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강연] 작가 김훈 "나는 왜 쓰는가"

해암도 2014. 11. 1. 09:20




“나의 일상은 하루 3시간쯤 일하고 나머지는 노는 것이다. 바닷가 갯벌의 마을을 어슬렁거리면서 고깃배들을 보고, 어로 작업의 동작을 보고, 밀물과 썰물을 보고 어민들의 표정이나 농부들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이 나의 놀이이자 일이다. 요즘 가을 햇볕에 가오리가 빨랫줄 위에 널려 연처럼 말라가는 꼴을 보면, 그 뼈대 안에 아주 먼 옛날, 수억만년 전의 새의 느낌이 살아있다. 그런 느낌들은 나에게 굉장히 소중한 기억이다. 물론 과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삶의 직접적인 현장에서 체득했기 때문에 소중하다.”

“나는 내 글이나 말로 여론 형성에 기여하려는 목표가 없다. 나의 논리 앞에 남을 대령시키려는 의도가 없다. 말을 가지고 남과 정의를 다투려는 의도가 없다. 나는 나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쓴다. 내면을 드러내서 그것이 남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으면 소통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와 남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나와 남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도 크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소설가 김훈이 모처럼 대중을 상대로 자기 근황을 길게 얘기했다. 질문에도 답하고 크고작은 일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열어 보였다. 한국언론문화포럼이 제 11차 세미나 연사로 초청한 자리였다. 작가와 주최측이 논의해서 정한 강연 제목은 한담(閑談). 나온 얘기가 한가롭지만은 않았다.

지난 27일 행사장인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 강당은 전현직 언론인과 일반인 들로 가득 찼다. 70-80석은 돼 보이는 공간에 서있는 사람도 많았다. 참석자들의 체열과 오가는 이야기 열기로 실내는 더웠다.

김 작가는 행색이 후줄근했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한 치수 커 보이는 하늘색 줄무늬 와이셔츠를 입고 나왔다. 안에는 흰 셔츠를 받쳐입은 차림이었다. 사회를 맡은 임철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이 먼저 “어떤 이슈에 대해 깊이 천착하자는 것은 아니고, 소설가로서 요즘 무슨 생각하는지, 일상은 어떤지 이야기를 듣겠다”고 운을 뗐다. 임 회장은 김 작가와 한국일보 입사 동기였다.

김 작가가 무대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앞에 마련된 책상을 사이에 두고 청중을 마주한 채 앉았다. 김 작가는 노란 줄무늬 메모장에 뭔가를 적어와서, 가끔씩 넘겨가며 이야기했다. 이런 자리가 상당히 성가시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싶지는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피하거나 소홀히 답한 질문은 없었다. 질문의 주제에 따라, 생각의 내용에 따라 말의 어조와 강약이 뚜렷이 변했다. 김 작가가 30분 정도 이야기를 하고 뒤이어 청중의 질문을 받아 답했다. 거의 전문에 해당하는 내용을 소개한다. 작가의 말은 경어체였다. 편의상 평어체로 바꿨다.

<김훈>

반갑습니다. 이렇게 많은 선후배와 동료가 계시는 자리에서, 말하는 자리에 나오게 되니 두려운 생각이 든다. 말을 많이 할수록 생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생고생이라는 것은 하지 않아도 될 쓸데없는 고생을 말 때문에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과 글을 쓰면서 살아온 생애가 어떤 때는 진땀이 나게 뉘우쳐질 때가 있다. 쓸데없는 말, 하나 마나 한 말, 아니한 만 못한 말, 동어반복, 중언부언, 이런 말들을 끝없이 지껄이며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이 얼마나 쓸데없이 함부로 내뱉은 말들에 의해 들끓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몸서리가 쳐지고, 글을 쓰고 말을 한다는 것에 점점 자신이 없어진다. 오늘은 한담(閑談)이라는 주제로 나의 일상에 관한 소소한 일들을 말하는 것으로써 이런 난감한 자리를 모면하려 한다. 말을 하거나 글을 쓸수록 그것이 공허한 것 아닌가 하는 회의에 빠질 때가 많다. 요즘에는. 나는 글을 쓸 때 되도록이면 개념어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의 일상성, 생활의 구체성, 삶의 육질성과 닿아있는 말들을 가지고 글을 써보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개념어라는 것은 삶의 구체성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고 권력화된 언어인 것이다. 개념이 설정한 틀 안에 들어오지 않는 모든 구체성을 제거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서는 개념어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나는 가끔 법전을 읽어보기도 하는데, 헌법 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1조 2항인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내용을 보면 '나온다'의 주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 국민은 대체 누구인가. 국민이라는 거대한 군집 명사로 말할 수 있는 동질적인 실체가 있는지 아닌지 분명치가 않다. 그러나 헌법은 국민을 극도로 추상화하고 군집화해서 말한다. 그러면 이 국민은 누구인가.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닌 것이면서도 전체적인 무엇을 국민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많은 정치인들은 흔히 “우리는 국민과 더불어 이 법안을 때려부수겠다” “국민과 더불어 분노한다” "국민적인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국민이라는 개념이 그야말로 ‘공허한 허깨비’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검증될 수 없는 개념어들을 만질 수 없게 되니까, 내가 쓸 수 있는 어휘가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한움큼밖에 안 남은 어휘를 이리저리 조립해가면서 가난한 살림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요즘 세월호 참사를 겪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의 앞바다에 있는 선감도라는 작은 섬에 들어가 있다. 나의 일상은 하루 3시간쯤 일을 하고 나머지는 노는 것이다. 바닷가 갯벌에 가서 노는데, 대개 마을을 어슬렁거리면서 고깃배들을 보고, 어로 작업의 동작을 보고, 밀물과 썰물을 보고 어민들의 표정이나 농부들의 표정을 관찰하는 것이 나의 놀이이자 일이다. 그리고 그 느낌들을 내 맘 속에 쌓아놓는다. 그 느낌은 대부분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한테는 그런 느낌의 초점이 소중한 것이다. 요즘 어촌 마을에서 생선을 빨랫줄에 널어 건어물로 말린다. 거기에 가을 햇볕이 비치면서 생선의 내장들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면서 말라가고 있다. 가오리가 연처럼 말라가는 꼴을 보면, 그 뼈대 안에 아주 먼 옛날, 수억만년 전의 새의 느낌이 살아있다. 물고기가 진화해서 새가 됐다는 진화론의 먼 흔적이 말라가는 가오리 속에서 들어있음을 느끼게 됐다. 그런 느낌들은 나에게 굉장히 소중한 기억이다. 물론 과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삶의 직접적인 현장에서 체득했기 때문에 소중하다.

내가 있는 어촌의 어선들을 보면 여러가지가 있지만 대개 2톤 정도의 배다. 보통 5톤을 넘지 않는 낚시 어선이라고 할 수 있다. 2톤짜리 배는 쉽게 상상이 안 될 것이다. 2라는 숫자를 개념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100톤이라도 해도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2톤짜리 어선은 영업용 택시 두 대를 붙인 정도의 크기다. 어선이 성립할 수 있는 최소 단위다. 이런 어선은 간단한 엔진이나 경운기 엔진을 달고 있다. 어선의 갑판을 보면 굉장히 무질서하다. 많은 어구들이 흩어져 있고 지저분하고 어수룩하고 헐렁하고 무질서하다. 그러나 배를 운영하는 어부들을 보면 그것이 무질서한 것이 아니고. 그 많은 도구들이 손이 닿을 거리에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다. 배가 굉장히 엉성해 보이지만 배가 겪어온 고난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가벼워 보인다. 그런 가벼움을 가지고 앞으로 닥칠 고난을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경험은 소중한 것이다.


최근에 안산에서 올라와서 한강 유역을 답사했다. 팔당강부터 임진강까지 내려가봤다. 임진강 근처에 있는 전곡 선사박물관을 방문했다.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고인류의 유골의 복제품이 있다. 어린 아이가 죽었는데 머리 위에 돌로 만든 실로폰이 있었다. 100만년 전의 구석기 시대 유적이다. 당시에도 어린 아이를 묻을 때 장난감 실로폰을 묻어주는 아름다운 풍습이 있었다. 어린 아이의 몸 주변에서 많은 꽃가루도 발견됐다. 인간은 뿐만 아니라 수많은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고, 그 흔적도 박물관에 남아있었다. 인간의 아름답고 고귀하고 잔인한 흔적들이 동시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것은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일방적으로 아름답거나 추한 것이 아니고 여러 모습이 매장터에 섞여서 전체가 인간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강 상류인 팔당면과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쪽도 둘러봤다. 다산의 고향이자 성장지다. 강 건너편이 퇴촌면 천주교 묘지다. 다산은 아마도 이 동네에서 자라면서 강을 보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던 것 같다. 거길 가보면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서 더 큰 흐름을 이루는 웅장한 물길이 보인다. 다산 정약용은 그곳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두 강이 합쳐져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많은 영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호를 열수(洌水)라고 지었다. 그때는 한강을 열수라고 불렀다. 그가 사용한 많은 호 중 하나가 열수다. 강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 그가 느꼈던 영감을 알 수 있다. 강 건너편이 바로 퇴촌면인데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인 천진암이다. 다산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형 정약종과 천진암에서 천주교를 배웠다. 강 건너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을 건너가 천주교를 접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다산은 천주교를 배반했고 약종은 평생을 신봉했다. 강 건너편의 천주교 묘지에는 정약종, 이벽,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이승훈의 묘지가 있다. 그 건너편에는 다산이 묻혀 있다. 순교자와 배교자의 묘소가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참 비극적이면서도 인간의 역사는 영원한 의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승훈이 순교자인지는 확실지 않다. 마지막 순간에 어떤 마음을 먹었는지는 알 수 없다. 더 큰 강을 이루면서 미래로 흘러가는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내가 한강을 다니면서 느낀 점은 인간의 희극과 비극은 끝이 없고 야만과 아름다움은 뒤섞여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나는 정돈된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머릿 속이 정돈된 사람이 아니다. 질서나 체계나 시스템이나 정돈된 것이 머릿 속에 들어있지 않다. 나는 머릿 속에 시스템이 있는 사람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나는 내 머릿 속에 시스템이 없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뿐더러 자랑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무질서하고 뒤죽박죽인 세상을 들여다보고 글을 쓰기 때문에 뒤죽박죽인 사람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머릿 속에 질서가 있는 사람들은 시스템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가지런함만 유지한다. 나는 그런 가지런함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가령 나의 무질서와 계통 없음을 말하고 있는데, 누군가 인간의 신념에 대해서 말한다면 나는 의심을 가진 사람의 편이라고 생각한다. 구태여 나는 어느 편이냐고 묻는다면 의심이 있는 자에게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까 들어와서 사진(강연장 벽에 걸린 흑백 기록 사진)을 봤는데, 퓰리처상을 받은 아주 유명한 사진이다.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끊어진 대동강 철교를 피란민들이 개미떼처럼 기어서 남하하는 사진이다. 1.4 후퇴 직전이다. 내가 3살 때 일이다. 나는 1948년생이다. 저 사진을 보니까 저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다. 어느 국가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다만 서식지를 박탈당한 야생동물처럼 보였다. 자유를 찾아 남하했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세 살 무렵의 신문을 찾아봤다. 조선일보, 부산일보를 봤다. 피란민들이 1월4일 정부를 버리고 2차로 피란을 갔다. 1월 2일 인민군들이 개성까지 내려갔다. 개성에서 서울은 한나절 거리다. 기자들이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에게 물어봤다. “우리는 피란을 가야 합니까.” “정부는 서울을 사수할 것인가.” 대통령의 답변은 “피란을 가고 안 가고는 무방하다. 그리고 국민은 주거권을 선택할 수 있다. 날씨가 추우니까 피란을 가기로 한 사람들은 이부자리와 식량을 지참하는 것이 좋겠다. 피란을 갈 때는 샛길로 가길 바란다. 간선도로를 피해서. 피란민들은 소도시로 산개하기 바란다. 부산은 병참기지이기 때문에 작전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국방부 장관은 “김치와 간장은 국군에게 기증하기 바란다”고 말했다. 내가 세 살 때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 고등학교 때가 60년대 초였다. 당시 국민 소득이 82달러였다. 세계 최빈국이었다. 전쟁과 최빈국의 시대를 지나 2만달러의 늙은이가 됐다. 지금 생각하면 아득하기도 하고, 그 82달러에서 2만달러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를 이제는 돌이켜 봐야 한다. 50~60년대 신문을 그래서 들여다본다. 얼마나 많은 비리와 억압과 부조리를 바탕에 깔고 2만달러 시대로 넘어왔는가를 들여다봐야 할 때가 됐구나 싶다. 그것은 마치 박물관에 가보면 100만년의 시간이 지나도 인간의 야만성이 청산되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듯이. 인간의 역사가 고통스럽게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것이 요즘 내가 놀러 다니면서 느끼는 생각들이다.

좋아하는 망원경이 있다. 강 건너 풍경을 본다. 농부들의 모습을 본다. 일할 때는 부부가 같이 일하는데 밭에 앉아서 아무 말도 안 한다. 저녁 때가 되면 남편이 경운기를 끌고 부인이 적재함에 탄다. 역시 말을 안 한다. 표정을 보면 말을 안 해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표정에 도달해있다.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었다. 글로는 묘사가 안 되는 표정들이다. 말을 안 하면서도, 말을 하고 싶은 열망도 없어 보인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만 준다. 나의 이야기를 여기서 마치겠다.

사회자: 더 길게 해도 할 말이 많겠지만 약속대로 30분 정도만 하겠다. 이제 질문을 받겠다.

-두 가지를 묻겠다. 식사는 직접 해드시나? 사모님이 함께 있나?

나는 옆에 누가 있으면 일을 못한다. 내 방에는 아무 것도 없다. 책이 없다. 이런 자리에서 말을 할 때 혹은 글을 쓸 때 자신이 읽은 글을 들이미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답답하다. 딱 세 권을 갖고 있다. 국어사전, 영어사전, 한자사전만 있다. 다른 책은 한 권도 없다.

-책을 드시는 게 아니라 어떤 음식을 드시는지 물었다.

내 냉장고에는 감자, 옥수수, 우유, 치즈, 달걀만 있다. 소금, 물도 있다.

-아까 세 시간을 일한다고 했는데 그 일이 글을 쓰는 것인가?

글을 쓴다. 가만히 앉아있을 때도 있다. 남들이 보면 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소설가 지망생이다. 나는 누군가 마감만 정해주면 하루에 열편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마감이 없으면 절대 글을 못 쓴다. 블로그를 이용해 6개월 연습했다. 날마다 글을 쓴다. 하지만 그 글은 내가 쓰고자 하는 글이 아니다. 결국 끄적거리는 것이다. 마감이 없을 텐데 어떻게 자율적으로 글을 쓰나? 마감 없이 글을 쓰는 방법을 알고 싶다.

신문사 재직 시절 마감을 못 지켜서 많은 선배들에게 무수히 혼났다. 그때 마감을 못 지킨 것은 나 자신의 무능력도 있었고, 도저히 마감을 지킬 수 없는 과중한 업무 때문이기도 했다. 두 가지 결함이 다 있었다. 내가 나의 잘못을 변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대개 취재를 열심히 한 기자들은 기사를 금방 쓴다. 취재한 내용이 없으면 관념으로 짜맞춰야 하니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지금은 강요된 마음이 없고 자유롭게 살고 있다. 가장 무서운 것은 규율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한 규율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아무도 나를 규율로 잡아줄 사람이 없다. 내가 나 자신을 다스려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나의 삶의 성패가 달렸다.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규율이 없으면 건달 밖에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정해놓고 매일 열심히 할 일을 한다. 책을 읽고 글을 몇 자를 쓰자고 생각하고 지키려고 한다. 항상 마감은 정해놓지 않고 하루 다섯 장을 쓰자고 정해놨다. 200자 원고지 기준이다. 책상에 ‘필일오(必日五)’를 적어놨다. 하루 5매라는 뜻이다.

-언론인을 지낸 사람이다. 예전에 인터넷에서 봤는데 김훈 선생은 탈고 이후 일체 원고를 보지 않고 팽개친다고 읽었다. 나같은 경우 탈고 후에도 퇴고를 많이 하는 습관이 있다.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지금도 탈고 이후 원고를 보지 않는지 궁금하다.

탈고한 원고를 들여다보지 않을 뿐더러 출판사에서 책을 나중에 보내와도 열어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다시 들여다보면 죽을 것 같고, 지긋지긋하고, 보면 ‘내가 이것 밖에 못하나’ 하고 책을 덮었다. 내 책에 오자가 있는 것을 안다. 그것을 고치지 않았다. 오자를 고치라고 하면 다시 읽고 해야 하니까 지겨워서 하지 않았다. 죽을 것 같았다. 지금도 오자를 그대로 남겨뒀다. '칼의 노래'에는 이순신 부대가 감자를 먹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감자를 처음 쪄먹었다’고 썼는데, 어느 문과대학 교수가 전화해서 "감자는 임진왜란 이후에 국내에 들어왔다. 이순신 부대가 감자를 먹었냐. 고쳐라"라고 했다. 하지만 고치지 않았다. 대신 글을 넘길 때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넘기는데 써놓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게 아닌데 싶다. 거기까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그럼 할 수 없이 출판사에 원고를 갖다 준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 같다.

-김훈 선생을 말하자면 선친 김광주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선친에 대한 글을 쓴다고 들었는데, 언제 쓸 계획인지 궁금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1910년생이다. 한일합병 해에 태어나셨다. 1948년은 우리 부자의 운명 같은 좌표가 됐다. 아버지는 김구 선생 아래서 활동했다. 당번병처럼 잔심부름을 했다. 그걸 부친은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6.25 전쟁을 겪고 박정희 대통령 때까지 사셨다. 그 얘기를 쓰려면 82달러에서 2만달러까지 벌어진 일을 써야 하는데, 너무나 힘들어서 밀쳐놨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버지의 생애를 보면,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울지 않았던 것 같다. 한쪽 눈으로만 울었다.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면 안 되겠다 생각했다. 허랑방탕하고 술 먹고 집에 안 들어왔다. 돈은 어디에 쓰는지 몰랐다. 그 시대 아버지는 다 그랬다. 모친은 미국에 계신데 치매에 걸려서 요양원에 있다. 가끔 정신이 돌아오는데 베개를 업고 그게 나구나 하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회상한다. 베개 위를 찢어서 음식을 넣고 기저귀를 채우고 한다. 용돈을 쓰라고 드리면 쓰지도 못하고 고기를 산다. 고기를 사서 인편으로 보낸다. 내가 어린 시절 고기를 못 먹여서 한이 됐다. 아버지는 피란을 같이 안 가고 어린 4남매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사진이 있다. 기차 위에 자식들을 데리고 갔다. 어떻게 어린 남매들을 기차에 태우고 갔는지 알 수 없다. 치매에 걸리셔서 물어볼 수도 없다. 간호원을 통해 가끔 전화를 한다. 어디 갔냐고 자꾸 물으신다. 우리 부모 세대는 그런 인생을 살았다. 아버지는 바람도 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다 그랬다. 박정희 대통령이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것이 축첩 공무원을 처단했다. 9급만 해도 첩이 있었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다 알았다. 친구 아버지가 첩이 있던 사실도 다 알고 있었다. 서로 얘기를 했다. 심지어 저 친구 아버지 첩이 어느 다방 마담인지도 알고 있었다. 특징적인 차림이 있었다. 긴 머리를 한 쪽으로 해서 하얀 목이 보였다. 핸드백에서 용돈을 꺼내서 주고 옥색 구두를 신었다. 그런 얘기를 잘 쓸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다. 고민해봐야 겠다.

(이때 김 작가가 갖고 있던 휴대폰에서 ‘이히히힝’ 하는 말울음 벨소리가 울렸다. 뜻밖의 컬러링에 청중 속에서 웃음 소리가 났다. 김 작가는 주섬주섬 휴대폰을 들고 소리를 끄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은 듯 말소리 벨은 한 7-8초 가량 계속되다가 간신히 꺼졌다. 잠시 있다가 이야기 도중에 또 울렸다.)

사회자: 보충하겠다. 김훈 작가는 아버지에게 “허클베리 핀 아버지 같다”고 말했다고 책에 썼다. 그러면 아버지는 “광야를 돌보는(밖으로 나도는) 말이 마구간(가정)을 돌볼 수 있겠느냐”고 답했다고 한다.

-김훈 작가의 작품을 다 읽었다. 나눠준 자료에도 있는데 글에 허무주의적인 말이 많이 나온다. 나도 글을 쓰는 입장에서 김훈 작가의 글을 보면 모든 글에서 허무주의가 느껴진다. 이런 정신 세계를 갖게 된 것이 아버지와 가정 환경의 영향인지, 신문기자 경험의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정신 세계에 영향을 끼친 사건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어떤 이념이나 정치 노선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허무주의적인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을 보면 주전파와 주화파의 싸움이 나오는데 나는 아무 편도 아닌 것이다. 둘 다 건전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인간에게 삶 이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살아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나머지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허무주의가 나의 글에 있고, 허무와의 싸움이라는 인간의 처절한 싸움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허무주의냐 낙관주의냐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정신세계의 형성 과정에 관해서는 내 유년의 가난, 전쟁, 깡통 차던 거지 아이들 모습의 영향이 크다. 거지 아이들이 구걸을 하는 동안 안방에서는 가족들끼리 식사를 할 때의 참담함, 부산에서 보낸 유년의 기억, 환도 이후 서울의 천막 교실, 이런 것들이 마음의 밑바닥에 있는 것 같다. 지긋지긋하지만 벗어나기 힘든 것 같다.

책에 의해 형성된 부분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길바닥에서 배웠다. 책보다는 사물이나 사태, 사건에 의지해서 세상을 바라보려고 생각한다.


-작가라면 책을 자식처럼 여긴다. 갖고 있는 책이 세 권뿐이라고 말했다. 책이 없는 것을 자랑처럼 여기는 것 같다. 왜 그런가. 남의 책도 가지고 있을 텐데 장서는 어떻게 보관하는가?

온갖 책을 읽는다. 문학, 철학뿐만 아니라 기계공학, 자연과학서도 본다. 항해사 자격시험 문제도 읽는다. 소방관 자격시험, 여성의 화장법에 관한 책도 본다. 다만 책을 많이 보는 것을 추호도 자랑으로 여기지 않는다. 나와 같이 학교를 다닌 친구 중에는 책을 한 권도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도 훌륭한 인품을 갖고 있다. 나보다 합리적이고 부하들을 잘 통솔하고, 넉넉하고 훌륭한 사람이 많다. 글자를 꼭 들여다봐야 훌륭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현장에서 배운 사람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에 들어가면 한글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학교도 안 다녔다. 그런데 이 노인들은 세상만사를 다 알고 있다. 환경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개돼지를 어떻게 대하고 외지 사람,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안다. 그리고 평생을 실천한다. 공부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부끄럽다. 이기심만 발달하고 자신의 똑똑함을 증명하려고 한다. 따라서 책을 읽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자랑할 것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내 방에는 책이 없다. 책을 갖고 있으면 혼란스럽다. 귀신이 들끓는 것 같다. 정신 집중이 안 된다. 기자들이 오면 꼭 책꽂이 앞에서 찍자고 하는데 무슨 자랑이라고, 참 진땀나는 일이다.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도 책을 들고 있는데 그것은 심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분이 인문주의적 계몽 군주라는 점에서 책을 펼쳐들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남사스럽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김 작가는 10여년 전부터 저널이나 인터뷰에서 언어와 관련된 시대적 상황을 많이 이야기했다. 그중 기억나는 것이 김 작가가 “사실과 의견이 막 혼재된 말이 나온다.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는 게 많다. 이건 말이 안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언론사를 비교하면서 직설적으로 “한겨레와 같은 경우 객관적인 사실을 다루는 저널리즘으로 남을지, 하나의 사회 세력으로 남을지 판단해야 한다” “조중동과 같은 보수 신문은 자신들이 세상을 이끌어간다는 오만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이 말들이 아직 유효한가.

나는 언론에서 떠난 지 오래됐지만 우리나라의 주요한 언론들은, ‘A라는 신문은 A라는 신문사의 기관지’ ‘B라는 신문은 B라는 신문사의 기관지’라고 생각한다. 객관적 사실에 바탕한 언론은 점점 쇠퇴해지고, 객관적 사실을 규명하려는 노력도 점차 희미해지는 것 같다. 나는 정의라는 것은 사실의 바탕 위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의 바탕 위에다 정의를 세울 수 있는 것이지 거꾸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의나 신념의 바탕 위에 사실을 세우려고 하면 다 무너져 버린다. 사실의 토대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언론의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사 다닐 때 선배들한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얘기다. 그것을 우리가 실천했으냐 못 했느냐의 문제일 뿐이지 그걸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작가로서 영화를 자주 보나? 지난 여름 개봉한 ‘명량’을 보고 상당히 실망했다. 완성도가 떨어지고 시대가 갈망하던 이순신의 리더십에 관한 감동적인 스토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칼의 노래’ 작가로서 그 영화를 봤다면 어떻게 평가하는가.

영화를 거의 안 보는데, 명량은 아이들이 보자고 해서 봤다. 영화에 전문적인 식견은 없는데, 명량은 대중적인 볼거리로 만든 영화라고 생각했다. 다만 고뇌하는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 약했고. 과도한 애국주의가 작용한 점은 거북했다. 백성들이 일치단결해서 무너진 배를 살리고 하는 것은 과도한 애국주의라고 생각했다. 나는 ‘칼의 노래’나 ‘남한산성’을 쓸 때 백성, 국민의 애국심을 전혀 묘사하지 않았다. 국민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국가가 요구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한다면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보는 게 자유인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은 임금과 권력자가 도망온 곳이었다. 산성 안은 본래 자족한 마을이었고 백성들이 살던 곳이다. 임금이 오니까 백성들이 못 살 게 됐다. 당연히 임금을 욕했을 것이다. 저 못난 게 여기까지 와서 다 죽게 생겼다고 욕했을 것이다. 나는 백성들이 어떻게 욕했나 이런 점이 궁금했다.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은 이런 건 기록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끼워 맞추는 것이다. 명량이란 영화에 나오는 과도한 애국주의도 예술성을 해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를 젓는 병사의 표정과 역동성은 볼 만한 장면이었다.

사회자: 명량이라는 영화로 칼의 노래가 다시 베스트셀러가 됐는데 좋은 것 아닌가?

그건… 나쁜 건 아니다.(웃음) 그전에도 꾸준히 팔리던 책이다. 그런데 어떤 매체를 보니까, 명량의 흥행과 칼의 노래의 판매고를 말하면서, 명량이라는 영화 ‘덕에’ 라는 말을 썼다. ‘덕에’는 야만적인 말이다. 언론인들이 이렇게 언어에 둔감하고 그런 흉악한 말을 쓸 수 있나. ‘덕에’라고밖에 쓸 수 없는 언론인들은 나가는 게 좋겠다. 그 전엔 한 번은 문학상을 받았더니, 어떤 매체는 김훈이 상금 5000만원을 받게 됐는데, 이로써 김훈은 5000만원이 ‘생긴다’고 썼다. 그런데 ‘생긴다’는 언론이 쓸 수 있는 말은 아니지 않나. 그 영화 덕에 책이 팔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장 뜻깊게 읽은 책이 ‘흑산’이다. 남한산성부터 흑산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의 작품에서 ‘삶과 죽음’이라는 일관성을 읽었다. 지난 10월3일 JTBC와의 인터뷰를 보니 팽목항을 가서, “자본주의의 이면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번 세월호 사건에 삶과 죽음이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작품 계획이 있나?

세월호 사건은 말하기 어렵다. 선장과 참사 다음날 자살한 단원고 교감, 두 인물에 대해 관심이 있다. 선장은 우리 시대의 아주 대표적인 캐릭터다. 그 선장은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 자신의 상당 부분이 투영돼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그의 아들을 주인공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소설로 쓰려다 힘들어서 미뤄놨다. 이준석 선장은 그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인 것은 당연하지만, 이 사회가 그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있다. 어쨌든 자신의 직무를 배반하고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다. 교감은 정말 괴롭다. 그는 인솔 책임자인데 가장 먼저 배에서 탈출하고 다음날 산에 올라가 자살했다. 그런데 교감을 탈출할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육지에 올라가 자살할 때까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그의 망행로,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괴롭게 다가왔다.

세월호 사건에는 자본주의와 수많은 권력과 결탁한 세력이 저지른 범죄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반성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정부는 자본주의적인 가치와 지향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규제를 철폐하고 자유 경쟁을 강화하고, 경기장에서 게임을 하는데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앤다. 그런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내가 사는 일산에는 대형마트가 세 개가 생겼다. 도시 상권이 다 무너졌다. 규제를 철폐하니 자유로운 경쟁이 벌어진다. 면세점 허용도 그렇다. 삼성과 신세계가 다 영업을 한다. 막대한 매출을 올릴 것이다. 국가는 그 세금을 포기하고 재벌에게 막대한 이익을 허용한다. 경쟁을 저해하는 사회가 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점에 회의가 있다. 강자와 약자가 공정거래를 하면 공정한 약육강식이 될 수 밖에 없다. 시장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구원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들이 세월호가 우리에게 주는 반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훈 작가의 소설 중 ‘저기 그들이 오고 있다’라는 단편집에 실린 ‘개’라는 작품을 좋아한다. 어부와 개가 단둘이 사는 이야기다. 어부가 풍랑으로 돌아오지 않자 개가 어떤 사람에게 잡혀 먹는다는 내용이다. 또 하나는 ‘남한산성’이다. 가장 인상깊은 작품으로 생각한다. 작년 대입 논술에 출제됐다. 성균관대 문제였다. 거기에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대학에서 작품이 출제되면 저작권 협의가 되나?

대학 출제뿐 아니라 많은 참고서나 교재에서 부분적으로 인용해서 나온다. 그런 책이 10여 종이 된다. 한 출판사에 전화해서 나와 협의하고 저작권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출판사에서 “다른 출판사에서는 다 했는데 왜 우리한테만 이러냐”고 말하더라. 그래서 너무 힘이 들어서 그만뒀다. 요새는 저작권협회에서 제도적으로 보호해준다고 들었다. 그렇게 법을 찾아보니 교육적인 목적으로 텍스트를 인용할 때는 일방적으로 써도 무관한 것으로 돼있더라. 위법은 아니지만 예절 바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까 이야기 중에 머리가 정리가 되어 있지 않고, 시스템적으로 돼있지 않고, 그런 것을 혐오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많은 책을 섭렵했기 때문에, 소설감이라고 생각하면 시스템적으로 정리가 잘 되었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아니고 구체성이다. 삶의 일상성과 구체성,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체제나 지향성은 나에게는 덜 중요하다. 자신 주변의 삶을 똑바로 관찰하지 않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은 게으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책 중 하나가 다윈의 ‘비글호 항해기’다. 그는 21세 당시 영국 해군의 배인 비글호를 타고 5년 동안 세계의 온갖 해안과 섬에 상륙하면서 모든 현상을 관찰하고 비교하고 기록했다. 이것이 나중에 진화론으로 발전하는 길을 열었다. 그 분석과 관찰, 비교, 의심, 의문을 제기하는 방법에 의해서 이 세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인간이 선입견이 없이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열어놨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증명된 학설은 아니지만 그 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열었다. 당시 배의 선장이 29살이었다. 로버트 피츠로이라는 영국 해군 중위였다. 영국 해사를 나왔다. 그 배는 범선이었다. 엔진과 내비게이션 장치가 없었고 본국과 교신이 안됐다. 모든 위험을 스스로 방어했다. 나는 소설가에게도 그런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을 과학적으로 유물론적으로 들여다보는 전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을, 문학이니까 낭만적으로 정서적으로 로맨틱하게 들여다보면, 작가가 되면 다 망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구체성이다. 다윈은 수백만개의 구체성을 모아서 하나의 원리와 관점을 만들었다. 다윈의 경우 구체성이 시스템을 이룬 것이다. 다윈을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아는 범위 내에서 말했다.

-선생의 작품이나 인터뷰를 보면 글이나 말의 번다함에 대해 혐오까지는 몰라도 굉장히 부정적인 느낌을 말하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일의 좌절감’을 토로한다. 그러면 왜 작가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애써 글로 쓰려 하는 것인지 질문하고 싶다. 또 반대로 글을 쓴다는 것은 독자를 전제로 하는 건데, 왜 김훈의 글을 읽어야 하는지 답을 해달라.

왜 글을 써는가에 대한 문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 글이나 말하기, 언설 행위로 여론 형성에 기여하려는 목표가 없다.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향이 전혀 없다. 그리고 나의 논리 앞에 남을 대령시키려는 의도가 없다. 말을 가지고 남과 정의를 다투려는 의도가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글을 쓰느냐. 나는 나의 내면을 드러내기 위해 글을 쓴다. 내면을 드러내서 그것이 남에게 이해를 받을 수 있으면 소통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와 남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이다. 나와 남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도 크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반드시 소통이 되고 너와 내가 얼크러져야만 훌륭한 것은 아니다. 너와 내가 소통이 안되고 피차의 차이와 상이점을 아는 것도 아주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배경이다. 나는 내가 소설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설정한 적이 없다. 나는 젊었을 때 나는 ‘나중에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되고 글을 써야지’ 하는 예술적 낭만과 로맨틱한 목표를 갖고 있는 젊은이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학교를 졸업하고 밥벌이를 할 생각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74년에 신문기자가 됐는데, 어떤 사람은 물어본다. 왜 기자를 했냐고. 그럴 때 사람들은 대개 장황한 대답을 하는데, 나는 육군을 제대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길바닥을 헤매다가 취직한 거다. 언론의 지도자가 되고 사회의 목탁이 되고 여론의 리더가 되기 위해 신문기자가 된 것이 아니다. 길바닥 헤매다 취진한 거다. 거기서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인간의 인생이 그렇게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꼭 훌륭한 목표를 세워 놓고 달성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훌륭한 소설가가 되겠다고 목표를 설정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다만 나의 내면을 표현하겠다는 목표를 추진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 왜 글을 쓰느냐 하는 것은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나의 글로 남을 설득하고 진리를 얘기하고 나의 명석함을 증명하려는 이런 욕망이 나는 없다.

사회자: 그래서 내 글을 읽으라는 것인가?

나는 내 글을 읽으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글쎄, 글을 읽을 때는, 책을 읽을 때는 양서를 골라서 읽는 게 좋겠다는 정도...(웃음)

사회자: 김훈 작가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에피소드를 덧붙이겠다. 처음 한국일보에 입사했을 때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앙케이트를 했다. 자기 PR을 해보라고 했다. 당시 김훈은 “나는 일체의 깃발을 혐오하는 자이다”라고 했다. “밖에서 본 한국일보와 안에서 본 한국일보를 비교해서 말해보라”는 질문에는 “밖에서도 한국일보를 본 적이 없소. 앞으로도 그럴 것임”이라고 답했다. 한국일보 기자가 되었는데도 어떻게 한국일보를 안 보나? 어쨌든 그렇게 뚜렷하고 특이한 답변을 했던 사람이다.

-좋은 소설을 많이 썼고 엄청난 독자가 있다. 현재까지 번 돈이 많을 것 같다. 얼마나 벌었나? 어떻게 쓰는지도 궁금하다.

나는 책 한 권을 쓰면 다음 책을 쓸 때까지 먹고 살 수 있다. 다음 책을 써서 또 그 다음 책을 쓸 때까지 살 수가 있다. 나는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나라 작가 중에서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지극히 축복 받은 존재다. 흔치 않다. 세무서에 가면 우리 같은 사람을 자영업자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과세 표준점 미만이다. 나는 과세 표준점을 넘는다. 그 정도로 수입을 올렸고, 세금은 버는 돈의 4분의 1을 내고 또 주민세 10%도 낸다. 세금을 1억원을 내면 주민세를 1000만원을 낸다. 소득세를 많이 내는 만큼 주민세도 많이 낸다. 주민세라고 하는 것은 잘 이해가 안 된다. 죽으면 안 받아간다. 행위에 대한 세금이 아니고 존재에 대한 세금이다. 내가 안 죽고 살아있는 것에 대해 세금을 내야 한다. 돈을 벌었고 부동산을 취득했고 매매를 했고, 월급을 받았기 때문에 세금을 내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살아있는 것에 대한 세금이다. 세금을 내기 싫다는 얘기가 아니고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냈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돈은 안 쓴다. 돈 쓸 일이 없다. 돈은 다 우리 집사람이 가져간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쇼핑이다. 백화점 가는 것. 펜시한 가게, 구두방이나 양품점 같은 데를 나는 절대 안 간다. 전에 백화점에 한 번 갔다가 질려서 나왔다. 여자들이 지갑에 고액권을 넣어서 잘난 척하면서 쓰고 다니는 것을 봤다. 만정이 떨어져서 다신 안 간다. 이런 옷과 신발도 우리 집에서 사다 준다. 내가 돈 쓰는 것은 술값 내고 가끔 경조비 내는 것이 다다. 그 외에는 돈을 안 쓴다. 돈을 안 쓰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사회자: 담배는 끊었나?


담배는 전에 하루에 두 갑을 폈는데 한 5년 전에 끊었다. 전에 너무 많이 폈다. 한 번은 무심코 절에서 무심코 담배를 폈다. 절에서는 담배는 피면 안되지 않나. 늙은 스님이 이리 오라고 하더라. 손가락으로. 그래서 갔더니 담배를 끄라고 했다. 바닥에 비벼서 껐다. 꽁초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오라고 하더라. 버리고 왔더니 날더러 담배 끊어라 하더라. 화가 나서 스님은 담배 펴봤냐고 물어봤다. 자기는 안 펴봤다더라.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몰라서 그러는데 이것은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담배를 못 끊는 중생의 고통을 이해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스님이 도력이 높으신 분인데 나를 보더니 “이놈이 말을 하네”라고 말했다. “왜 그걸 못 끊어. 네가 안 피면 끊는 것이고 피면 못 끊는 것인데 그걸 왜 못 끊어”하고 말했다. ‘내가 졌구나’ 하고 내려와서 하도 더러워서 끊으려고 결심을 하고 결국 끊었다. 얼굴에 붙이는 스티커 패치를 수십개를 붙여도 효과가 없더라. 여름에 공원에 가서 너무 힘들어서 티셔츠를 찢으면서 울었다. 그걸 참느려고. 참으니까 괜찮아졌는데 꿈에서는 핀다. 내세에서는 많이 피려고 한다.

사회자: 벌써 1시간 30분이 지났다.

-김훈 선배와는 한국일보를 같이 다녔다. 나는 김훈 선배가 말한 시스템이 아예 뇌에 들어가 있다. 그런 점에서 무질서와 혼돈을 용납하지 않는 탓인지 선배와의 교류가 별로 없었다. 물론 연대가 11년 이상 차이가 나니까, 나는 84년 입사고 선배는 74년 입사다. 또 김훈 선배는 주로 문화부에서 근무했고 나는 사회부 쪽을 출입했다. 별로 교류가 없었지만 아까 말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내용을 의심한다는 김훈 선배의 말을 듣고 무질서와 혼돈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배의 글을 좋아하는 것은 쌓아온 문장의 격이 비논리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신문사 재직 시절도 그렇고 가장 관심을 갖고 닮고자 했던 점은 김훈 선배의 문체다. 특히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를 고민을 많이 했다. 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첫 문장을 기억하는 소설은 많지 않다. 기껏해야 ‘안나 까레리나’ 정도다. 유일하게 김훈 선배의 문장에서 기억하는 것은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첫 문장의 화두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퇴고하는지 알려달라. 요령이 있나?

소설 쓰기와 기사 작성은 전혀 다른 것이다. 나는 신문기사라는 것은 문장이나 문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수많은 유익한 정보를 논리적으로 배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새 신문을 보면 수집한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지 않고 멋진 수사를 하려고 한다. 기자의 본질은 ‘스파이’다. 남을 염탐하는 것이다. 수집한 타이틀을 관리하고 팩트가 가치있는지 판단하는 것이 신문기자다. 어떤 기자들은 정보도 없이 대중을 리드하는 사상가가 되려고 한다. 정보에 바탕하지 않은 것은 수사학이고 사상이고 다 필요없는 것이다.

소설의 첫 문장인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의 힘은 간단명료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어+동사’다. 아름다운 수사학에서 힘이 나오는 게 아니다. 나는 그걸 이순신에게서 배웠다. 대학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난중일기, 임금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배웠다. 이것은 군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문장이다. 문인이 아니면 범접할 수 없는 주어+동사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결단력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를 많이 죽인다. 7년 동안 120번 정도의 군법을 집행한다. 죽이지 않으면 곤장을 치고 감옥에 보내고 강등시켰다. 군율을 어겼을 때에도 ‘거듭 군율을 어겼다, 군율을 어겨 베었다’ 이런 식으로 지저분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군율을 어겨 베었다’고 썼다. ‘목을 잘라서 성문에 걸었다’ ‘오늘 남원이 함락됐다는 보고를 들었다’ ‘나는 밤새 혼자 앉아있었다’ 이런 단순성이 갖는 문장의 힘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문장의 힘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두어 페이지 넘기면 이 힘이 빠진다. 그럼 또 강한 문장을 갖다놔야 한다. 그럼 거기에 의지해서 십여줄이 나가는 것이다. 중간중간에 힘찬 문장을 박아놔야 한다. 첫 문장으로 끝까지 우려먹고 살 수는 없다.

사회자: 첫 문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80년대 목동 신시가지 개발을 할 때 현장 취재를 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김훈이 쓴 기사의 첫번째 리드가, “목동 마을 사람들은 불도저가 미웠다”였다. 김훈 기자가 쓴 글은 선배들이 고치지를 못 했다. 이걸 고치려면 처음부터 다 뜯어고쳐야 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함부로 고칠 수 없을 정도의 논리적인 얼개가 갖춰져 있었다.

- 최근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는데 뒤에 이런 설명이 있었다. “만약 카잔차키스가 소련 사람이었다면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 사람을 두 번이나 노벨 문학상 후보에서 떨어뜨린 것은 우리 시대의 큰 과오다”라고 영국 평론가가 말했다. 김훈 작가는 국내 문학상을 거의 다 섭렵을 했는데, 노벨 문학상을 탈 후보가 아닐까 생각했다. 좀 더 멋진 작품을 써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를 생각이 있는지 궁금하다.

그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국내 상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책을 쓸 때 약력에 수상 목록을 쓴 적이 없다. 수상은 일종의 스캔달인 것 같다. 내가 상을 받고 많은 작품들이 후보로 올라온다. 수상작이 탈락된 다른 후보작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을 수량화해서 비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상은 뭔가. 상은 심사위원들의 주관적 편견이고, 주관적 편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벨상 수상이 시작된 이래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가 100명이 넘는다. 다 읽을 필요가 없다. 100명을 리스트로 해도 다 누군지도 모른다. 내가 무슨 상을 받았다고 해도 세월에 의해 풍화되는 것이다. 세월의 풍화를 견디기는 힘든 것이다. 과거에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을 보면 이미 낡고 퇴색되고 풍화되어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작품들이 많다. 상을 받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월의 풍화는 견디기 힘든 것이다. 한국 문학의 특징은 단절에 있다. 비극적이다. 이광수, 염상섭, 채만식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우리는 더 이상 읽지 않는다. 다 박물관에 가고 연구자들만 읽는다. 상을 논할 때가 아니다. 작가의 세대가 단절이 되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는지 궁금하다. 요즘도 자전거를 타는지.

나는 일하는 것보다 노는 걸 좋아한다. 누군들 안 그렇겠나. 나는 스트레스가 없는 방식으로 일하고 싶다. 일과 놀이가 일치가 되면 스트레스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합치는 건 대단히 힘들다. 일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우리가 일로부터 소외돼 있기 때문이다. 짐작하건데 전에 남해안에 갔더니 어부들이 뱃노래를 하는 것을 봤다. 멸치를 잡으면서 노래를 한다. 노래 박자와 동작이 딱 맞는다. 단순한 고기잡이 노래였다. 그것을 보니 그들은 고된 작업에서도 스트레스가 없어 보였다. 삶과 노동이 일치되어 보였다. 가령 현대식 콘베이어벨트에 앉은 근로자들을 보라. 그들이 노래를 할 수 있겠나? 절대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완전히 소외된 노동이기 때문에 자기 육체로부터의 생산이 소외돼 있다. 신음밖에 안 나온다. 스트레스가 쌓인다. 나도 노동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다. 어쩔 때는 굉장히 심하게 나타난다. 그러면 술을 먹는다. 지난번에 너무 과도하게 먹었다. 운동도 한다. 운동도 너무 심하게 하면 병이 난다. 하루에 5시간씩 걸은 적도 있다. 바닷가를 걷고, 녹초가 될 때까지 걸었다. 그러고 또 술 먹고, 일하고 그런다. 스트레스로부터 영원히 해방될 수는 없다. 현대의 산업화된 노동의 특징이 그렇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는 것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글을 쓰다 보면 완전히 현실성이 없어질 때가 있다. 내가 현실에서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고 꿈 속을 헤매는 허깨비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삽을 들고 가서 땅을 팠다. 궁덩이가 생기면 또 메운다. 또 몇 자 쓰고 그랬다. 참 비참한 생활을 살고 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진정한 친구가 있나? 술 친구라든가. 종합적인 질문으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가장 어려운 질문이다. 내 친구는 대개 후배들이다. 동년배 중에서는 친구가 없다. 다 늙어가지고 혼자 한적하게 지내는 것 같다. 후배들은 어리니까 술도 사달라고 하는 입장이 되는 것 같다. 의지하거나 기탁할 만한 관계는 아니다. 혼자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적 환경에서 오는 것인 것 같기도 하다. 인생에서의 가치가 무엇이냐. 이것은 참 어렵다. 누구나 다 다른 가치가 있겠지만 나는 남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남의 말을 듣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요즘은 사람들이 히어링 기능이 없고 토킹만 한다. 다 떠들면서 산다. 담벼락에 떠드는 듯한 소음이 가득차 있다. 우리 사회의 언어가 많이 타락한 모습이다. 남의 말을 잘 듣고 친절하고. 얼마 전에, 책 읽은 얘기 또 하면 안되는데, 니체를 읽었더니 이런 얘기가 있더라. ‘정의로운 사람은 빠르게 판단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사람은 스스로 서둘러 판단하는 것을 삼간다. 정의로운 자는 남을 경청하는 자이고, 정의로운 자는 남에게 친절한 자다.’ 참 평범한 문장인데 원숙한 철학자의 통찰이 보였다. 우리는 정의로운 자가 친절한 자라고는 상상을 못하지 않나. 흔히 정의로운 자는 강력하고 우뚝하고 자기 생각을 강요하고 남을 복종시키고 정의의 목표를 향해 인류를 끌고 가는 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데, 정의로운 자는 너무나 빨리 다가오는 판단을 스스로 삼가는 자라고 니체는 썼다. 그것을 읽고 많이 반성했다. 정의라는 것은 남에게 친절하고 남의 말을 잘 듣고 이해하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사회자: 마지막 말씀이 참 좋다.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전병근 기자 journey@chosunbiz.com]  2014,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