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랜드그룹의 박성경 부회장(왼쪽 다섯 번째)과 완다그룹의 왕젠린 회장(왼쪽 네 번째). photo 이랜드그룹 |
완다는 중국 전역에 85곳의 쇼핑몰과 75곳의 백화점을 소유한 중국 최대의 부동산 재벌이다. 1994년 중국에 진출한 이랜드는 완다의 쇼핑몰과 백화점에 수백 개 매장을 개설해 한국 패션기업 중 가장 큰 성과를 내왔다. 켄싱턴 브랜드 호텔을 운영 중인 이랜드는 2006년부터 최근까지 하일라콘도, 한국콘도, 풍림리조트를 연거푸 인수하며 호텔리조트 사업을 키워왔다. 또 제주 애월읍 일대에 100만㎡의 부지를 확보하고 오는 2022년까지 테마파크와 호텔리조트 조성을 추진해 왔다.
그러던 참에 완다라는 대형 지원군을 확보한 셈이다. 쇼핑몰과 백화점 외에도 51곳의 5성급 호텔을 가진 왕젠린 회장은 2012년에도 박성경 부회장의 초청으로 방한해 한국 사업에 관심을 보인 바 있다. 완다가 이랜드의 ‘전주(錢主)’로 등극한 것이다.
부산 해운대 엘시티도 중국 최대 건설업체가 ‘전주’로 나섰다. 엘시티는 해운대 백사장 동쪽에 들어서는 높이 411m, 지상 101층의 초고층 호텔과 레지던스다. 시공은 빈치(프랑스)와 벡텔(미국) 등 서구의 유명 건설회사를 제치고 세계 최대 건설사로 부상한 중국의 국영 건설사인 ‘중국건축공정총공사(중건)’가 맡았다. 부산도시공사 등이 참여한 한국 측 시행사 엘시티 측은 그간 국내에서 적합한 투자자와 시공사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접촉한 것이 초고층 건축 노하우를 지닌 ‘중국건축’이다.
중건은 상하이의 높이 492m, 101층 세계금융센터(SWFC)와 홍콩의 높이 484m, 118층 국제상업센터(ICC)를 지어 올린 건설사다. 중건은 한국에서도 지난 1월 개관한 지상 24층의 서울 명동 중국대사관을 지어 올렸다. 비록 외국 대사관 건축이란 특수성이 있지만, 중국의 국영 건설사가 서울과 부산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명동과 해운대 한복판에 대형 빌딩을 지어 올린 셈이다.
중국 부동산·건설 자본이 한국을 공습하고 있다. 제주도와 해운대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유망 부동산 개발은 중국 자본이 싹쓸이하는 모양새다. 완다그룹의 경우 이랜드와는 별도 채널로 세계 최대 간척지인 새만금 진출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과거 중국이 공사장 인부 같은 노동력을 앞세워 한국 건설 시장에 들어왔다면, 최근에는 위안(元)화 파워를 앞세워 돈줄을 틀어쥔 시행사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특히 홍콩 장강(長江)실업의 리자청(李嘉誠·리카싱) 회장이 한국 부동산에 베팅한 사실이 알려지며 중국 건설 업계의 한국 투자 열기는 더 높아지고 있다. 장강실업은 지난해 말 호주계 맥쿼리코리아의 한국 부동산사업 지분을 인수했다. 중화권에서 ‘재신(財神)’으로 불리는 리자청의 투자방향은 투자자들의 교과서다. 미국 투자자들이 버크셔해서 웨이 워렌 버핏 회장의 투자방향을 주시하는 것과 같다.
리자청의 투자를 계기로 초창기 하얼빈의 펀마(奔馬)실업, 허페이의 란딩(藍鼎)그룹, 칭다오의 바이통(百通)그룹 등 무명의 지방 기업들이 주도하던 대한(對韓) 투자는 중국 굴지의 대기업들로 교체 중이다. 완다그룹을 비롯해 뤼디(綠地)그룹, 신화롄(新華聯)그룹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 밖에 완커(萬科)와 소호(SOHO)차이나 같은 중국 굴지의 부동산 디벨로퍼(시행사)들도 국내 대기업과 합작 등을 통해 한국 진출을 타진 중이다.
반면 과거 중국 건설 근로자를 부리던 한국 건설사는 점차 중국 부동산 업체의 합작사 혹은 하도급 업체로 전락 중이다. 1992년 한·중수교 20여년 만에 갑(甲)에서 을(乙)로의 전환이다. 해운대 엘시티에서는 부산 지역 업체들이 중건으로부터 일감을 받고 있다. 상하이 뤼디그룹이 투자한 제주헬스케어타운에서는 한화건설이 뤼디로부터 일감을 수주해 시공사로 나섰다.
한화건설 홍보실 신완철 상무는 “중국 업체들은 저렴한 인건비와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경쟁업체서 불가능한 금액으로 공사를 수주한다”며 “또 마케팅과 분양에까지 관여해 분양이 안 될 경우 자신들이 물량을 떠안아 버린다”고 말했다. 신 상무에 따르면, 중국 부동산·건설 업체는 미분양 물량을 동(棟) 단위로 자체 매입해 버리는 사례도 다반사라고 한다. “국내 업체들은 향후 운영에 따른 인건비와 수선비 부담과 부채비율 문제로 인해 절대 중국 업체와 같이 미분양 물량을 떠안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국내 부동산·건설 시장의 특수성도 이 같은 사태를 부채질하고 있다. 해외 부동산·건설 시장은 대개 디벨로퍼가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건설사에는 단순히 일감을 맡기는 식으로 운영된다. 트럼프타워를 올린 미국 트럼프그룹과 롯폰기힐스를 만든 일본 모리빌딩 등이 대표적 디벨로퍼다.
하지만 국내 부동산·건설 시장은 그간 시행사가 아닌 대기업 건설사 위주로 성장해 왔다. 시행사들은 규모 자체가 영세해 덩치가 큰 시공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부동산 개발자금을 공급하는 은행 등 금융권도 미래 자금흐름보다는 시공사의 보증만 믿고 자금을 집행해 왔다. 사업성 평가보다는 간판만 보고 돈놀이를 해온 것.
하지만 수년 전부터 부동산·건설 경기가 흔들리면서 문제가 생겼다. 경기침체로 건설사들이 휘청대자 은행 등 금융권이 자금 공급을 중단한 것. 또 2011년 저축은행 영업정지 사태로 금융당국이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하자 대기업 건설사마저 자금난에 봉착했다. 결국 돈줄이 마른 시행사가 돈줄을 찾다가 만난 곳이 중국의 부동산·건설 자본이다.
중국의 부동산·건설 업체들은 그간 국유 상업은행으로부터 저리에 돈을 빌려 토지사용권을 사들인 뒤 아파트와 쇼핑몰을 무차별 공급했다. 중앙은행인 중국인민은행의 저금리 기조도 이에 한몫했다. 저렴한 인건비 대비 높은 분양가로 사실상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였다. 또 2008년 말 후진타오·원자바오 정권 때 실시한 4조위안(약 720조원)의 경기부양으로 덩치까지 키운 상태였다. 그러던 중 중국 정부가 최근 부동산 규제정책을 펴자 해외진출을 타진해 왔는데 그 대상지로 부상한 곳이 한국이다.
“중국 건설 업체들은 한국 시장을 유망시장으로 본다”는 것이 국내 부동산 업계 관계자의 지적이다. 주상복합이나 콘도미니엄을 지어 미분양이 발생해도 자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객실 판매나 분양에 나설 수 있어서다. 양국 간 거리가 2시간 내외다 보니 수요 역시 안정적이라는 평가다. 결국 한국 시장이 중국 부동산·건설 업체의 해외 진출 전초기지로 전락한 셈이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유위성 연구위원(해외건설 담당)은 “저축은행 사태와 해외사업 손실 등으로 국내 부동산·건설 업체들이 현금 유동성 관점에서 위기감을 느끼며 운신의 폭이 많이 좁아졌다”며 “중국 업체들은 플랜트 건설 등에서는 아직 국내 업체들과 차이가 있어 호텔과 쇼핑몰 같은 수익성 위주의 투자개발형 사업 형태로 국내에 많이 들어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