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봉우리 이하연 대표.

해암도 2015. 5. 14. 19:32


  • 노점으로 시작해 10년만에 최고급 한정식집 연 이하연


봉우리 이하연 대표. /이코노미조선
봉우리 이하연 대표. /이코노미조선

종종 ‘평론가는 뭘 먹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방송국에서 걸려오는 전화의 빈도는 더 잦다. 젊은 작가들의 칭얼대는 목소리보다 더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건 ‘적당히 아는 사람’으로부터의 전화다.

“김 대표님, 미국인 바이어 네 분을 모시고 가는데 분위기 좋은 한식집 없을까요?”

“선생님, 상견례 장소 근사한 데 좀 가르쳐 주세요.”
“지훈이 소개로 연락드리는데요, 클라이언트들 감동시킬만한 레스토랑을 찾고 있습니다만…”

가지가지다. 후사(厚謝)하겠다는 미끼에도, 프로그램 자문료를 드리겠다는 유혹에도 웬만해선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집이 있다. 바로 봉우리다. 내 아지트가 어수선해지는 게 일단 싫고, 가치를 모르는 이들의 싸구려 평가도 싫기 때문이다.

‘친구를 만나는 마을(逢友里)’이라는 이름부터 꽤 근사하다. 정재계는 물론이고 문화계 인사들 중에서도 미식가라 자부하는 이들의 단골집이다. 자~ 문을 한 번 열고 들어가 볼까요?

이하연 대표(사진)의 봉우리는 역삼동 LG아트센터 뒤 먹자골목에서도 이면도로에 자리해 있다. 사실 위치만 보자면 높은 점수를 줄만한 곳이 아닌데 왜 다들 이 집에 예약을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이하연 대표는 “외식업은 종합예술이다. 요리뿐만 아니라 무대라 볼 수 있는 매장 인테리어부터 조명, 음악, 벽에 거는 그림 하나까지 한 호흡으로 숨을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조선
이하연 대표는 “외식업은 종합예술이다. 요리뿐만 아니라 무대라 볼 수 있는 매장 인테리어부터 조명, 음악, 벽에 거는 그림 하나까지 한 호흡으로 숨을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조선

만두 장사로 시작, 시장통·공장촌에서 연이어 성공
어느 날 문득 주인장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어떻게 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느냐고. 먹고 살기 위해서였단다. 강남 최고라 불리는 한정식집 사장 입에서 입에 풀칠하려고 밥장사 시작했다는 말이 쏟아져 나왔다. 1987년도라고 했다. 남편이 호주로 유학을 떠난 게. 덩그마니 남겨진 아이들과 살아남고자 장사를 시작했다. 손에 든 돈이 얼마 없어 남이 쓰던 ‘리어카’를 구입하고 만두 장사를 시작했다.

간절하면 용감해진다고 했던가? 기를 쓰고 팔았다. 밤새 만든 만두가 날개 돋친 듯 팔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연스레 정육점을 드나드는 횟수와 거래하는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비록 아주 작은 성공이지만 이를 지켜본 정육점 대표는 핀잔과 자랑으로 너스레를 떨곤 했다.

“한 개에 50원 하는 만두에 국내산 돼지목살을 쓰는데 안 사먹으면 손님이 손해지. 만두는 고기가 기본이여. 우리 고기가 워낙 맛있잖어~”

‘재료가 좋으면 손님들이 알아서 줄을 선다’는 사실을 배운 이 대표는 다음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리어카 만두를 시작한 지 정확히 1년. 그녀는 서울 대림동 부암시장에 가게를 얻는다. 이번에도 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템을 골랐다. 김밥, 순대, 만두, 족발 등 시장통을 오가는 사람들의 발목을 사로잡을 메뉴를 전면에 배치했다. 예상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한 번 찾아온 손님은 무조건 단골로 만들겠다는 그녀의 전략은 전장(戰場)에서 빛을 발했다. 시장통 행인들이 손님이 되고, 그 손님들이 단골이 되었다. 2연타석 홈런에 고무된 ‘이하연 선수’는 대림동 공장촌으로 자리를 또 한 번 옮긴다.

구내식당을 만들 수 없는 영세한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이 그녀의 새로운 신규 고객 명단에 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1300원짜리 백반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재료를 구입하고 메뉴를 연구했다. 제철 식재료로 만든 이하연의 밥을 먹기 위해 인근 공장의 인부들은 점심시간을 알리는 ‘땡’ 소리와 함께 단거리 육상선수들처럼 달려와 가게를 채웠다. 막 지은 하얀 밥 위에 쭉쭉 찢어 올려 먹는 포기김치가 한몫을 단단히 했다. 어머니가 밥숟가락에 올려주시던 그 김치의 추억을 고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해주고 싶었다. 이 매력에 중독된 손님들 덕분에 하루 반가마니씩 쌀을 안쳤다.

“식당으로는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어요. 마치 공식이 있는 거 같아요. 제가 재료 찾는 데 투자하는 시간만큼 손님의 수가 늘고, 재료비를 올리는 만큼 매출도 따라 올라요.”

가장 기본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성공 공식’을 꿰뚫은 이하연 대표는 덕성여대 앞으로 자리를 옮겨 새로운 종목에 도전한다. 김치전, 두부김치, 김치찌개 등 김치에 집중한 주점에 과감히 투자했다. 외식업에서 4연타석 홈런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고객의 기호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하고 맞춰갈 수 있다는 건 그녀가 가진 재능임에 틀림이 없다.

“글쎄요, 저는 어머님과 그리고 시골에서 자란 덕을 많이 봤어요. 제 어머니가 정말 솜씨가 좋으셨거든요. 된장, 고추장, 간장은 물론이고 젓갈까지 직접 다 담그셨어요.”


사람 좋아해야 외식업 성공할 수 있어
9남매가 살던 전북 익산의 웅포에는 나루가 있었다. 군산항에서 강경까지 가는 길목의 딱 중간. 꼴뚜기, 황석어가 넘쳐난 덕에 이 대표 어머니의 김치에는 늘 싱싱한 해산물이 듬뿍 들어갔다. 봉동으로 생강을, 강경으로 새우젓을 사러 다녔던 모습이 지금의 그녀와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다. 단 한 가지 차이점을 고르라 하면 기상 시간이다. 하루 종일 앉지 않았던 어머니가 그렇게 징글징글 했었다는데, 이하연 대표는 오히려 한술 더 뜬다. 매일 새벽 5시면 집을 나선다.

  
 1987년 5월 노점으로 시작해 강남 최고급 한정식당을 내는 데 딱 10년이 걸렸다. 거리음식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을 운영할 거라 다짐했던 본인과의 약속을 10년 만에 지킨 것이다. 그렇게 1997년 8월 ‘봉우리’호를 강남에 무사히 안착시킨다. 타고난 부지런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이기에 지금도 새벽시장을 직접 본다. 헌데 죽을 만큼 자존심 상하고 버티기 힘들 만큼 어려웠던 시간을 보낸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달콤한 행복이 아니라 막막한 어둠이었다.

바로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였다.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불굴의 의지로 그 암담한 터널을 뚫고 지나왔노라 무용담처럼 쏟아내는 이들도 많지만 오히려 직격탄을 맞은 당사자들은 말이 없다. 다시 떠올리기도 끔찍한 그 폭풍의 한복판에 이하연 대표가 있었다. 나라 살려보겠다고 금을 모으기 시작하면서부터 봉우리의 손님은 뚝 끊겼다. 산전수전 공중전에 심리전까지 끝낸 백전노장 이하연이지만 직원들의 동요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고 읍소를 했다. 조금만 더 버텨보자고…. 이튿날 직원들은 급여를 스스로 삭감하겠다고 나섰고 오너와 직원들의 유대관계는 물 먹은 시멘트마냥 단단해졌다. 그해 10월부터는 밀려드는 손님들로 예약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떻게, 왜 하필 그녀만 빠른 속도로 회복할 수 있었을까?

“외식업은 종합예술이에요. 요리뿐만 아니라 무대라 볼 수 있는 매장 인테리어부터 조명, 음악, 벽에 거는 그림 하나까지 한 호흡으로 숨을 쉬어야 해요.”

대한민국 식품명인 58호 지정
갑자기 그녀가 무서워진다. 이런 완벽한 각본이 있었기에 최고급 재료만을 고집하는 배짱을 부릴 수 있었던 게야. 이런 집요한 노력 덕분일까. 이하연 대표는 얼마 전 대한민국 식품명인 58호로 지정되었다. 가문의 영광이라는 명인이 되었는데도 새벽이면 농수산물도매시장에 나가 장을 보고, 아침나절에는 남양주 덕소의 작업실에서 김치를 담그고, 저녁에는 봉우리에서 고객들을 맞는다. 거인처럼 느껴지는 그녀에게 물었다. 외식업의 성공비결과 예비 창업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을.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야기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다. 사람을 좋아해야 한단다. 스스로에게 물어서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고 퍼주기를 좋아하는지 체크해보란다. 만약 사람이 다가오는 게 무섭고 피하고 싶다면 당장 외식업에 대한 관심을 끊으라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였다. 오너가 식재료를 알고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새로운 식재료를 만나면 바로 요리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라야 자격이 있다고 말할 때는 말의 속도가 빨라지고 눈이 커졌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 화제를 돌렸다.

“지금까지 외식업에 종사하며 가장 고마운 사람이 누구였어요?”

은근히 가족 누구이거나 요리를 배운 은사님의 함자가 나오길 기대하면서 던진 질문이었다.

“당연히 손님이죠. 전국에 식당이 67만개 정도 있대요. 그 중에서 오늘 이 시간에 찾아와준 거 아니에요? 얼마나 고맙고 예뻐요.”

사람 좋아하고, 퍼주기 좋아하는 이 대표에게는 운영 원칙이 하나 있다. 예약을 받되 반드시 방 하나는 비워둔다. 밥이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 찾아오는 지인들을 위한 배려다. 언제 누가 찾아올지 모르니 따뜻한 밥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기 위해 이런 방침을 세웠단다.

“이 맛에 주인 하는 거예요. 그것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어요?”

김치명인이 되고 난 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찾는다. 광고 모델 해달라고 찾아오는 이들도 있고, 대학에서 강의 맡아달라고도 오고, 지자체는 물론 일본에서도 ‘김치쇼’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텐데 하고 싶은 일이 또 있다고 한다. 그는 남양주 덕소에 이하연 명인의 김치체험박물관을 짓고 싶어 한다. 어느 누구라도 놀러와 김치를 배우고, 즐기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이면 족하다. 그 장소에서 즐길 줄 아는 이들과 어우러지는 게 지금의 꿈이라 한다. 이 대표의 이름 하연은 ‘물 하(河)’에 ‘그럴 연(然)’자를 쓴다. 물이 흐르듯 그렇게 친구를 만나는 마을(봉우리). 그녀는 이름과 상호 속에 장사에 대한 마음가짐과 철학을 묻어두었던 모양이다.

“그동안 어느 분이 가장 맛있게 음식을 드시던가요?”
“음…시장한 분이 가장 맛있게 드시던데요.”

시장을 역임한 분이라는 소리야? 아니면 배가 고팠던 분이라는 소리야? 우문(愚問)에 현답(賢答)이니 두 손을 들 수밖에. 내 모습을 보며 소녀처럼 까르르 웃어댄다. 또 보자며 손을 내미는데 웃음과는 달리 손이 까칠하다. 그래 이 손이 노점에서 출발해 명인 타이틀까지 거머쥔 손이란 말이지.

[김치명인 이하연의 김치 담그기]
노점으로 시작해 10년만에 최고급 한정식집 연 이하연②
1. 김치명인 이하연의 김치 담는 모습을 다 묘사하기에는 지면이 턱 없이 부족하다. 그래서 영상(www.youtube.com/watch?v=MM13OVweTb8&feature=youtu.be) 을 준비했다. 영상에서 당신은 대한민국 식품 명인의 김치 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코를 가까이 대면 혹시 달보드레한 그녀의 김치 내음이 화면을 통해 전해질지도 모르겠다.

2. 사실 IMF 외환위기 때 말고도 시련이 한 차례 더 있었다. 제조와 유통에 대한 공부 없이 그저 김치에 대한 열정만 가지고 덤볐던 ‘봉우리 김치공장 프로젝트’가 보기 좋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덕에 외식업에 뛰어들어 벌었던 금쪽같은 15억원을 한 방에 날렸다. 심각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는데 그녀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인간은 엎어지고 깨지고 하면서 배우고 느는 거죠. 없어지니까 겸손해지더라고요. 공부도 더 하게 되고. 덕분에 조선시대 김치를 재연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어요. 김치명인이 되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니까요.”


김유진 맛칼럼니스트    조선    입력 : 2015.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