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화권서 자라났느냐에 따라 치즈 등 발효 음식 섭취 능력 갈려
음식의 영혼, 발효의 모든 것
샌더 엘릭스 카츠 지음|한유선 옮김|글항아리|936쪽|4만9000원
“치즈의 맛과 향은 어떤 이에게는 황홀함을, 또 어떤 이에게는 역겨움을 안긴다.”
‘주방의 화학자’라 불리는 미국의 음식 과학자 해럴드 맥기는 이렇게 말했다. 코를 찌르는 치즈 냄새에 비위가 상하는 사람들은 보통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치즈의 향과 겉모양에서 부패한 음식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맥기는 발효를 ‘통제된 부패’라 정의한다.
‘신선’과 ‘부패’라는 정반대 개념 사이의 창조적 공간에 잘 보존된 발효 음식이 존재한다. 발효한 음식과 썩은 음식의 구분은 그 음식을 먹은 사람이 어떤 문화권에서 자라났느냐에 달렸다.
북극 지방 사람들은 땅속에 몇 달 동안 묻어둔 물고기를 주식으로 먹으며 성장하지만, 어른이 되어 이를 처음 접한 사람은 ‘썩은 물고기’라는 혐오감을 극복하기 어렵고, 그의 신체 역시 물고기 안에 있는 미생물 집단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
치즈와 마찬가지로 발효시킨 물고기를 먹을 수 있으려면 그 맛과 미생물 생태계에 적응한 상태여야 한다. 미국의 발효 전문가로 2012년 펴낸 이 책으로 ‘요식업계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제임스 비어드상(賞)을 받은 저자는 ‘문화’라는 관점에서 발효음식에 접근한다.
900쪽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컬처(culture)’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문화’라고 해석되는 ‘컬처’가 요구르트를 발효시키기 위해 우유에 첨가하는 종균(種菌)을 뜻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컬처’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은 “경작한다”는 뜻. “사람들은 진주를 ‘양식’하고 세포를 ‘배양’하며 우유를 ‘발효’시킨다고 말할 때 ‘컬처’라는 단어를 쓴다.
우리가 언어, 음악, 미술, 문학, 과학, 영적 활동 등 인류라는 집단의 영속을 추구하기 위한 모든 행위는 물론이고 우유를 요구르트로 바꾸는 박테리아 집단을 묘사할 때도 ‘컬처’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는 점에는 상당히 심오한 측면이 있다.”
발효를 이용한 저장 채소. 저자는 “모든 채소는 발효시킬 때 액체에 담근다. 곰팡이를 비롯한 호기성(好氣性) 미생물의 성장을 막고 산성화 박테리아의 증식을 촉진시키기 위해서다”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요구르트’는 유럽 동남부와 지중해 연안에서 즐기던 특정 스타일의 발효 우유를 가리키는 터키식 호칭. 저자는 “신선한 우유란 냉장 기술이 출현한 이후인 20세기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그 전까지는 젖소나 염소의 젖을 짜는 사람들 외에는 우유를 발효시킨 상태로 섭취할 수밖에 없었다. 발효는 부패하기 아주 쉬운 우유라는 물질을 안정적인 형태로 변형시켜 보존 기간을 연장시키기 때문이다.
발효의 원리와 도구, 기법 등 제목 그대로 ‘발효의 모든 것’을 백과사전처럼 망라한 이 책에서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채소의 발효’에 대한 챕터. 채소를 발효시켜 보존하는 전통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온대 지방에서 겨울에 채소의 비타민C를 공급받는 주된 방법은 이를 발효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미 기원전 6세기에 “염채(鹽菜)를 먹어야 겨울을 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000년 뒤, 영국 모험가 제임스 쿡은 항해에 나설 때마다 양배추를 발효시킨 사워크라우트를 상비해 선원들에게 먹여 괴혈병을 물리쳤다.
“한국에 가본 적도 없지만 김치를 만드는 방법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는 저자는 ‘발효 채소’에 해당하는 영단어가 없다며 ‘사워크라우트’와 ‘김치’의 합성어인 ‘크라우트-치’라는 단어를 사용하자고 주장한다.
미국·유럽의 대표적인 발효 채소인 사워크라우트는 주로 양배추와 소금으로 만드는데, 전통적인 크라우트 제조법 가운데 상당수는 월력(月曆)을 바탕으로 최적의 준비 시점을 결정한다. 어느 여성은 할머니의 사워크라우트 레시피를 저자에게 전해주며 “달이 차오를 때 만들면 시들거나 거무튀튀하게 변하는 법이 없다”고 말하지만, 지역에 따라 달이 기울 때 사워크라우트를 만드는 곳도 있다.
배추나 양배추만 발효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효가 불가능한 채소는 없다. 미국 테네시주에 사는 한 남성은 케일과 양배추를 반씩 섞어 발효시켜 ‘수퍼그린 사워크라우트’를 만들며, 버몬트주에 사는 또 다른 남성은 램프(야생부추)와 족도리풀에 소금을 넣고 발효시켜 김치를 담근다. 인류는 오랫동안 자기가 사는 땅에서 나는 채소를 발효시켜 저장해 왔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가치를 고수해 왔다는 것이 발효음식의 도드라지는 특성 중 하나다.
지적인 즐거움을 맛보며 읽을 수 있는 책. 천연 발효음식이 사라지고 공장제 발효제품이 식탁을 지배하게 된 현실에 대한 저자의 우려는 상투적으로 느껴지지만 빵과 포도주, 맥주뿐 아니라 초콜릿과 바닐라에까지 이르는 광대한 기행이 쿰쿰하면서도 달큼하다. 원제 The Art of Fermentation.
[곽아람 기자 aramu@chosun.com] 입력 202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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