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클레어 하버드대 교수 '노화의 종말'에서 주장
'100세 시대'의 도래는 축복이 아닌 저주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주로 노후에 찾아오는 가난과 고독을 염두에 둔 말이지만 노인들이 겪는 질병과 이로 인한 삶의 질 악화도 이런 인식을 강화한다.
그러나 데이비드 싱클레어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블라바트닉연구소 유전학 교수는 '노화의 종말(원제 Lifespan: Why We Age - And Why We Don't Have To·부키)에서 노화는 질병, 그것도 치료할 수 있는 질병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자신을 비롯해 전 세계 노화 연구자들이 수행한 최신 연구 결과를 인용해 노화가 인간의 필연적 운명이 아니며 다른 질병을 고치듯이 노화의 원인을 제거하면 젊고 건강하게 더 오래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단언한다.
불교에서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 할 고통이라고 했고 서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생물은 '종을 위해', 다시 말해 다음 세대에 자리를 비켜주려고 죽는다는 개념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현대에 들어서는 DNA 손상, 미토콘드리아 이상, 염색체를 보호하는 끝부분인 텔로미어(telomere)의 마모, 줄기세포의 소진 등 노화의 원인을 설명하는 연구들이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고 이 같은 원인을 제거하면 노화를 늦추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스포츠 경기 참가한 노인들
러시아 모스크바 '장수 스포츠 경기대회'에 참가한 노인들. [TASS 자료사진·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나 저자는 이 같은 현상들이 노화의 징표(hallmark)에 불과하며 노화의 진정한 원인은 따로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아주 간단히 말해 노화란 '정보의 상실'이다. 저자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연구자들이 확립한 노화 이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후성유전체(epigenome)다. 후성유전체는 어느 유전자를 켜고 어느 유전자를 잠재우라고 세포에 알리는 제어 시스템과 세포 내 구조들을 총괄하는 말이다. 저자는 이를 피아니스트에 비유한다.
우리 유전체를 그랜드피아노라고 한다면 약 2만 개에 이르는 우리의 유전자는 각각이 하나의 건반이다. 각 건반은 하나의 음을 낸다. 그리고 똑같이 연주한다고 해도 제작사, 재료, 제작 환경에 따라 각 건반이 내는 소리는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연주 방식에 따라서도 소리는 달라진다. 이 건반을 무수한 방식으로 조합해 재즈, 록, 레게, 왈츠 등 다양한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바로 후성유전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일란성 쌍둥이는 유전체는 동일하지만 후성유전적 힘을 통해 서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달할 수 있으며 늙는 속도까지 달라질 수 있다. 일란성 쌍둥이 연구로 밝혀진 바로는 유전자가 장수에 미치는 영향은 10~25%에 불과하다. 즉, 우리 DNA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지 않는다.
저자 데이비드 싱클레어ⓒ Brigitte Lacom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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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가 연주할 때 건반을 하나 잘못 누르면 처음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빈도가 점점 늘면 연주는 엉망이 된다. 우리 몸에 이 같은 일이 일어나면 '후성유전적 잡음(epigenetic noise)'이 된다. 이 혼란은 대체로 DNA가 끊기는 것과 같이 세포에 심한 손상이 일어남으로써 생긴다. 어느 유전자에 달라붙어 그 유전자의 발현을 막는 기능을 하던 '서투인(sirtuin)'이라는 효소를 비롯한 후성유전인자들은 이럴 때 DNA가 끊긴 자리로 가서 수선한 뒤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이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해 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곳의 유전자를 발현케 하는 경우가 늘어난다. 이것이 바로 노화다.
저자는 또 영국의 유전학자 콘래드 와딩턴(1905~1975)이 확립한 '후성유전적 경관' 이론을 가져와 산과 조약돌의 비유를 들려준다. 여기서는 배아줄기세포가 특정 세포로 분화하는 것을 산꼭대기에 있는 조약돌이 골짜기로 굴러떨어지는 것에 비유한다. 후성유전체는 조약돌에 길을 안내하지만, 세포가 일단 자리를 잡은 뒤에는 중력의 역할을 해 비탈을 다시 올라가서 다른 골짜기로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잡아두는 역할을 한다. 모습과 DNA가 서로 정확히 똑같은 미분화 세포들의 덩어리에 불과한 초기 배아가 인체의 수천 가지 세포로 분화할 수 있고 분화한 뒤에는 결코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와딩턴 경관
조약돌이 굴러떨어져 골짜기 아래에 정착하듯이 배아세포는 후성유전체의 안내를 받아 특정 세포로 분화한다. 그러나 지진 등 요인으로 조약돌이 다른 골짜기로 옮겨가는 것처럼 후성유전체에 과격한 조정이 이뤄질 때마다 세포의 정체성이 바뀌게 된다. [부키 제공·재판매 및 DB 금지]
그러나 지진이 일어나고 산이 침식되면 옆쪽 비탈로 튀어 올라 새로운 골짜기로 들어가는 조약돌들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DNA가 햇빛이나 X선에 손상될 때처럼 후성유전체에 과격한 조정이 이뤄질 때마다 세포의 정체성이 바뀌게 된다. 이렇게 되면 예컨대 피부세포는 자궁에 있을 때 차단된 상태로 계속 유지돼야 할 유전자들을 켬으로써 90%는 피부세포지만 나머지는 뉴런과 콩팥세포와 같은 다른 세포들의 특성이 뒤섞인 '잡탕' 세포가 된다. 이러한 정보 상실이 바로 우리 모두를 심장병, 암, 통증, 쇠약, 죽음의 세계로 이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노화의 원인이 이러한 것이라면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저자는 우선 건강이 유지될 만큼 적게 먹는 식습관이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운동도 마찬가지로 몸에 스트레스를 가해 서투인과 같은 장수 조절 인자들을 활성화해 새 혈관을 생성하고 심장과 폐를 튼튼하게 하며 몸을 더 건강하게 하고 텔로미어 길이를 늘인다. 여기까지는 건강에 관한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지 않다.
저자가 이끌던 연구팀은 2017년 생쥐 실험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서투인을 활성화하는 NAD라는 물질의 체내 농도를 증진한 결과 늙은 생쥐의 몸에서 새로운 모세혈관이 형성되고 노쇠의 가장 큰 원인인 후성유전체의 불안정성이 되돌려진 것을 발견했다. 약물로 운동 효과를 낼 수 있고 노화의 몇몇 측면을 되돌릴 수 있음이 증명된 것이다. 이 밖에도 과학자들은 다양한 항노화제와 우리 유전체에서 평균수명과 최대수명을 늘려주고 더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장수 유전자'를 22개 이상 찾아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의료 분야 혁신이 더욱 진전을 이룬다면 40대 중반에 노화가 나타난 사람이 한달간 약물을 투여해 재프로그래밍 유전자들을 켜는 방법으로 몸이 점점 젊어져 25세로 돌아가는 일도 상상만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장수 유전자, 장수 물질, 장수 기술을 모두 고려해 '보수적으로' 계산하면 우리는 113년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추산되며 자신의 '공식적' 견해는 150년까지 살 수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전망이 모두 맞는다면 모든 인류에게 고무적인 일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우려는 남는다. 평균 수명이 대폭 연장되면서 늘어날 인구를 지구가 지탱할 수 있는지가 그 가운데 하나다. 저자는 이에 대해 "문제는 인류가 인구 증가보다 늘 앞서 있게 해 줄 기술을 계속 개발할 수 있는지, 지구를 모든 생물에게 더 나은 곳이 되도록 만들 수 있는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까"라고 질문한 뒤 자답한다.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수많은 전문적 연구들이 등장하고 책 말미의 관련 인물과 용어 설명만 18쪽에 이를 만큼 읽기에 만만찮은 책이다. 그러나 저자의 재치 있는 문장과 다양한 비유를 섞은 설명을 잘 따라가면 과학이나 의학에 문외한이라도 큰 줄기를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이한음 옮김. 624쪽. 2만2천원.
(서울=연합뉴스) 추왕훈 기자 =입력 2020.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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