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아내 모르게 부모 형제에게 비상금을 털어준 경험,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아내에게 발각되었을 때 들었던 비난의 말 역시
누구나 비슷하지요. 왜 내게 미리 상의하지 않았느냐? 이래서야 어떻게 믿고 살겠느냐?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남편보다는, 도리어 반발심을 느끼는 남편이 더 많은 듯합니다. 생각이 다른 아내를 말로는 당할 수가 없어서, 독자노선을 걷겠노라는 오늘의 손님.
여러분의 경험을 들려주세요.
홍여사 드림
십여 년 전 처갓집에 처음 인사드리러 갔을 때 들은 말이 저는
두고두고 생각납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장모님이 은근히 딸 자랑을 하시더군요. 세상에 쟤만큼 야무진 살림꾼은 없을 거다. 어릴 때부터 돈이라면
벌벌 떨어. 바짝 긴장해 얼이 빠져 있던 저는 대충 듣고 그냥 좋은 얘기인가보다 했습니다. 아껴 쓰고 저축하는 아내라면, 더 바랄 게 있나
했지요.
그러나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지금, 저는 아내의 '야무진 경제관념'에 대해 고마움보다 불만이 더 큰 상태입니다.
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아내는 살림을 틀어쥐더군요. 본인 급여도, 내 급여도 모두 직접 관리하겠다며 통장이며 뭐며 다 가져갔습니다. 다 내주고
나니 좀 허탈하기는 했지만, 결혼하면 원래 그러는 건가 보다 했죠. 얄팍한 용돈에 적응해서 살아가다 보면 아내가 나 대신 살림을 불려주겠지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긴축정책은 저한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총각 시절에 제가 부모님께 매달 드리던 약간의 용돈마저
끊어버리자는 데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혼을 했으면 부모님께도 더 잘해 드려야지 어떻게 드리던 걸 끊어버리느냐고 하자, 아내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내가 우리 엄마 드리던 것도 끊을 거야. 양가에 공평해야지. 우리 앞으로 아이 태어나면 살벌하게 돈 들어가.
그
뒤로 살면서 백번도 더 들은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친정에도 안 하니까, 양가에 공평하자. 앞으로 돈 정말 많이 들어간다. 그 말이 나오면
저는 매번 말문이 막힙니다.
사실 처갓집과 저희 집은 분위기가 다릅니다. 장인·장모님은 제 부모님보다 능력도 있으시고 연배도
젊으셔서 그런지 자식한테 의존하시지를 않습니다. 속으로는 바라는 게 있으시다 해도, 제 아내를 비롯해 자식들이 부모님께 뭘 해 드릴 생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부모님께 받을 생각만 하죠. 심지어 장인어른 생신에도 누구 하나 밥값을 안 내기에, 제가 나섰다가 아내에게 엄청
혼났습니다. 형부도 가만있는데 당신이 왜 나서냐고요.
그에 비해 저희 집은 상황이 좀 다릅니다. 자식한테 부담 주기 싫은 마음이야
똑같겠지만, 제 부모님은 형편상 의지를 전혀 안 할 수는 없으시죠. 그리고 저도 아내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자식입니다. 이만큼 키워주셨으니까,
더 늦기 전에 부모님께 뭐라도 좀 해 드리고 싶습니다.
능력이 부족해서 완전히 책임져 드리지는 못한다 해도, 자식 덕을 가끔은 보게
해 드려야지요. 그런 것도 없으면 뭐 하러 등골 빠지게 자식을 키우나요?
그러나 아내는 제가 요즘 세상을 너무 모른답니다. 양가
부모가 뒤를 받쳐줘도 일어설까 말까 한 세상이라네요. 효도도 좋지만,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부모님한테 받은 만큼 자식한테 쏟아부으면 되는
거랍니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 아들한테 그런 식으로 부담 줄 거냐고 따지네요.
말로 싸워서는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는 걸 깨닫고,
저는 포기를 했습니다. 아내에게 알리지 않고, 제 나름대로 부모님을 챙기기 시작했지요. 어쩔 수 없이 비상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저절로 짠돌이
생활을 하게 되더군요.
그렇게 모아서 얼마 전 어머니께 봉투를 하나 만들어 드렸습니다. 어머니가 몇 달째 원인 모를 두통이 계속돼서
고생하셨는데, 이번에 정밀 검사를 한번 받아보셨으면 싶어서요.
그런데 문제는 그 일을 아내가 알게 됐다는 겁니다. 어머니는 눈치껏
입 다물고 계셨는데 아버지가 며느리한테 직접 전화까지 걸어서 고맙다고 하셨다네요. 여기저기 MRI까지 찍어 확인하고 나니 이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고요.
그로 인해 아내에게서 터져 나온 비명과 잔소리는 제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더군요. 왜 삼남매 중에 유독 당신만
나서냐? 부부간에 왜 딴 주머니를 차고, 거짓말을 하느냐, 왜 나만 나쁜 며느리 만드느냐. 미리 상의하면 누가 못 드리게
하느냐?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못 주게 하잖아. 당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한 푼도 안 드리고 싶잖아. 부모님을 돈
들어갈 구멍으로 생각하는 사람한테 무슨 상의를 해.
그쯤에서 저는 그만 입을 닫았고, 아내한테서 쏟아지는 비난을 고개 숙이고 듣기만
했지만, 가슴속 불만은 점점 더 고개를 여전히 치켜들더군요. 부모님이나 형제들한테 들어가는 돈을 줄인 만큼 우리가 과연 덜 먹고 덜 입는가?
애초에 처지가 다른 분들인데, 양가에 공평하자는 말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가? 그리고 과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자식한테만 이렇게 무한정 쏟아붓기만
해야 하는가? 늙어서 백만원짜리 봉투 하나도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되는데….
아내에게 들킨 게 유감스러울 뿐, 저는 앞으로도 아내에게
미리 상의할 생각은 없습니다. 본가에도 처가에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할 겁니다. 아내는 저에게 부부간 신뢰를 깨뜨렸다고 하는데, 뭐라고
설명해야 말로 당해낼 수가 있을까요?
이메일 투고는 mrshong@chosun.com,
홍 여사 답변은 troom.premiu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