를 기념해 촬영했다.
― 비결이 뭔가요.
“모두가 경험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운동이 저변으로 확산되는지 몰랐어요. 제가 사목국장을 하면서 조직을 움직여 봤잖아요. 각 본당 평신도들을 와글와글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조직을 움직여야 해요, 조직을.
저는 가톨릭대학생 지도신부, 스카우트 지도신부, 성령 지도신부, 정의구현사제단 등 천주교 운동이란 운동은 다 했으니까요. 외국에 가서 학위를 안 받은 대신 국내에서 하는 것은 다 해봤어요. 저는 이 기도만 했어요.”
― 어떤 기도요?
“‘함께 일할 사람을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요. 이것뿐입니다.”
오태순 토마스 신부는 1939년 12월 19일 부친 오산옥(마티아)과 모친 김분다(베네딕다)의 2남 중 차남으로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에서 태어났다.
그가 세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을 일찍 여윈 김분다 여사는 홀로 아들 형제를 길렀는데 “아버지가 없어도 부모가 있는 자식들보다 더 떳떳하게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땀이 가득한 발자국을 성당 마루에 새기다
오 신부의 말이다.
“우리 집에서는 저녁기도 시간이 무지 길었어요. 고교 시절에 권투를 배웠는데 운동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저녁기도를 빨리 해치워 버리자’ 싶어 청량리 성당에 들르곤 했지요. 2~3분 만에 저녁기도를 끝내버렸어요. 더 할 게 없나 싶어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매일 했습니다.”
당시 청량리 성당 안이 마루로 되어 있었는데 오태순 학생은 땀이 가득한 발자국을 바닥에 ‘새기곤’ 했다. 성당 수녀님이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말없이 마루를 닦았다고 전한다. “어찌나 오래 기도하던지 ‘지금쯤 기도가 끝났겠지’ 싶어 성당 안을 들여다보면 그대로 있고, 잠시 후에 다시 들여다봐도 계속 기도하고 있었는데, 수녀님이 ‘이제는 정말 끝났겠지!’ 하고 들여다보면 ‘십자가의 길’을 하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때 군종(軍宗) 신부를 위한 기도서가 얇게 나온 게 있었어요. 기도서에 이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을지라도 자기 명예를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제가 중학교 시절엔 ‘4H 구락부’에 나가며 농촌살리기 운동에 참여하고 웅변대회도 나가고….”
― 말씀을 잘하시는 게 이유가 있군요.
“그땐 장래에 교사가 되어 농촌 살리는 꿈을 막연히 꾸었는데 청량리 성당에 나가 기도와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꿈이 바뀐 거지요.
저는 학원에 다닌 적이 없거든요. 고3 때 전교 등수가 540명 중 510등인가? 하하하. 낙제를 안 하면 되는 거지요. 그냥 성당에서 살았어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오태순 신부는 1969년 12월 17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 성소(聖召)가 궁금합니다.
성소는 신의 부르심을 뜻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스물일곱이셨어요. 어머니는 자식들의 기를 살리려고 학교 등록금을 남들보다 먼저 챙겨주셨고, 용돈도 넉넉하게 주셨죠. 아쉬울 게 없었어요.”
어머니는 야채며 소금을 머리에 이고 20년 동안 보따리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공부는 안 했어요. 시험공부라도 하면 어머니는 ‘무슨 공부를 다하니…’ 그러시고, 어쩌다 상(賞)을 타면 온 동네 자랑을 하시고….”
당시 학생들이 책을 보자기에 둘둘 말아서 등에 메고 다닐 때 소년 오태순은 어깨에 란도셀을 메고 다녔다.
“고려대에 다니다가 시립농대로 옮긴 동네 형[안경렬(安慶烈)]이 있었는데 어느 날 신학교에 간다는 겁니다. 그 형에게 ‘나도 가면 어떨까’ 하고 물으니 ‘된다, 안 된다’는 말 대신에 ‘너도 될 거야…’라고 했어요.
훗날 신부가 된 후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임신할 때부터 두 아들을 낳으면 한 아들은 신부, 한 아들은 장가들게 해달라 기도하셨다’는 겁니다.”
오 신부는 1969년 12월 17일 사제품을 받았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루카 9, 23)는 성경 말씀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다.
신부와 봉사자, 평신도가 함께하는…
1969년 12월 사제서품식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오태순 신부의 형 내외와 조카, 어머니 김분다 여사.
그는 스카우트 및 학생 레지오 지도신부, 서울학생연합회 지도신부, 가톨릭학생회 지도신부, 가톨릭학생회관장 등 (대)학생·청소년 사목을 주로 도맡았다.
“‘한국 가톨릭학생회의 아버지’가 나상조(羅相朝·1921~2008) 신부이신데, 저는 그분의 아들뻘쯤 될 겁니다. 신임 정순택 대주교 역시 최근까지 서울대교구 청소년 담당 주교로 계셨지요.
어쨌든 제가 가톨릭학생회 지도신부를 맡았는데 다른 신부들에 비해 가방끈이 짧잖아요.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대학교수 신부를 학생회 지도신부로 모시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이분들이 훗날 교회 발전을 이끈 분들이에요.”
최창무 신부(훗날 광주대교구장)는 서울대 문리대 가톨릭학생회, 장익 신부(훗날 춘천교구장)는 서울대 법대 가톨릭학생회, 벨기에 출신의 윤선규 신부(훗날 벨기에 켄트교구장)는 중앙대 가톨릭학생회, 박상래 신부(훗날 가톨릭대 교수)는 이화여대 가톨릭학생회 등의 지도신부가 되어 1970년대 대학생 가톨릭 성서모임의 바람을 일으켰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고려대 조광(趙珖) 교수의 누나인 조 마오로 수녀가 계셨어요. 조 수녀께서 1년 동안 34개 대학을 다니면서 대학생 성서모임을 조직하셨어요. 나중에는 우 베다 수녀, 박 암브로시오 수녀가 전담 수도자로 파견됐어요. 수녀 봉급이 싸잖아요. 하하하.
신부는 가이드라인을 정하고 수도자·학생 봉사자가 평신도들과 함께하는 체험을 하면서 교회운동의 노하우를 그때 얻은 것이죠.
‘나는 부족한 신부입니다. 가방끈이 짧습니다’고 말하며 다가서면 모두 제 협력자가 됐어요. 조광 교수나 노길명(盧吉明) 고려대 교수, 최재선(‘한마음 한몸’ 운동본부 이사) 등이 대표적인 평신도 협력자들입니다. 제가 어느 행사에 나가 연설을 하게 됐다고 말하면 A4 한 장짜리 연설문을 척척 만들어 냈어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데 꿈틀거려도 되겠느냐”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과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를 비롯한 7개 종교, 시민단체 대표들이 1997년 6월 13일 오전 서울YMCA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북한 동포를 돕기 위해 옥수수 3만t을 지정기탁 방식으로 북한에 보내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이용득, 오태순 신부, 이윤구씨,인명진 갈릴리교회 목사.
― 그분들이 오 신부 마음을 꿰뚫고 있나 봅니다.
“그분들은 저를 ‘내가 안 도우면 못 하실 분’으로 생각한 거지요.”
사제가 아닌 평신도를 교회의 주인공으로 세우는 데 오 신부의 탁월한 용인술이 발휘되었다. 그의 주변에는 늘 ‘의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 정의구현사제단에 참여한 계기가 듣고 싶습니다.
“1974년 7월 8일 안충석 신부와 제가 김수환 추기경을 주교관에서 면담하였어요. 이틀 전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지학순(池學淳·1921~1993년) 주교가 공항에서 행방불명됐다는 얘기를 듣고 그 경위를 듣고자 찾아뵌 겁니다.”
지학순 주교를 면담하고 돌아온 김 추기경은 “중앙정보부가 지 주교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 배후 조종자로 지목하여 국가 전복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려는 것 같다”며 걱정스러워했다.
오 신부가 “가톨릭 주교를 코뮤니스트(communist)로 모는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데 꿈틀거려도 되겠느냐”고 김 추기경에게 물었다고 한다.
안·오 두 신부는 곧바로 서울 응암동 본당 주임이던 함세웅 신부를 만나 “동창 신부들 가운데 가장 머리가 좋아 박사 학위를 받았으니, 먼저 동창들에게 연락해 일을 만들어보자”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정의구현사제단은 1974년 9월 26일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제1차 시국선언을 발표하면서 공식 출범했다. 오태순 신부는 당시 서울대교구 대학생연합회 지도신부였기에 자연스럽게 사제단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목국장 시기인 1980년 7월 3일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보안사에 잡혀갔어요. 심문과 고문 후 구금됐고 약 40일 후인 8월 14일 수경사 군사법정 재판에서 동창 신부 장덕필과 함께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됐습니다.”
그때의 고문 흔적(엄지발가락 발톱이 검게 죽었다)이 아직 남아 있다. 어쨌거나 “감옥은 죄지은 사람만이 아니라 정의로운 사람들도 가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빙고 사람들이 저를 담요로 둘둘 말아 때리고 심문을 시작했는데 그렇게 때리면 뼈가 부러지지 않거든요. 그 사람들이 심하게 한 것도 아니에요. 거기 있을 때 누가 와서 ‘신부님. 제가 신부님 고교(경동고) 후배입니다. 위에서 얼마간 되게 패라고 했는데 조금밖에 안 했습니다’ 그래요.”
“서빙고 사람들 용서하고 다 축복을 빌어줬어요”
오 신부는 이런 이야기도 했다.
“저는 서빙고 사람들, 다 용서하고 축복을 빌어줬어요. 그분들 중 훗날 안기부장이 된 이상연씨가 있어요. 그분도 천주교 신자입니다. 직장 때문에 한 일이지요.”
― 정의구현사제단을 떠난 계기가 있었나요.
“사제단에서 같이 활동한 박병준 신부도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사제단 신부들이 특정 정치인(김대중 전 대통령)을 밀면서 무너졌어요. 이후 사제들이 싹 돌아섰고 서울대교구에서 굉장히 지리멸렬하게 돼버렸어요.
신부는 누구를 노골적으로 밀어서는 안 돼요.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좋은데, 한쪽을 지지하면 반대하는 사람은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도 누구를 정치적으로 지지는 안 하셨지요.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셨지요.
박홍(朴弘·1941~2019년) 신부가 그러셨어요. ‘나는 하느님 편이다. 좌도 우도 아니다’고.”
오 신부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함세웅 신부는 힘이 없어요. 딴 곳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해 먹는 것일 뿐이지….”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양떼를 보호하는 목자 옷을 입은 젊은 시절 오태순 신부.
― 정치 사제들에 대한 우려가 많습니다.
“젊은 신부들이 모르고 천방지축으로 한 것이지요. 함세웅 신부를 믿고서. 이제 그분도 손발이 없는데 무슨 힘이 있겠어요? 서울교구에 함 신부 따르는 신부가 몇 없어요. 그동안 염수정 추기경께서 노골적으로 노(No)라고는 안 했지만, 선을 분명히 그으셨기에 다들 (정치 현안에) 침묵해온 겁니다.”
― 내년에 우파 정부가 들어서면 또 정치 신부들이 나서지 않을까요.
“그렇게 정권이 바뀐답니까? (웃음) 제가 볼 때 용기 있는 사람(신부)은 그럴 수 있겠지만 덩달아서 하는 사람(신부)은 언제든지 덩달아서….”
오태순 신부는 지난 2021년 11월 14일 가톨릭회관에서 열린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미사를 집전하면서 강론 원고를 미리 작성했다. 원고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 현 정권의 대통령은 헌법과 헌법정신을 여러 차례 위반해왔고 이는 문재인의 스승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 허영 교수가 지적한 바 있으며 문 정권의 실정과 폭정 사례를 들어봅시다.
첫째, 언론 통제를 통한 여론의 오도와 포퓰리즘을 들 수 있습니다. 재난지원금이란 명목으로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지원금은 세금을 낭비하여 국민의 비판의식을 잠재우는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중략)
현 정권을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한국 가톨릭 교회의 몇몇 교구장들의 행태와 주교들의 침묵은 독일 나치 정권 시기의 참상을 연상케 합니다. 사회 사목의 관점에서 한국 가톨릭 교회의 대 사회비판적 발언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교구장의 사목교서나 성탄 메시지를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바를 밝힘으로써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어야 할 때입니다.…〉
“사제들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2007년 7월 1일 오태순 신부의 칠순연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
오 신부는 이 강론 원고를 신임 정순택 대주교에게 보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제가 하겠다고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열매를 맺어주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이었죠.”
― 앞으로도 ‘평신도와 함께’하는 노하우를 젊은 사제들에게 가르쳐야지요.
“묻지도 않는데 이야기하면 ‘꼰대’ 소리를 듣습니다. 젊은 사제들이 ‘새로 오신 교구장을 보필하는 일꾼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성령님께서 빛을 비춰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 평신도와 더불어 일해야지요. 평신도들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게 만들어야지요.
사제들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사제의 회개(悔改)는 징계를 통해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먼저 희생과 봉사가 있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