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오후 11시 국내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에서 거래되는 암호화폐 ‘스팀’의 가격이 5210원에서 10분도 안 돼 6280원까지 뛰었다. 20% 넘는 상승률이다. 암호화폐 정보업체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같은 시각 글로벌 시세는 7% 상승에 그쳤다. 이 업체는 최근 글로벌 시세를 정할 때, 한국 가격은 빼고 계산한다. 한국 가격이 시장을 왜곡해서 보여줄 우려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스팀 시세는 한국에서만 유독 급등했다는 얘기다.
미국 신용평가회사 첫 발표
높은 등급 암호화폐 한 때 급등도
전문가들 “평가 방식·결과에 의문”
해당 업체 “한국에서 사이버 공격”
가격이 뛴 것은 미국 플로리다에 있는 신용평가사인 ‘와이스 레이팅스’가 암호화폐 신용등급을 발표해서다. 이 시각, 이 업체는 암호화폐 74종의 신용등급을 공개했다. 최고 등급인 A를 받은 암호화폐는 없었다. 이더리움과 이오스가 가장 높은 B를 받았지만, 암호화폐의 맏형 비트코인은 C+에 그쳤다.
이 업체는 홈페이지를 통해 “각 암호화폐의 기술·실적·거래동향 등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해 등급을 매겼다”며 밝혔다. A는 우수(excellent), B는 양호(good), C는 보통(fair), D는 취약(weak), E는 매우 취약(very weak)을 뜻한다.
그런데 스팀이 사실상 두 번째 등급인 B-를 받았다. 비트코인보다 더 높다. 다른 상위 등급의 암호화폐가 시가총액 상위 10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무거운데 반해, 스팀은 30위 안팎에 그친다. 몸집이 가벼워서인지 호재성 뉴스에 즉각 반응했다. 특히, 한국의 매수세가 상승세를 이끌었다. 25일 오후 2시 현재 업비트에서 거래되는 스팀 거래량(원화·비트코인 마켓 기준)은 전세계 거래량의 80%에 육박한다.
한국인들의 관심이 워낙 뜨거워서인지 등급 발표가 예정된 시각엔 접속자 수가 갑자기 몰리면서 접속 장애를 빚기도 했다. 이 업체는 “한국 투자자들에게 사이버 공격을 당했지만 막아냈다”고 주장했다. 이어 “(사이버 공격의 소행이 한국이란 건) 한국 소셜미디어에 우리 웹사이트를 다운시켜야 하다는 수많은 언급이 그 증거”라며 “그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화폐에 대한 부정적인 등급을 매기는 것에 상당한 공포감을 나타냈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이 업체의 신용등급 결과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국내 투자자들만은 아니었다. B-라는 괜찮은 등급을 받은 카르다노(에이다)의 대표 찰스 호스킨슨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비트코인에 A를 주지 않은 등급 시스템은 말도 안 된다. 비트코인은 이미 10년간 성장하며 혁신을 불러왔다. 현재 암호화폐 시장의 리더 역할을 하는 기준이 되는 코인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와이스 레이팅스는 홈페이지에 ‘왜 비트코인은 A를 못 받았나’라는 제목의 설명글을 추가로 올렸다. “비트코인은 강한 시장 지배력과 브랜드, 보안 덕분에 A의 이점을 누리고 있지만 거버넌스와 에너지 소비, 확장성에 있어서는 약점이 있다”고 밝혔다.
이 업체의 평가 결과가 실제 가격에 영향을 미치자, 좋지 못한 등급을 받은 한국 투자자들은 업체 ‘신상털기’에 들어갔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이 업체의 내부자 거래 문제 등을 지적하는 2006년과 2009년 문서를 찾아냈다. 미리 주식을 사 놓고 사람들에게 투자를 추천해 가격을 올린 후 팔아 수익을 취하는 식의 불법 행위로 2016년 1000만 달러의 벌금 처분을 받았다는 기사를 찾아 공유했다. 이번에도 자신들이 보유한 암호화폐의 등급을 높게 평가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문제는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보고서인데도 불구하고 가격을 움직인다는 점이다. 그나마 세계 100대 신용평가기관에 속한 곳이 처음으로 신용등급을 내놓다 보니 그 결과에 국내 투자자들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 셈이다.
국내 연구모임인 ‘한국 이더리움 밋업’의 정우현 대표는 “암호화폐의 주요 요소인 탈중앙화 정도는 고려조차 안 했다”며 “이 등급은 의미 없는 자사 광고용 자료밖에 안 된다”고 평가 절하했다. 한 암호화폐 전문가는 “이런 등급표 하나에 가격이 흔들린다는 건 그만큼 국내 시장에는 암호화폐 공부를 제대로 하고 투자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18.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