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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항복할 줄 알았다” 서울 점령한 김일성의 착각

해암도 2024. 9. 8. 13:34

신복룡의 해방정국 산책


 〈제7부〉 김일성 신화의 진실

 ③ 김일성은 왜 전쟁을 일으켰나?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은 자료 
1985년, 유학을 떠나기에는 늦은 나이인 마흔세 살, 나는 워싱턴 근교 수틀랜드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황량한 벌판에 서서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어림하여 30억 쪽의 문서가 소장돼 있다는 이곳에서 명색이 한국전쟁 문서를 찾고자 왔다지만,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도 한국 현대사 연구의 전설이 된 방선주(方善柱) 교수를 만나 도움을 받았으나, “나는 이곳에서 7년 동안 8만 쪽의 자료를 복사했는데도 아직 한국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다”는 말이 나를 더욱 절망하게 했다. 2개월이 지나서야 무슨 자료가 어디쯤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귀국할 무렵에는 1만5000쪽의 1차 사료를 복사할 수 있었다. 이것이 내 한국 현대사 연구의 거름이 됐다.


한국전쟁 당시 전황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는 김일성(왼쪽). 중앙포토

전쟁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역사의 재앙이었다. “전쟁은 부흥을 가져온다”는 스탠퍼드대학교 역사학자 모리스(Ian Morris)의 글 ‘전쟁! 그게 어디에 도움이 되는데?’(War! What is it Good For?, 2014)는 너무 잔인하다.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요, 정치는 피 안 흘리는 전쟁일 뿐이다. 죽지 않을 수 있다면 전쟁은 가장 멋진 게임이라고들 말하지만, 로마의 정치인 대 카토(Cato the Elder)의 말처럼, 용맹한 것과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거기에는 무고한 생명들이 권력자의 오판이나 허세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훈련되지 않고 비이성적인 충동에 따라 움직이는 군대보다 국가의 통치에 더 두려운 것은 없었다.

전쟁, 그 무모하고도 덧없는 참상
인간은 왜 전쟁을 일으키는가? 수많은 변명과 명분에도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은 떳떳하거나 선명하지 않았다. 그 원인을 굳이 정리해 본다면 자원의 결핍,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영토의 확장에 대한 욕심, 정치지도자의 공명심과 헛된 영웅심, 승리할 것만 같은 오판으로 말미암은 충동 때문이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전쟁은 위의 요소를 함께 갖춘 특이한 전쟁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전쟁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다. 광기와 탐욕, 그리고 복수심 앞에 윤리나 도덕적 외침이나 이성의 호소력은 매우 낮았다. 그 참혹함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심각하다.

한국전쟁 당시에 어느 장교가 사병에게 물었다.
“내가 만약 하느님이라면 이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너에게 무엇을 줄까?”
그랬더니 그 사병이 이렇게 대답했다.

“내일(來日)을 주십시오”(Gimmi tomorrow)
(S. Weintraub, 2000, p. xiii).
이 대화에 전쟁의 절박함이 잘 나타나고 있다.

한국전쟁은 개전의 이유와 개전 책임에 대해 가장 논란이 많은 전쟁이었다. 따라서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의 관문서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주의자들의 남침설, 수정주의자들의 남침유도설, 그리고 재수정주의자들의 내전설 등 그 해석이 구구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김일성은 왜 전쟁을 결심했는가? 김일성은 무엇을 의도했는가? 그리고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었는가?”라는 질문을 화두(話頭)로 삼아 1950년 6월의 상황을 되돌아보려는 데에 그 본뜻이 있다.

건국 초기인 1948년까지만 해도 “남한의 진보(좌익) 세력은 막강하며, 혁명적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김일성은 생각했다. 그뿐 아니라 조선인민군은 패퇴한 일본 34군과 58군의 무기를 접수해 무장도 든든했다. 중국혁명과 러시아 홍군에서 실전 경험을 쌓고 귀국한 2개 사단 규모의 조선인 병력도 뿌듯했다.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까지 기간의 북한에 주재한 소련 군사고문의 숫자는 중공에 주재한 소련 고문의 숫자보다 많았다(Sergei N. Goncharov, 1993, 133쪽).


왼쪽부터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스탈린에게 먼저 전쟁 구상 밝혀 
젊은 나이에 최고 권좌에 오른 김일성은 좀 허황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모두 딸 것만 같은 도박사의 자기최면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건국 초기의 불안정한 국가 기반 위에서 자기의 힘만으로 한반도를 공산화할 능력도 없던 그는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J. Stalin)과 한국전쟁을 협의했다. 이 자리에서 오고 간 논의는 주로 자신의 개전 의지를 스탈린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때 김일성이 ‘먼저’ 전쟁 구상을 스탈린에게 피력했으나, 스탈린은 그에 동의하지 않았다. 남침 계획을 들었을 때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을 걱정했다. 남한의 공산화가 바람직한 것은 사실일지라도 소련은 미국과 전쟁을 감수할 뜻이 없었다. 스탈린은 개전을 협의하는 단계에서 만류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남조선에서 미군이 물러난 지금 초전(初戰)에 승리하면 미국이 개입할 겨를이 없어 승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김일성의 주장에 설득됐다.

“미국은 그토록 작은 나라를 구출하고자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모택동(毛澤東)의 판단도 소련의 결심에 도움을 주었다. 미국이 중국의 국공 내전에서 국부군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택동이 그런 판단을 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스탈린의 머뭇거림이 개전으로 바뀐 것은 1950년 2월 전후인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1949년 4월 28일자로 스탈린에게 비행기·전차·탄약 등 전투 장비 51종, 공병 장비 43종, 통신 장비 42종과 기타 부품을 요청해 소련이 이를 “부분적으로” 응낙한 사실이 있지만(『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문서』(YS), 1996, 255~267쪽), 이는 개전을 결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어서 개전과 관련해 큰 의미를 둘 것은 못 된다.

그 자리에서 또한 김일성은 박헌영(朴憲永)의 말에 도움을 받아 개전의 첫 총성과 함께 남한에 있는 1500~2000명의 빨치산과 20만 명의 지하당원이 봉기함으로써 남한이 즉시 붕괴하리라고 장담했다(‘Tunkin이 Vyshinsky에게 보낸 암호 전문’, 1949. 9. 11. CWIHP Bulletin, Issue 5, Spring 1995, 6쪽).

김일성은 지리산의 게릴라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여기까지 대화가 진전되자 스탈린은 중공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김일성의 의지를 지지했다. 스탈린으로서는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남의 손으로 적을 이기는 방법[차도살인·差刀殺人]이라면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이 노획한 소련제 탱크. 중앙포토

김일성은 왜 계속 남진하지 않았나 
내가 한국전쟁의 개전 초기에서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수수께끼는 김일성이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한 다음 그 중요한 초전의 시각에 왜 남진하지 않고 서울에서 3일의 시간을 보냈는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숨 고르기라느니(소련 군사 고문 Stanikov), 한강 도강 장비의 부족이라느니(백선엽), 상부의 지시를 기다렸기 때문(Dean Rusk)이라느니 온갖 이론이 난무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본디의 작전 계획에는 수원 이남으로의 진격이 포함되지 않았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김일성이 전면전을 획책했다면 서울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승세를 몰아 남진했을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당시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兪成哲)의 다음 같은 회고담을 들어보는 것이 좋다.

 6월 28일 아침, 탱크 사단을 앞세운 인민군 제4사단이 서울에 입성했다는 보고를 받고 나는 이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 우리의 남침 계획은 사흘 안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작전 개념은 우리가 남한 전역을 장악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남한의 수도를 점령하면 남한 전체가 우리의 손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했다. (…) 

 적의 수도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세계의 전사(戰史)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우리는 20만 남로당 당원이 봉기하리라는 박헌영의 호언장담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 만약 이때 인민군이 쉬지 않고 진격을 계속했다면 한국전쟁의 역사는 전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유성철, 한국일보 1990. 11. 13). 

유성철의 증언인즉 한국전쟁은 당초 ‘3일의 전쟁’이 ‘3년의 전쟁’으로 길어진 것이다. 이것은 “3일 이내에 서울의 점령을 끝내고 낙엽 지기 전에 남한을 해방할 수 있다”는 김일성의 주장(『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문서』, 서울신문사, KO-4D, 1995, 2쪽)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개전 직전에 북한군 참모부가 4사단 참모장에게 내린 ‘정찰명령서 제1호’와 보병 4사단 이권무(李權武)의 이름으로 하달된 ‘작전명령서 제1호’(U.S. Dept. of State, 1950, 28~32쪽)에도 서울 이남의 작전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허술했던 북한군 장비
그뿐 아니라 부산까지 쳐내려가는 전면적 장기전을 계획했다고 보기에는 북한군의 장비가 너무 허술했다. 6월 23일자로 인민군 657부대에 하달된 군장(軍裝) 명령에 따르면, 전투원은 1개 분대에 모포 한 매, 세 사람에게 식기 한 개, 미숫가루를 주로 한 비상식량, 군화 한 켤레, 세면도구, 예비 발싸개, 마초(馬草) 이틀분으로 엄격히 제한돼 있다(RG 242, SA2010 Item 1/52, WNRC). 이와 같은 경장비는 속전(速戰)을 의미하며 남한 전역을 장악하기 위한 장비로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장마가 오기 전에 전쟁을 종식해야 하며, 장기전은 불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김일성으로서는 짧은 시일 안에 전쟁을 끝내야 하는데, 그 시간 안에는 남한 전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옹진~서울의 장악에 주력했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작전 명칭은 ‘옹진작전’이었다(『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문서』, 외무부, 1995, 21쪽). 클라우제비츠(Karl von Clausewitz)의 『전쟁론』(On War)의 전략적 핵심은 “신속하게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터크맨, 2008, 81쪽).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사실은 인민군이 서울의 남쪽에 있는 수원(水原)의 장악을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산비행장을 장악함으로써 남한의 공군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 말고도 서울에 있던 정부 요인의 퇴로(退路)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서울을 점령한 2~3일 동안에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북한군으로서 서울에 최초로 진주한 부대는 3사단 9연대로서 그 시간은 27일 23시였다. 그리고 곧이어 4사단이 진주했다. 이들이 3일(27~29일) 동안 서울에서 한 일은 “군인, 경찰, 그리고 민족 반역자를 색출하는 것이었다”(Roy Appleman, 1961, 32, 53쪽)는 것이 미국의 해석이다.

그러나 요인 색출 작업은 미국 측의 설명처럼 ‘처단’이 목적이 아니라 그들의 납치를 통해 남북 협상의 우위를 장악하려는 정치 공작이었다.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북한군은 6월 말에 당시 서울에 남아 있던 48명의 국회의원을 포함해 김용무(金用茂)·원세훈(元世勳)·백상규(白象圭)·장건상(張建相)·오세창(吳世昌)·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유동열(柳東說)·조완구(趙琬九)·안재홍(安在鴻) 등을 공산군의 영문(營門)으로 끌고 나가서 ‘항복식’을 거행하고 북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했으며 끝내 이들을 북한으로 이송했다(『金昌淑文存』, 1994, 62쪽).

전선의 구축에도 의문이 남는다. 곧 6월 25일에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을 돌파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동부전선의 돌파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춘천 방면의 진격은 더디었다. 북한의 탱크 부대가 산악 지대를 통과하기가 쉽지 않았고, 남한군 6사단의 저항이 결연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지만(Roy Appleman, 27~28쪽), 그와는 달리 서울 공격에 주력부대를 투입하다 보니 동부전선 침공에 무게를 두지 않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의문이 제기되는 또 다른 부분은, 김일성이 진실로 남한 전역을 장악하려 했다면 남하하던 2사단과 7사단의 병력은 홍천에서 ‘서쪽으로 우회전하여’ 수원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계속 ‘남쪽으로 진군하여’ 횡성·원주·제천·단양·영주를 거쳐 민중 봉기와 연고가 깊은 대구를 장악했어야 한다. 당시 북한군은 T34 탱크 242대, SU72㎜ 자주포 176대, 장갑차 54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그것이 가능했다.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제한전 
당시 남한군은 대전차 무기를 전혀 보유하지 않았고 전차공포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이 전차부대로 신속하게 남진을 감행했었다면 그들은 쉽게 남한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Dean Rusk, 1990, 163쪽). 그러나 북한군 2사단과 7사단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한반도 전역을 무력으로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가 가능하리라고 오판했다. 그는 이승만(李承晩)이 항복할 줄로 알았다.

한국전쟁은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제한전이었다는 나의 글이 발표되자(한국정치학회보 30/3, 1996, pp. 163~182쪽), 김영호(金暎浩, 성신여대 교수, 현 통일부 장관)는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과정』(1998, 60~79쪽)에 나의 입장을 반박하는 장문의 글을 게재했다. 나의 글에 대해 김 교수가 제기한 반론의 핵심은 한국전쟁이 미·소 냉전의 소산이었지 김일성의 결심 사항이 아니었으며, 김일성은 서울만을 점령하려 한 것이 아니라 남한 전역을 공산화하려 했으므로 서울제한점령설은 김일성의 전쟁 책임에 면죄부를 줄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김영호 장관의 자세하고도 정중한 지적에 감사하지만, 사실의 규명은 정죄(定罪)에 앞서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지 김일성을 비호할 뜻은 없었다. 김일성에 대한 면죄부의 문제를 말하자면,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개전 의지에 따른 전쟁이었다는 나의 논리보다는, 한국전쟁이라는 거대한 미·소의 냉전 구도 속에서 김일성은 한낱 졸(卒, pawn)에 지나지 않았다는 논리가 더 강하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

〈제1부〉이승만과 김구의 만남과 헤어짐
①은원(恩怨)의 30년
②상하이 임시정부의 비극
③해방정국에서의 우정과 이별
④죽음이 갈라놓은 역사적 평가
〈제2부〉여운형과 김규식의 만남과 헤어짐
①천성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기
②해방정국에서의 인연과 야망
③한국에서 중도파가 설 자리는?
④좌우합작이라는 허구의 희생자들
〈제3부〉송진우와 장덕수, 중도파의 비극적 운명
①시대의 광기에 희생된 송진우
②친탁·반탁 대립의 희생자 장덕수
〈제4부〉남북협상이라는 신기루
①김구와 김일성의 다른 계산
②돌아오지 않은 사람, 홍명희 (상)
③돌아오지 않은 사람, 홍명희 (하)
④북한에 남은 백남운과 이극로
〈제5부〉박헌영, 한 공산주의자의 사랑과 야망
①가족이라는 굴레
②여인들과의 만나고 헤어짐
③해방정국에서의 비극
④한국전쟁과 박헌영의 책임
〈제6부〉해방정국의 3대 비극
①1946년 대구 사건(상)
②1946년 대구 사건(하)
③1948년 제주 4·3사건(상)
④1948년 제주 4·3사건(하)
⑤1948년 여수·순천 사건(상)
⑥1948년 여수·순천 사건(하)
〈제7부〉김일성 신화의 진실
①청년 마르크시스트의 탄생
②김일성을 둘러싼 가짜 논쟁
[참고문헌]  
Appleman, Roy, U.S. Army in the Korean War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Washington: OCMH at the U.S. Army, 1961)
Clausewitz, Karl von, On War(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6)
CWIHP Bulletin, Issue 5, Spring 1995.
Goncharov, Sergei N.(et al), Uncertain Partners : Stalin, Mao, and the Korean War(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3)
Morris, Ian, War! What is it Good For?(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oux, 2014)
Rusk, Dean, As I Saw It(New York: W. W. Norton & Co., 1990)
Weintraub, S., MacArthur’s War(New York: The Free Press, 2000)
『金昌淑文存』(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4)
金暎浩,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 과정』(두레, 1998)
북한군 참모부, ‘정찰명령서 제1호’ 및 보병 4사단 이권무(李權武), ‘작전명령서 제1호’(U.S. Dept. of State, 1950, 28~32쪽)
신복룡, ‘한국전쟁의 기원: 김일성의 개전 의지를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30/3)(1996)
유성철, ‘나의 증언(10)’, 한국일보 1990. 11. 13.
터크맨(Barbara Tuchman) 지음/ 이원근(옮김), 『8월의 포성』(평민사, 2008)
『한국전쟁 관련 러시아 문서』(YS본, 외교부본, 서울신문본 1996)
백선엽 인터뷰(Seoul: Hilton Hotel, June 25~27, 1990)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5821

 


중앙일보     발행 일시2024.09.06     에디터    신복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