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 중이던 역사책에 쓸 시카고의 옛날 사진을 찾던 작가 존 멀루프는 2007년 집 근처 경매장에서 인화하지 않은 필름 수십만 장이 들어 있는 상자를 380달러에 낙찰받는다. 사진을 찍은 사람 이름은 비비안 마이어. 그는 호기심에 구글로 이름을 검색하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존 멀루프는 상자 안에서 필름을 꺼내 사진을 인화하기 시작했다. 인화한 김에 자기 SNS에 일부를 올렸는데, 정사각형 프레임으로 찍은 그녀의 사진은 놀랍게도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을 이끌어낸다. 그녀가 찍은 길거리 풍경이 사람들을 매혹한 것이다. 그는 내친김에 MoMA(뉴욕현대미술관) 같은 미술관에 자기가 소장한 사진을 전시할 뜻이 있는지 문의한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부정적인 답변을 듣는다. 사진이 이렇게 묻혀 버리는 게 안타까웠던 존 멀루프는 사진을 시카고 아트센터에서 전시하기로 결심한다. '비비안 마이어―시카고 거리의 사진가'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그리고 전시는 갤러리 역사상 최다 관람객을 기록한다. 우연히 발굴한 한 천재 사진가의 등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연이어 월스트리트 저널, 시카고 선 타임스 등이 그녀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한다. 스퀘어 포맷으로 찍은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로버트 프랭크 작품의 영향 아래 있었고, 쌍둥이 사진의 일부는 마치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과 비슷한 듯 달랐다. 수많은 대가의 흔적이 그녀의 필름 위를 스쳐 지나갔지만 '상황'을 포착하는 비비안 마이어만의 낙인은 사람들을 매혹했다. 무심함, 신경증, 고단함, 발작적으로 느껴지는 유머러스한 표정은 도시 사람들의 내면을 독창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진 작가이자 비평가인 앨런 세쿨라는 존 멀루프에게 사생활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작가에 대해 알아보라고 충고한다. 이렇게 존 멀루프는 방대한 사진을 찍어 단 한 번도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채 상자 속에 처박아둔 수수께끼 같은 여자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사실 이것은 예술계에 공공연히 퍼져 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천부적 재능이 있지만 끝내 발굴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 비극적 천재 이야기 말이다.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그런 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밥 딜런보다 더 유명해진 가수 슈거맨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거맨'의 사진가 버전처럼 읽힌다.
두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남아프리카의 영웅 슈거맨은 사실 미국의 화장실 청소부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모으는 수집광이었던 비비안 마이어는 평생 누군가의 유모로 일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는 '천재적인'이란 수식어를 쓸 만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살아생전 이들은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먼, 가난하고 쓸쓸한 삶을 살았다.
존 멀루프가 무려 필름 15만장이 담긴 상자를 경매장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상자를 둘 창고 임차료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비비안 마이어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바꿔 부를 수도 있는데, 인터뷰 대상자 대부분은 그녀가 양육했던 아이였다. 흥미로운 건 이제 어른이 된 이들의 입을 통해 듣는 과거의 비비안 마이어에 대한 추억이다. "그녀는 괴팍했어요!"
비비안 마이어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심술궂은 사람이었고, 뉴욕타임스를 광적으로 모았으며, 기쁜 일보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기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커다란 코트를 입고 성큼성큼 남자처럼 걸어 다녔다. 유모였지만 결코 아이들 보폭에 걸음을 맞추지 않았고, 아이를 길가에 버려둬 경찰이 출동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아이를 바닥에 눕히고 남긴 음식을 강제로 먹이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빈민가에 아이를 데리고 가지 말라"는 아이 부모의 이야기를 무시할 정도로 고집스러웠다. 아이들은 언제라도 사진 찍을 준비가 되어 있는 비비안을 잘 기억했다. 몰래 찍었다는 얘기도 있고 부탁을 하며 찍었단 말도 있지만, 대체로 그녀는 남의 감정에 상관없이 셔터를 누르고 사진을 찍었다.
좋은 사진을 찍은 것과는 별개로 비비안 마이어는 아이들에겐 좋은 유모가 아니었다. 자기 이름을 자주 바꿔 부르거나, 스스로를 스파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에선 마치 신분을 세탁하고 평화롭고 작은 마을에 숨어든 범죄자 같은 분위기마저 풍겼다. 하지만 그녀가 일하던 집에서 아이를 입양하려 하자 그 가족에게 했다는 말은 한 인간의 깊은 외로움을 드러낸다.
"누굴 돌볼 생각이라면 날 돌보는 건 어때요? 날 입양해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는 노부인의 말이 잊히지 않았다. 비비안 마이어는 뉴욕 출신이었지만, 사람들은 악센트 때문에 그녀를 프랑스 출신이라 오해했다(그녀는 그 오해를 교정하지 않았다). 인터뷰했던 사람들 입에선 '모순적, 괴팍함, 유별남, 다정함, 유머'처럼 각기 다른 단어가 튀어나오곤 했지만 사람들 모두가 동의하는 비비안 마이어에 대한 공통된 기억은 바로 '비밀스러움'이다. 스파이처럼 펠트 모자를 눌러쓰고 코트 속에 자신을 꼭꼭 숨긴 채 살았다는 것이다.
존 멀루프는 상자 안에서 필름을 꺼내 사진을 인화하기 시작했다. 인화한 김에 자기 SNS에 일부를 올렸는데, 정사각형 프레임으로 찍은 그녀의 사진은 놀랍게도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을 이끌어낸다. 그녀가 찍은 길거리 풍경이 사람들을 매혹한 것이다. 그는 내친김에 MoMA(뉴욕현대미술관) 같은 미술관에 자기가 소장한 사진을 전시할 뜻이 있는지 문의한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부정적인 답변을 듣는다. 사진이 이렇게 묻혀 버리는 게 안타까웠던 존 멀루프는 사진을 시카고 아트센터에서 전시하기로 결심한다. '비비안 마이어―시카고 거리의 사진가'라는 제목으로 말이다. 그리고 전시는 갤러리 역사상 최다 관람객을 기록한다. 우연히 발굴한 한 천재 사진가의 등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연이어 월스트리트 저널, 시카고 선 타임스 등이 그녀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한다. 스퀘어 포맷으로 찍은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은 로버트 프랭크 작품의 영향 아래 있었고, 쌍둥이 사진의 일부는 마치 다이앤 아버스의 사진과 비슷한 듯 달랐다. 수많은 대가의 흔적이 그녀의 필름 위를 스쳐 지나갔지만 '상황'을 포착하는 비비안 마이어만의 낙인은 사람들을 매혹했다. 무심함, 신경증, 고단함, 발작적으로 느껴지는 유머러스한 표정은 도시 사람들의 내면을 독창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진 작가이자 비평가인 앨런 세쿨라는 존 멀루프에게 사생활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작가에 대해 알아보라고 충고한다. 이렇게 존 멀루프는 방대한 사진을 찍어 단 한 번도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채 상자 속에 처박아둔 수수께끼 같은 여자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사실 이것은 예술계에 공공연히 퍼져 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천부적 재능이 있지만 끝내 발굴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난 비극적 천재 이야기 말이다. 다큐멘터리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는 그런 면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밥 딜런보다 더 유명해진 가수 슈거맨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서칭 포 슈거맨'의 사진가 버전처럼 읽힌다.
두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남아프리카의 영웅 슈거맨은 사실 미국의 화장실 청소부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기록하고 모으는 수집광이었던 비비안 마이어는 평생 누군가의 유모로 일했다. 두 사람 모두에게는 '천재적인'이란 수식어를 쓸 만한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살아생전 이들은 부귀영화와는 거리가 먼, 가난하고 쓸쓸한 삶을 살았다.
존 멀루프가 무려 필름 15만장이 담긴 상자를 경매장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그녀가 상자를 둘 창고 임차료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비비안 마이어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으로 바꿔 부를 수도 있는데, 인터뷰 대상자 대부분은 그녀가 양육했던 아이였다. 흥미로운 건 이제 어른이 된 이들의 입을 통해 듣는 과거의 비비안 마이어에 대한 추억이다. "그녀는 괴팍했어요!"
비비안 마이어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먼 심술궂은 사람이었고, 뉴욕타임스를 광적으로 모았으며, 기쁜 일보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고발하는 기사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커다란 코트를 입고 성큼성큼 남자처럼 걸어 다녔다. 유모였지만 결코 아이들 보폭에 걸음을 맞추지 않았고, 아이를 길가에 버려둬 경찰이 출동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아이를 바닥에 눕히고 남긴 음식을 강제로 먹이거나, 사진을 찍기 위해 "빈민가에 아이를 데리고 가지 말라"는 아이 부모의 이야기를 무시할 정도로 고집스러웠다. 아이들은 언제라도 사진 찍을 준비가 되어 있는 비비안을 잘 기억했다. 몰래 찍었다는 얘기도 있고 부탁을 하며 찍었단 말도 있지만, 대체로 그녀는 남의 감정에 상관없이 셔터를 누르고 사진을 찍었다.
좋은 사진을 찍은 것과는 별개로 비비안 마이어는 아이들에겐 좋은 유모가 아니었다. 자기 이름을 자주 바꿔 부르거나, 스스로를 스파이라고 소개하는 장면에선 마치 신분을 세탁하고 평화롭고 작은 마을에 숨어든 범죄자 같은 분위기마저 풍겼다. 하지만 그녀가 일하던 집에서 아이를 입양하려 하자 그 가족에게 했다는 말은 한 인간의 깊은 외로움을 드러낸다.
"누굴 돌볼 생각이라면 날 돌보는 건 어때요? 날 입양해요."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는 노부인의 말이 잊히지 않았다. 비비안 마이어는 뉴욕 출신이었지만, 사람들은 악센트 때문에 그녀를 프랑스 출신이라 오해했다(그녀는 그 오해를 교정하지 않았다). 인터뷰했던 사람들 입에선 '모순적, 괴팍함, 유별남, 다정함, 유머'처럼 각기 다른 단어가 튀어나오곤 했지만 사람들 모두가 동의하는 비비안 마이어에 대한 공통된 기억은 바로 '비밀스러움'이다. 스파이처럼 펠트 모자를 눌러쓰고 코트 속에 자신을 꼭꼭 숨긴 채 살았다는 것이다.
영화를 본 후, 비비안 마이어가 찍은 1950~60년대 뉴욕과 시카고 사진을 봤다. 사진 속 사람들은 차를 타고 가족 여행을 가기도 했고 얼룩진 바지를 입은 채 인상을 쓰고 있기도 했으며, 거만하게 배를 내밀거나 멍하게 벽을 보고 있기도 했다. 사진을 보는 내내 괴팍한 외로움과 기이할 정도로 슬프고 우스꽝스러운 정조가 느껴졌다. 그녀는 왜 자신의 모든 것을 숨기고 바꾸고
싶어 했을까. 그토록 숨기길 원했으면서 어째서 이토록 많이 찍고 기록하고 저장했을까. 이름과 나이·성별·직업까지 자기 정체성을 편집하는 게 가능한 SNS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녀는 은둔자가 아닌 조금 다른 삶을 살지 않았을까. 재능과 노력에 대한 평가 없이 쓸쓸하게 죽어간 천재들을 보면,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라는 감동보다는 점점 더 서글픔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