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카페베네 김선권 대표 '내 인생의 아르바이트' - "고무장갑 사세요" 온동네 두드리던 소년… 글로벌 시장 두드린다

해암도 2013. 10. 2. 13:34
[CEO가 말하는 내 인생의 ○○○] 초등1년 때 아버지 돌아가신 뒤 9남매에게 먹고사는 건 전쟁… 친구들 大入공부할 때 잡화 팔아
남의 집 두드릴 땐 두려웠고 거절당할 땐 힘들었지만 다시 옆집으로 내달려… 이런 도전정신이 오늘의 밑거름
'왜 우리 엄마는 비옷도 없을까?'

큰비가 오면 어머니는 논의 물꼬를 터주기 위해 비옷도 없이 삽을 들고 논으로 달려가셨다. 비에 흠뻑 젖어 돌아오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린 나는 안쓰러웠다. 그때마다 빨리 어른이 되어 어머니께 비옷을 사드리겠다는 결심을 했다.

나는 전남 장성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40분을 간 다음 다시 걸어서 30분을 더 가야 닿을 수 있는 마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먹고살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부닥쳤다. 나도 일찍부터 아르바이트로 생업에 뛰어들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주말이면 고향과 가까운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며 고무장갑 같은 생활잡화를 팔았다. 할머니, 아주머니들은 어린 학생이 물건을 팔러 다니는 것이 안쓰럽고 대견했는지 외면하지는 않았다. 열 집을 돌면 두세 집은 내 물건을 사주었다.

꿈 많은 사춘기 시절, 대학 입학을 준비해야 할 나이에 나는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며 보냈다. 힘들게 보낸 이 시절이 나에겐 큰 자산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겪어온 고생 탓에 내성(耐性)이 키워져 웬만큼 힘든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군 생활을 마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진 게 없으니 밑바닥에서부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처음엔 밑천이 덜 드는 복조리 장사부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모은 종잣돈 2000만원으로 경기도 동두천에서 친척 형과 함께 호프집을 열었다. 경험 없이 시작한 호프집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래도 주저앉지 않았다. 오락실 사업을 시도했다가 접고 다시 감자탕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었다. 여기서 작지만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결과를 얻었다. 그래도 나는 더 큰 사업을 꿈꾸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카페베네 매장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김선권 대표.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카페베네 매장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김선권 대표. 그는“어릴 적 고생을 많이 해서 이제는 웬만한 힘든 일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2005년 가을 고생만 한 가족과 함께 남미의 콜롬비아와 에콰도르로 여행을 갔다. 현지 음식만 먹다가 한 끼 정도는 한식을 먹고 싶어 가이드에게 한식당을 안내해 달라고 했다. 가이드는 "한국 교민이 100가구 정도밖에 없다 보니 수지가 맞지 않아 폐업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들러 햄버거로 끼니를 때웠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일본 음식점이 보였다. 가이드에게 "일본 교민은 많은가 보죠"라고 물었더니 뜻밖의 답을 들었다. 우리 교민보다 적다는 것이다. 일본 식당에 들어가 보니 손님은 거의 다 현지인이었다. 그들 입에서 '사시미' '스시' '덴푸라'와 같은 일본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한식당은 교민들에게만 음식을 팔다가 폐업을 했다고 하는데, 일식당은 남미 사람들에게 일본 음식을 팔고 있었다. 우리 외식업이 글로벌화가 안 됐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내가 외식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어야지'하는 오기가 생겼다. 새롭게 도전할 사업 분야를 선택한 셈이다.

글로벌 브랜드를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커피 사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커피는 전 세계인이 즐기는 음료이기 때문이다. 시장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스타벅스라는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가 국내 시장에서도 굳건했고, 커피빈 등 다른 선발 브랜드들이 시장을 선도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2008년 4월 서울 천호동에 카페베네 직영 1호점을 열었다. 스타벅스, 커피빈 등과 차별화하려고 커피 등 음료 메뉴 외에 2030세대 여성층에게 초점을 맞춘 와플, 젤라토 아이스크림 등 디저트 메뉴를 추가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도록 시장 반응은 미동도 없었다. 투자가 더 필요했다. 실패하면 나는 완전히 망할 수 있었다. 포기하라는 가족의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도전하는 길을 택했다. 그해 겨울 유럽 출장에서 나는 커피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문화 코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흔히 '커피 한잔의 여유'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유럽 카페의 풍경은 그 표현과 딱 맞아떨어졌다. 곧바로 여유로운 문화를 차별화 콘셉트로 정하고, 유럽의 오래된 건물 이미지를 살린 빈티지 인테리어 디자인을 도입했다. 고객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2010년 10월에는 마침내 점포 수에서 국내 1위로 올라섰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10년 말 세계의 심장부인 뉴욕 맨해튼에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에서 정면 대결해 성공하면 글로벌화가 쉽다고 판단했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두렵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다져진 내성과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2년 2월에 문을 연 카페베네 뉴욕 타임스스퀘어 매장은 하루 평균 3000명이 넘는 사람이 찾을 정도로 자리 잡았다. 성공적인 뉴욕 진출을 발판으로 카페베네는 중국 등 아시아 12개국에도 진출했다. 벌써 해외 매장만 250호점에 이른다. 전 세계에서 12시간마다 매장이 한 곳씩 생겨나고 있다.

나는 아직 성공했다고 만족하지 않는다. 여전히 카페베네 브랜드가 스타벅스와 경쟁하는 글로벌화를 위해 꿈꾸고 도전하고 있다. 이런 도전 정신은 어릴 적 골목길을 돌면서 상가와 가정집 문을 두드렸던 순간의 두려움과 용기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숱하게 거절을 당하면서 다시 그 옆집과 앞집으로 내달렸던 경험이 지금처럼 큰 꿈을 품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만드는 동력이 됐다.


[김선권 대표는] 맨손에서 정상으로… 국내 대표 외식사업가

김선권(45) 카페베네 대표는 맨손으로 시작해 성공을 거둔 국내 대표 외식 사업가다.
창업에 관심이 많았던 김 대표는 일본 여행 중 우연히 게임장에 들어갔다가 영감을 받아 29세에 한국세가 법인을 설립했다. 이어 화성침공이라는 게임장 브랜드를 만들어 점포를 300개 이상 내며 성공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게임장을 운영하며 외식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고 32세에 삼겹살 프랜차이즈 사업, 36세에는 감자탕 프랜차이즈 브랜드 행복추풍령을 만들어 대표를 지냈다.

40세에는 ‘카페베네’라는 자체 개발 브랜드로 커피 사업에 뛰어들었다. 한 달에 30개씩 매장을 열며 ‘국내에서 커피를 가장 많이 파는 남자’로 불렸다. 2006년 산업자원부장관상, 2007년 중소기업청장상, 2010년 대한민국 경제리더 대상, 2011년 한국유통대상 국무총리상 등을 받았다. 지난해 세종대학교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했으며, 저서로는 지난해에 출간한 ‘꿈에 진실하라 간절하라’가 있다.
이혜운 기자 조선 : 2013.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