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대원 '다원'의 언어탐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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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역시민회에서 청년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제공하는 강의를 들으러 갔다. 본격적인 강의 내용을 시작하기에 앞서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시민으로서 준수해야 할 항목들에 관한 선서문 낭독 시간이 있었다. 선서의 조항을 하나씩 읽어가던 중,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여러 개의 조항이 있다면 응당 첫 번째 조항은 ‘하나’, 두 번째 조항은 ‘둘’, 세 번째 조항은 ‘셋’으로 시작해야 할 텐데 어째서 선서문의 모든 조항은 ‘하나’로 시작하는 것일까?
나 ○○○은 다음 사항을 준수할 것을 선서합니다.
하나, 나는 … 합니다.
하나, 나는 … 합니다.
하나, 나는 … 합니다.
선서의 모든 조항이 ‘하나’로 시작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항목들을 순차 나열하는 경우들과는 분명 다르다. 즉, 선서문에서 쓰이는 ‘하나’의 용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수효를 셀 때 사용하는 ‘하나’의 용례와 구분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이상하게 느껴질 법하지만, 어릴 적부터 다양한 행사 등에서 많은 선서문을 읽어오며 늘 당연하게 여기고 의문을 느끼지 않던 지점이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은가?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서’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선서란 여럿 앞에서 굳게 약속하거나 다짐하여 말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학교나 기관 등에서 반드시 선서문의 내용을 준수할 것임을 공표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즉, 낭독된 선서문의 각 조항은 그 우선순위나 경중을 따져서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지켜야만 할 중요한 항목들이라는 것이다.
‘하나’, ‘둘’, ‘셋’은 수사로서 그 순서가 존재하는 만큼,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도 순번을 매기는 것처럼 느끼게 할 여지가 있다. 흔히 제일 처음에 먼저 놓인 내용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선서의 각 조항을 ‘하나’, ‘둘’, ‘셋’으로 시작하게 한다면 앞쪽에 놓인 조항이 뒤쪽에 놓인 조항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선서의 각 조항은 우선순위를 매기지 않고 모두 예외 없이 지킬 것을 맹세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조항이 동등한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는 점을 천명해야 한다. 그렇기에 순서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항목을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모든 조항을 ‘하나’로 시작하도록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서에서 각 조항의 앞에 붙은 ‘하나’는 중요하거나 먼저 해야 할 어느 것 없이 모두 중요한 항목임을 나타내는 것으로, 선서라는 행동의 의의에 꼭 부합하는 쓰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에 담긴 의미를 알고 나니 앞으로 선서문을 읽을 때 모든 조항의 의미를 마음 깊이 새기게 될 듯하다. 작은 말 한 조각에 큰 의미가 담겨 있음이 새삼 놀랍지 않은가?
톱클래스 조선일보 입력 2023.01.10 다원(필명)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0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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