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혜 경희대 산학협력단 연구원의 '살아내다' 칼럼 중.
'살아내다’ 칼럼을 영상으로 재구성한 ‘살아내다 번외편-고민을 나눕니다’를 비정기적으로 내보냅니다. '살아내다'는 죽음을 통해 삶을 새롭게 보는 경험을 한 다양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김은혜 경희대 산학협력단 연구원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한의사인 김 연구원은 강동경희대한방병원에서 말기 암 환자를 돌보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지난 6월에는 그동안 만난 암 환자와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책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를 냈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을 영상과 글로 만나 보세요. 김 연구원이 인터뷰에서 말한 기적적으로 암 사이즈가 줄어든 환자의 사연은 오는 25일에 게재되는 그의 '살아내다' 칼럼에 자세히 실립니다.
사후세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믿어요. 실제론 없더라도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함부로 판단하긴 어렵지만 살다 보니 한 사람의 짧은 인생에서 권선징악이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이 되더라고요. 그렇기에 사후의 세계에서라도 권선징악이 구현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의학적으로는 기계적 오류에 불과하다고들 얘기하지만 분명히 어떤 생체 징후도 잡히지 않아서 사망 선고를 하려는 순간 의식이 돌아오길 몇 차례 반복하다가 꼭 보고 싶었던 누군가가 오고 나서야 숨을 멈추는 환자도 봤습니다. 사후세계까지는 몰라도 영혼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죠.
한방병원 암 병동은 실질적 치료보다 마지막 선택지라는 느낌을 주는데요, 그래도 기적적으로 호전된 환자가 있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치료의 선택지가 많지 않고 또 치료를 해봤자 1년 정도만 더 살 수 있겠다 싶은 환자 중에서도 전이 없이 암이 점점 줄어 처음에는 불가능했던 수술이 가능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폐암이 간·뇌 등 온몸에 전이되면 생존 기간이 보통 1년 내외입니다. 그런데 뼈 등에도 곧 전이될 거라 생각했던 한 환자의 암 사이즈가 점점 줄어드는 거예요. 게다가 운 좋게도 1년의 치료를 버티고 내성이 생길 때쯤 신약이 나왔어요. 신약 반응이 굉장히 좋아서 간·폐 절제 수술 후 벌써 4년 넘게 지났기 때문에 곧 완치 판정을 받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환자만의 비법이 있었는지, 혹은 치료과정에서 제가 알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환자가 이런 기대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매일 말기 암 환자를 보는 것이 힙겹지는 않나요?
초기에는 굉장히 많이 지쳤어요. 왜 그럴까 생각해 봤더니 환자나 보호자한테 감정 이입을 지나치게 많이 하더라고요. 제 아버지는 암 환자 보는 혈액종양내과 교수, 어머니는 약사였어요. 덕분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는데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투병에서 임종까지 불과 일주일이 걸렸을 만큼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제가 받은 충격도 충격이지만 어머니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오빠와 저를 비롯해 외가·친가의 모든 가족 공동체가 무너지는 걸 목격했어요. 한 사람의 부재(죽음)가 남겨진 이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알게 됐고, 이런 제 경험과 무관하지 않겠죠. 그런데 환자와 보호자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공감을 잘 해주는 게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의사로서의 제 역할은 환자가 직접 호소하지 않더라도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리 치료를 결정해야 하는데 감정적으로 너무 이입하다 보니 오히려 객관적 판단에 도움이 되지 않더라고요. 이젠 가운을 입은 나와 입지 않은 나의 캐릭터를 명확히 분간하고 감정 이입도 자제하려고 합니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까?
제 경험상 가장 확실한 건 '시간이 어떻게든 해결해 준다'는 겁니다. 물론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는 개인마다 다 다르죠. 다만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는 확실히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너무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다른 이의 죽음에서 벗어나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좀 더 생각해봐야 합니다. 누군가의 엄마나 아빠, 혹은 회사의 구성원일 수 있는데 그 역할을 잘해야 죽음도 잊을 수 있거든요. 죽음에 너무 매몰돼 원래의 다른 역할까지 포기해버리면, 그 자체가 또 부정적인 감정으로 오기 때문에 원래 역할에 충실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가치관이 남다를 거 같은데요.
그저 삶이 공허해지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합니다.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 가령 경제적 수준이나 사회적 지위, 혹은 가족 내에서의 역할 등 한 사람에게도 여러 면모가 있지 않습니까. 그중 상당 부분이 공허하다고 느끼면 전반적으로 삶 자체를 우울하다고 여기더라고요. 그런 공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다양한 경험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나요?
환자나 보호자에게 감사의 말을 들을 때입니다. 당신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가족이 돌아가셨는데도 저한테 찾아와서 ‘고통 없이 가셨다, 고맙다’ 이런 얘기해 해주실 때 가족을 떠나보냈는데 뭐가 고마울까 싶으면서도 그 말 한마디에 매우 큰 보람을 느낍니다.
김은혜 경희대 산학협력단 연구원 중앙일보 입력 202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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