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춘희막이’(9월 30일 개봉, 박혁지 감독)의 한 장면. 주인공인 두 할머니 막이(90)와 춘희(71)가 병원을 찾는다. 의사가 막이 할머니에게 춘희 할머니의 어머니냐고 묻자 이런 답이 돌아온다. “아니, 저이가 우리 영감 ‘세컨부(둘째 처)’입니더.”
그렇다. ‘춘희막이’는 46년째 한집에서 살고 있는, 본처 막이와 후처 춘희의 모습을 2년 동안 기록한 작품이다. 여장부 같은 본처와 그저 어린애 같은 후처의 동거라니, 캐물을 이야기가 많을 것 같지만 ‘춘희막이’는 두 할머니의 일상을 담담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두 인물 사이에 오가는 큰 마음을 헤아린다. 그것이 더 좋은 휴먼 다큐를 만드는 길이라는, 박혁지(43) 감독의 믿음 때문이다. TV 다큐계에서 활약해오다 첫 극장용 장편 다큐 ‘춘희막이’를 내놓은 그를 만났다.
-할머니들의 생활을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한 느낌이다. 두 분이 속옷 차림으로 목욕하는 장면까지 나오던데. “‘춘희막이’를 찍기 전, 경인방송에서 2009년에 방영한 2부작 TV 다큐 ‘가족:여보게, 내 영감의 마누라’(이하 ‘여보게’)를 촬영하며 두 분을 처음 뵀다. 처음 ‘여보게’ 촬영을 제안드렸을 때만 해도 막이 할머니께서 ‘남세스러워 싫다’고 하셨다. 막이 할머니께서 워낙 신중하고 남의 이목을 신경 쓰는 성격이다. 그런데도 ‘여보게’에 이어 ‘춘희막이’까지 만들 수 있었던 건, 두 할머니와 내가 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처음부터 두 분을 그저 촬영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진심으로 살갑게 대했고, 두 분도 그런 나를 싫어하지 않으셨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열어 보여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두 분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주셨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고맙다.”
-‘여보게’를 만든 뒤 극장용 다큐 ‘춘희막이’를 만든 이유는. “‘여보게’는 후처를 데리고 사는 막이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두 분을 처음 뵀을 때만 해도 직관적으로 막이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춘희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바보’라 부를 정도로 의사소통이 명확히 안 되고 엉뚱한 소리를 하기 일쑤다. 그와 달리 막이 할머니는 정정하신 데다 똑 부러지는 성격에 아우라까지 풍기셨다. ‘여보게’는 자연히 정신이 온전치 못한 후처를 데리고 살아온 막이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큐가 됐다. 그런데 보름 동안 ‘여보게’를 찍으면서 춘희 할머니가 깜짝 놀랄 만큼 재치 있게 답하시는 순간을 몇 번 맞닥뜨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게 춘희 할머니의 전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보게’ 촬영이 끝난 뒤로도 두 분에 대한 다큐를 더 찍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춘희막이’를 TV 다큐가 아니라 극장용으로 만들었는데. “‘여보게’로 제3회 한국독립PD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심사위원이셨던 故 이성강 감독님(‘오래된 인력거’(2011) ‘시바, 인생을 던져’(2013) 연출)이 나를 잠깐 보자고 하시더니, 두 할머니 이야기로 극장용 다큐를 찍어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때 처음 영화 제작을 생각했다.”
-본처와 후처가 둘도 없는 삶의 동반자가 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작 이 다큐는 두 사람의 관계나 과거를 별로 들먹이지 않고, 그들이 현재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나한테는 두 분의 과거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막이 할머니가 춘희 할머니를 구박하는 것 같으면서도 살뜰히 챙기고, 춘희 할머니가 막이 할머니를 말없이 따르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과거는 다 설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막이 할머니는 지금도 저렇게 깐깐한데 젊었을 땐 어땠을까, 춘희 할머니는 젊을 때부터 구박을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 집안 형편이 넉넉지도 않은데 막이 할머니는 남편도 일찍 여의고 직접 낳지 않은 자식들을 키우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등등에 대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거라 봤다. 정작 내가 궁금했던 건 톰과 제리처럼 옥신각신하는 두 분이 왜 같이 사는 걸까, 두 할머니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다.”
-그 답을 찾았나. “그 순간을 기다리며 두 분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찍었다. 그러다 막이 할머니가 1000원·5000원·1만원짜리 지폐를 꺼내 놓고 춘희 할머니에게 화폐 단위의 개념을 가르치려 할 때 ‘아, 이거구나’ 했다. 막이 할머니는 평소 춘희 할머니를 ‘바보’ ‘태평이’라고 부르신다. 춘희 할머니가 돈 계산을 못할 걸 빤히 알면서도, 그 뒤로 몇 번이나 화폐 단위를 가르치려 하셨다.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끝까지 춘희 할머니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저게 최고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막이 할머니가 정말 큰사람처럼 느껴졌다.”
-막이 할머니가 돈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마다 춘희 할머니는 도통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 태도가 굉장히 묘하게 비친다. “맞다. 사람들은 춘희 할머니의 정신 연령이 일곱 살 정도라고 하는데, 가끔 그걸 뛰어넘는 재치를 보여줄 때가 있다. 극 중에 막이 할머니 앞에서 숫자를 셋 이상 세지 못하던 춘희 할머니가 어쩌다 열이 넘는 숫자를 세는 순간이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춘희 할머니가 막이 할머니 앞에서 일부러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 아닌가 짐작하게 된다. ‘자꾸 나한테 혼자 이것저것 하라고 가르치지 말고, 내 곁을 먼저 떠날 생각하지 말고, 언제까지나 같이 삽시다’ 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게 아닐까 하는 짐작 말이다. 춘희 할머니가 정말 어디까지 알고 그러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불가사의한 부분이 많다.”
-각각 관객 296만 명·480만 명을 동원한 ‘워낭소리’(2009, 이충렬 감독)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진모영 감독, 이하 ‘님아’) 등 기록적인 흥행을 이어 온 다큐는 현대인이 잊고 살아가는 따뜻한 삶의 가치를 일깨웠다. ‘춘희막이’가 일깨우는 가치라면. “2011년 겨울부터 2년 동안 두 분의 모습을 촬영하며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까지 진심으로 대할 수 있구나’ 하는 점에 놀랐다. 두 분이 아옹다옹하는 듯해도 사소한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서로에 대한 진심이 담겨 있다. 자연스레 ‘나는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휴먼 다큐가 해야 할 일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두 할머니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희한한 할머니들이네, 귀엽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큐를 보는 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것 말이다.”
-‘워낭소리’와 ‘님아’는 주인공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와 달리 ‘춘희막이’의 결말은 두 할머니가 계속 살아가는 모습을 비추는데. “사실 ‘춘희막이’는 딱히 사건이랄 게 없는 다큐다. ‘워낭소리’와 ‘님아’처럼 결말이 극적인 것도 아니다. 결국 다큐는 대상의 현실을 찍는 것이고, 그건 감독이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감독으로서 판단하기에도 극적인 결말보다는 두 할머니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으로 끝 맺는 게 맞다고 봤다. 관객이 극장문을 나서면서 ‘두 할머니가 지금도 경북 영덕의 시골 마을에서 티격태격하며 서로 위해주며 살고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작품의 여운을 더 오래 남기는 방법 아닐까.”
"2년 동안 촬영하며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 관객이 삶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좋은 휴먼 다큐 아닐까"
글=장성란 기자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5.09.28
-할머니들의 생활을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한 느낌이다. 두 분이 속옷 차림으로 목욕하는 장면까지 나오던데. “‘춘희막이’를 찍기 전, 경인방송에서 2009년에 방영한 2부작 TV 다큐 ‘가족:여보게, 내 영감의 마누라’(이하 ‘여보게’)를 촬영하며 두 분을 처음 뵀다. 처음 ‘여보게’ 촬영을 제안드렸을 때만 해도 막이 할머니께서 ‘남세스러워 싫다’고 하셨다. 막이 할머니께서 워낙 신중하고 남의 이목을 신경 쓰는 성격이다. 그런데도 ‘여보게’에 이어 ‘춘희막이’까지 만들 수 있었던 건, 두 할머니와 내가 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도 처음부터 두 분을 그저 촬영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진심으로 살갑게 대했고, 두 분도 그런 나를 싫어하지 않으셨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삶을 열어 보여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두 분이 나를 위해 그렇게 해 주셨다는 사실이 생각할수록 고맙다.”
-‘여보게’를 만든 뒤 극장용 다큐 ‘춘희막이’를 만든 이유는. “‘여보게’는 후처를 데리고 사는 막이 할머니가 주인공이다. 두 분을 처음 뵀을 때만 해도 직관적으로 막이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춘희 할머니는 동네 사람들이 ‘바보’라 부를 정도로 의사소통이 명확히 안 되고 엉뚱한 소리를 하기 일쑤다. 그와 달리 막이 할머니는 정정하신 데다 똑 부러지는 성격에 아우라까지 풍기셨다. ‘여보게’는 자연히 정신이 온전치 못한 후처를 데리고 살아온 막이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큐가 됐다. 그런데 보름 동안 ‘여보게’를 찍으면서 춘희 할머니가 깜짝 놀랄 만큼 재치 있게 답하시는 순간을 몇 번 맞닥뜨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게 춘희 할머니의 전부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보게’ 촬영이 끝난 뒤로도 두 분에 대한 다큐를 더 찍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었다.”
-‘춘희막이’를 TV 다큐가 아니라 극장용으로 만들었는데. “‘여보게’로 제3회 한국독립PD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심사위원이셨던 故 이성강 감독님(‘오래된 인력거’(2011) ‘시바, 인생을 던져’(2013) 연출)이 나를 잠깐 보자고 하시더니, 두 할머니 이야기로 극장용 다큐를 찍어도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때 처음 영화 제작을 생각했다.”
-본처와 후처가 둘도 없는 삶의 동반자가 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작 이 다큐는 두 사람의 관계나 과거를 별로 들먹이지 않고, 그들이 현재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나한테는 두 분의 과거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막이 할머니가 춘희 할머니를 구박하는 것 같으면서도 살뜰히 챙기고, 춘희 할머니가 막이 할머니를 말없이 따르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과거는 다 설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막이 할머니는 지금도 저렇게 깐깐한데 젊었을 땐 어땠을까, 춘희 할머니는 젊을 때부터 구박을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 집안 형편이 넉넉지도 않은데 막이 할머니는 남편도 일찍 여의고 직접 낳지 않은 자식들을 키우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등등에 대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거라 봤다. 정작 내가 궁금했던 건 톰과 제리처럼 옥신각신하는 두 분이 왜 같이 사는 걸까, 두 할머니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다.”
-그 답을 찾았나. “그 순간을 기다리며 두 분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찍었다. 그러다 막이 할머니가 1000원·5000원·1만원짜리 지폐를 꺼내 놓고 춘희 할머니에게 화폐 단위의 개념을 가르치려 할 때 ‘아, 이거구나’ 했다. 막이 할머니는 평소 춘희 할머니를 ‘바보’ ‘태평이’라고 부르신다. 춘희 할머니가 돈 계산을 못할 걸 빤히 알면서도, 그 뒤로 몇 번이나 화폐 단위를 가르치려 하셨다.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끝까지 춘희 할머니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저게 최고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했다. 막이 할머니가 정말 큰사람처럼 느껴졌다.”
-막이 할머니가 돈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마다 춘희 할머니는 도통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 태도가 굉장히 묘하게 비친다. “맞다. 사람들은 춘희 할머니의 정신 연령이 일곱 살 정도라고 하는데, 가끔 그걸 뛰어넘는 재치를 보여줄 때가 있다. 극 중에 막이 할머니 앞에서 숫자를 셋 이상 세지 못하던 춘희 할머니가 어쩌다 열이 넘는 숫자를 세는 순간이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춘희 할머니가 막이 할머니 앞에서 일부러 모르쇠로 일관하는 건 아닌가 짐작하게 된다. ‘자꾸 나한테 혼자 이것저것 하라고 가르치지 말고, 내 곁을 먼저 떠날 생각하지 말고, 언제까지나 같이 삽시다’ 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게 아닐까 하는 짐작 말이다. 춘희 할머니가 정말 어디까지 알고 그러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여전히 불가사의한 부분이 많다.”
-각각 관객 296만 명·480만 명을 동원한 ‘워낭소리’(2009, 이충렬 감독)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진모영 감독, 이하 ‘님아’) 등 기록적인 흥행을 이어 온 다큐는 현대인이 잊고 살아가는 따뜻한 삶의 가치를 일깨웠다. ‘춘희막이’가 일깨우는 가치라면. “2011년 겨울부터 2년 동안 두 분의 모습을 촬영하며 ‘사람이 사람을 저렇게까지 진심으로 대할 수 있구나’ 하는 점에 놀랐다. 두 분이 아옹다옹하는 듯해도 사소한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서로에 대한 진심이 담겨 있다. 자연스레 ‘나는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휴먼 다큐가 해야 할 일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두 할머니가 사는 모습을 보면서 ‘희한한 할머니들이네, 귀엽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큐를 보는 나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것 말이다.”
-‘워낭소리’와 ‘님아’는 주인공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와 달리 ‘춘희막이’의 결말은 두 할머니가 계속 살아가는 모습을 비추는데. “사실 ‘춘희막이’는 딱히 사건이랄 게 없는 다큐다. ‘워낭소리’와 ‘님아’처럼 결말이 극적인 것도 아니다. 결국 다큐는 대상의 현실을 찍는 것이고, 그건 감독이 어찌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감독으로서 판단하기에도 극적인 결말보다는 두 할머니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으로 끝 맺는 게 맞다고 봤다. 관객이 극장문을 나서면서 ‘두 할머니가 지금도 경북 영덕의 시골 마을에서 티격태격하며 서로 위해주며 살고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작품의 여운을 더 오래 남기는 방법 아닐까.”
"2년 동안 촬영하며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됐다 관객이 삶을 뒤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좋은 휴먼 다큐 아닐까"
글=장성란 기자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5.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