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배우려 유럽 갔다 전공 선회… 악기학교 꼴찌 입학해 수석 졸업
국내 유통관행에 막혀 딱 한 대 판매
페북 친구들이 연 전시회에 300명
연주자들 "이렇게 깊은 소린 처음"
국내 유통관행에 막혀 딱 한 대 판매
페북 친구들이 연 전시회에 300명
연주자들 "이렇게 깊은 소린 처음"
"외롭고
힘들었다." 박경호(44)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공부할 때 그러했고,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지 12년이 된 지금은 "더 외롭고
힘들다"고 했다. 박경호는 악기 장인이다. 이탈리아 페루자에 있는 구비오(Gubbio) 국립악기학교에서 한국인으로 처음 악기 제작을 배웠다.
패션 디자이너를 꿈꾸며 이탈리아로 갔다가 방향을 튼 지 15년 됐다. 그동안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기타를 50대 정도 만들었다. 그중 딱
한 대 팔았다. 2000만원짜리 바이올린 한 대. 그가 말한다. "하지만 소리는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난감한 바보 장인
이야기다.
전북 부안 촌에서 태어난 박경호는 짚 공예 재주가 많은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공부는 별 관심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갔다. 손재주 하나 믿고, 박경호는 양장 학원을 나와 의류 회사 직원이 되었다. 그러다 결혼 예복 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직했다. 결혼도 했다. 그리고 자기 브랜드를 걸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장사 수완은 없었다. 망했다. '공부나 더 해야겠다.' 이탈리아로 떠났다. 1999년이다.
전북 부안 촌에서 태어난 박경호는 짚 공예 재주가 많은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공부는 별 관심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갔다. 손재주 하나 믿고, 박경호는 양장 학원을 나와 의류 회사 직원이 되었다. 그러다 결혼 예복 회사에 디자이너로 취직했다. 결혼도 했다. 그리고 자기 브랜드를 걸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장사 수완은 없었다. 망했다. '공부나 더 해야겠다.' 이탈리아로 떠났다. 1999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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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가
들고 있는 바이올린 이름은‘한반도의 꿈’이다. 전형적인 곡선형 악기와 달리 직선적인 실험작이다. 바보스럽기까지 한 고집이 만든 작품이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패션 도시
피렌체로 가다가 훗날 축구 선수 안정환이 뛴 도시 페루자에 들렀다. 거기에서 아무 생각 없이 구비오 악기 학교에 들렀다. 창에서 쏟아지는 빛줄기
속에 건조목들이 빛나고 있었다. 나무 조각에서 향기도 났다. 현악기 소리가 울렸다. 패션은 망각됐다. 바로 통역과 함께 입학 면접을 봤다.
현악기와 활 제작 분야였다. 음악, 악기는 몰랐다. 영어도 이탈리아어도 몰랐다. 시험관 5명이 다 웃었다. "악기를 아나?" "모른다. 하지만
나무 향과 소리가 좋다. 자신 있다." 끌로 나무 깎는 모습을 보던 시험관들이 합격시켰다. 꼴찌였다. 아내 방진홍(43)에게는 패션 학교에
입학했다고 속였다. 방진홍은 1년 뒤에야 진실을 알고 망연자실했지만,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며 번 돈을 부쳐주며 응원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선생들은 그림으로 그를 가르쳤다. 오전에는 실기, 오후에는 이론과 연주다. 도면을 그리고, 나무를 깎고, 칠하고, 말리고, 또 칠하고…. 선생이 물었다. "왜 너는 3㎝로 깎으라고 하면 꼭 3㎝로 깎는가." 판소리로 치면 득음(得音)의 순간이었다. 박경호가 말했다. "소리에 정석이 없다는 말이었다. 나무에 숨어 있는 소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장 스파타피(Spattapi)는 박경호를 자기 집까지 불러 가르쳤다.
한창 물이 오를 무렵 돈이 떨어졌다. 지금은 명조리사가 된 가난한 유학생 박찬일이 그 무렵 놀러 왔다가 미완의 기타를 봤다. 박경호는 다음 날 책상에서 지폐 몇 장과 편지를 보았다. "많이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 기타 이름은 '찬일 testa'이다. 박경호는 기타와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그리고 활을 만들었다. 다른 학생들은 악기 2대를 만들었다. 3년 뒤, 꼴찌 입학생은 수석으로 졸업했다. 선생은 추천서를 써주며 나폴리나 일본으로 가라고 권했다. 학생은 거부했다. 2003년 야심만만한 젊은 악기장이 귀국했다. 서울 방배동에 '경호Park 현악연구소'를 열었다.
그런데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었다. "들어오는 일이라는 게 제작이 아니라 수리 일색이었다. 고급 악기는 유통 경로가 정해져 있고, 그러다 보니 제작자는 먹고살려고 수리만 하다가 결국엔 제작을 않게 되고." 국내 제작 학원에서 초단기로 제작을 배운 사람들은 고급이 아닌 대중적인 염가 악기를 만들었다.
박경호는 수리 대신 막노동을 택했다. 낮에는 노동판을 돌아다녔다. 밤에는 나무를 미친 듯이 다듬었다. 사무실 임차료도 미친 듯이 쌓여갔다. 박경호는 다시는 악기 안 만든다고 작심하고 낙향했다. 2007년이다.
2년 동안 끌과 칼은 창고에 집어넣고, 흙집을 지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서다. 농사를 지었다. 콩을 짓고 고추를 지었다. 집이 완성된 그날 악기를 꺼냈다. 소리가 좋았다. 잘 마른 흙집과 악기가 공명했다. 기분이 좋았다. 이를 갈며 망각했던 악기가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다시 끌과 조각도를 잡으니, 농부요 막노동자인 이 사내가 만들어낸 악기가 모두 합쳐 50점이다. 흔히 보는 곡선형이 아니라, '한반도의 꿈'(2014) '돌탑의 전설'(2013)처럼 비대칭에 직선형 바이올린도 있다. 나무의 소리를 찾아내는 실험작들이다. 악기 하나 완성에 반년씩 걸렸다.
지난 주말, 서울 성수동 서울의 숲 커뮤니티센터 전시실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부안 흙집에 숨어 있던 악기 20여 점이 서울로 나들이했다. 그의 페이스북 친구들이 마련한 악기 전시회다. 서로 본 적 없는 이들이 도록을 만들고 포스터를 만들고 전시 공간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전문 연주가와 친구들이 그 악기로 공연했다. 300명 넘는 관객이 그 웅장한 소리를 들었다. 비올라 '아들을 위한 변주'(2002)를 연주한 한 비올리스트는 "이렇게 웅장하고 깊은 소리는 처음 들었다"고 했다. 박경호가 말했다. "아무리 구차하게 살아도 나는 악기를 만든다. 소리는, 배신하지 않는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선생들은 그림으로 그를 가르쳤다. 오전에는 실기, 오후에는 이론과 연주다. 도면을 그리고, 나무를 깎고, 칠하고, 말리고, 또 칠하고…. 선생이 물었다. "왜 너는 3㎝로 깎으라고 하면 꼭 3㎝로 깎는가." 판소리로 치면 득음(得音)의 순간이었다. 박경호가 말했다. "소리에 정석이 없다는 말이었다. 나무에 숨어 있는 소리를 찾아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장 스파타피(Spattapi)는 박경호를 자기 집까지 불러 가르쳤다.
한창 물이 오를 무렵 돈이 떨어졌다. 지금은 명조리사가 된 가난한 유학생 박찬일이 그 무렵 놀러 왔다가 미완의 기타를 봤다. 박경호는 다음 날 책상에서 지폐 몇 장과 편지를 보았다. "많이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 기타 이름은 '찬일 testa'이다. 박경호는 기타와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그리고 활을 만들었다. 다른 학생들은 악기 2대를 만들었다. 3년 뒤, 꼴찌 입학생은 수석으로 졸업했다. 선생은 추천서를 써주며 나폴리나 일본으로 가라고 권했다. 학생은 거부했다. 2003년 야심만만한 젊은 악기장이 귀국했다. 서울 방배동에 '경호Park 현악연구소'를 열었다.
그런데 해도 해도 너무한 것이었다. "들어오는 일이라는 게 제작이 아니라 수리 일색이었다. 고급 악기는 유통 경로가 정해져 있고, 그러다 보니 제작자는 먹고살려고 수리만 하다가 결국엔 제작을 않게 되고." 국내 제작 학원에서 초단기로 제작을 배운 사람들은 고급이 아닌 대중적인 염가 악기를 만들었다.
박경호는 수리 대신 막노동을 택했다. 낮에는 노동판을 돌아다녔다. 밤에는 나무를 미친 듯이 다듬었다. 사무실 임차료도 미친 듯이 쌓여갔다. 박경호는 다시는 악기 안 만든다고 작심하고 낙향했다. 2007년이다.
2년 동안 끌과 칼은 창고에 집어넣고, 흙집을 지었다. 어머니와 함께 살기 위해서다. 농사를 지었다. 콩을 짓고 고추를 지었다. 집이 완성된 그날 악기를 꺼냈다. 소리가 좋았다. 잘 마른 흙집과 악기가 공명했다. 기분이 좋았다. 이를 갈며 망각했던 악기가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다시 끌과 조각도를 잡으니, 농부요 막노동자인 이 사내가 만들어낸 악기가 모두 합쳐 50점이다. 흔히 보는 곡선형이 아니라, '한반도의 꿈'(2014) '돌탑의 전설'(2013)처럼 비대칭에 직선형 바이올린도 있다. 나무의 소리를 찾아내는 실험작들이다. 악기 하나 완성에 반년씩 걸렸다.
지난 주말, 서울 성수동 서울의 숲 커뮤니티센터 전시실에서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부안 흙집에 숨어 있던 악기 20여 점이 서울로 나들이했다. 그의 페이스북 친구들이 마련한 악기 전시회다. 서로 본 적 없는 이들이 도록을 만들고 포스터를 만들고 전시 공간을 잡아주었다. 그리고 전문 연주가와 친구들이 그 악기로 공연했다. 300명 넘는 관객이 그 웅장한 소리를 들었다. 비올라 '아들을 위한 변주'(2002)를 연주한 한 비올리스트는 "이렇게 웅장하고 깊은 소리는 처음 들었다"고 했다. 박경호가 말했다. "아무리 구차하게 살아도 나는 악기를 만든다. 소리는, 배신하지 않는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입력 : 2014.1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