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오리진(전 2권)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문학수첩
각 372·352쪽
각권 1만3000원
그의 별명은 조금 해묵은 구석이 있다. 빅뱅. 그러나 대폭발이란 언제나 위력적이며 지구 전체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다. 흥행작 '다빈치 코드'로 대표되는 미국 소설가 댄 브라운(53)이 4년 만에 신간을 내놓자, 내용이 채 관측되기도 전에 그 팽창의 중력파만으로 출판계는 요동쳤다. 지난달 미국 현지 초판 200만부 발매. 출간 즉시 인터넷 서점 아마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꿰찼고, 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 등도 사정은 같다. 미국 출판지 퍼블리셔스위클리는 "'오리진'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평했다. 20국에서 이미 번역 출간됐고, 때맞춰 한국에 상륙했다. 한국에서도 그는 폭발할 것인가?
건실한 자기 복제… 견고한 '댄 월드'
빅뱅이 태초를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번 신간의 의미와 통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술과 기독교의 비밀 ('다빈치 코드'·2003), 단테의 시에 얽힌 인구 종말론('인페르노'·2013) 등 전작이 주요 미스터리를 중세 서구 예술의 배면에서 캐올렸다면, 이번엔 좀 더 보편적이고 궁극적 수수께끼를 들고나왔다. 인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 저자는 두루뭉술한 동문서답으로 피해가는 대신 확실한 답을 내놓는다. 이것이 기어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기게 하는 힘이다.
"곧 세상 사람들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에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그들이 죄다 틀렸다는 공통점을." 댄 브라운 소설이 늘 그렇듯 종교라는 거대한 암벽을 더듬어 치명적 흠집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리고 이 흠집은 지반 전체를 무너뜨린다.
막대한 부(富)와 천재성을 바탕으로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을 밝혀내 발표회를 여는 마흔 살의 컴퓨터 과학자 에드먼드 커시. "과학의 시대가 밝아오고 있습니다…. 오늘밤 인류는 비약적으로 도약할 것입니다." 이제 스마트폰을 열고, 47자리 비밀번호를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총격. 커시는 이마에 붉은 구멍을 남기고 쓰러진다.
이제 커시의 하버드대 스승인 기호학자 로버트 랭던이 활약할 차례다. 살해 현장을 목격한 랭던은 24시간 동안 종횡무진하며 살인 사건의 배후와 커시가 발설하려던 연구 결과를 밝혀내야 한다. 이번에도 '댄브라운 월드'는 예외 없이 견고하다. 실존하는 종교 단체 및 예술과 장소, 그에 얽힌 살인 사건, 종교적 기호를 풀어 비밀에 다가서는 주인공, 추격전까지. 신앙을 향한 슬픈 맹목 탓에 살인을 서슴지 않는 과격 보수주의 교회 추종자가 있고, 덕분에 사건은 시작될 수 있다. 배경지식 설명을 위해 문학적 각색 없이 문장을 늘어놓는 위키피디아식(式) 기술도 빠지지 않는다. 이런 댄 브라운의 자기 복제는 여러모로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68)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의 한결같은 스타일은 골수 팬을 위해 자신의 골수를 보여주겠다는 결기로도 읽힌다.
최신의 망라… 최선의 선택 될까?
이 책은 대중소설이며 문학적 성취도가 높은 작품은 아니다. "재밌는 글을 쓸 뿐"이라는 저자의 뚜렷한 자기 고백처럼, 책의 미덕은 가공할 가독성. 이를테면 사건을 정리해주기 위해 가짜 뉴스 사이트의 '속보' 형식을 빌려 지속적으로 과거 챕터를 요약해 보여주는 친절함이다. 최신 트렌드를 놓치지 않으려는 악착도 느껴진다. 전기차 회사 테슬라의 수퍼카, 비트 코인, 가짜 뉴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유명 대사까지 우겨 넣으며 이 쉰셋의 작가는 젊은 취향을 판촉한다.
댄 브라운이 예견한
새로운 신 '인공지능'
그리고 인공지능이 있다. 줄곧 종교에서 집필의 영감을 발굴해온 저자는 지난달 독일 프랑크푸르트 기자회견장에서 "지금의 종교는 곧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그가 예견한 새로운 신은 '인공지능'이었고, 그 예견은 커시가 개발한 인공지능 비서 '윈스턴'으로 구체화된다. 소설의 주도적 역할 역시 인간(랭던)이 아니라 인공지능(윈스턴)이 맡는다. 폐소공포증을 호소하며 버거운 액션을 전개하는 랭던은 차치하고, 랭던의 조수 정도로 전락해버린 여자 주인공 비달은 향후 스토리를 위한 하나의 조각으로 기능할 뿐 구겐하임 미술관장직에 어울리는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랭던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시리(아이폰 음성인식 기능)한테 스테로이드를 먹인 것 같네."
랭던이 분량 확보를 위해 힘들여 예술사적 전문 지식을 동원하긴 하나 척척 초 단위로 문제를 해결하는 윈스턴 덕에 복잡한 상징을 풀이하며 느끼는 기존의 지적 스릴이 감쇄되는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이것은 향후의 인간 저하를 암시하는 저자의 노림수일 수도 있다. 윈스턴이 스페인 화가 호안 미로의 그림을 흉내내 그린 자화상을 제시할 때 독자는 진지한 미래적 고민에 빠지게 된다. 가상이 그린 자화상. 이 가상은 가상이라 할 수 있는가? 미로(miro)는 스페인어로 '나는 본다'는 뜻이다.
인문학적 교양에서 자연과학으로
여기에 편리한 지적 고양감을 안기는 교양서의 기능이 추가된다. 소설 중·후반에 이르러 랭던은 커시가 남긴 비밀번호 47자리를 찾아 헤맨다. "비밀번호는 예언과 관련된 시(詩) 구절"이라는 생전의 언급을 통해 추리가 시작된다. 자연히 주제를 함축하는 프랑스 화가 고갱의 그림 등 각종 예술의 비밀스러운 내력이 나열되는데, 특히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이곳 태생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의 건축물이 전통과 현대의 반목을 상징하며 등장한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후반부는 자연과학의 영역. 결국 소설이 제기한 질문은 "인간의 탄생을 가능케 한 '제1 원인'은 무엇인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실제 1950년대 이뤄진 원시 지구의 재현 실험이나 현직 MIT 교수인 제러미 잉글랜드의 '소산(消散) 구조' 이론 등을 앞세우며 팩트를 다져나간다. "작열하는 태양이 토양을 비추면 우주는 그 에너지의 분산을 돕기 위해 식물을 만들어낸다"는 가설은 해체와 무질서를 지향하는 우주가 그 무질서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약간의 질서를 필요로 한다는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생명은 우주가 에너지를 소산하기 위해 창조하고 복제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더 큰 충격은 뒤에 온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이 질문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스릴러의 묘미는 역시 반전. '이제 다 끝났나' 싶을 때 지각변동이 시작된다. 지난달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저자에게 물었다. "이번 책이 당신의 대표작 '다빈치 코드'를 넘어설 수 있다고 보는가?" 그는 "나는 전작을 넘어서기 위해 차기작을 쓰지는 않는다"며 능청을 떨었다. 질문은 이제 독자에게 넘어갔다.
조선일보 정상혁 기자 편집=박은혜 입력 : 2017.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