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연분홍 치마가 흩날릴 때… 꿈처럼 인생처럼 봄날은 간다

해암도 2017. 4. 15. 20:51

[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

[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
1973년 출시된 백설희의 골든 히트 앨범. / 조선일보 DB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백설희 '봄날은 간다' 중

소리 없이 꽃이 지고 있다. 만나자 이별이다. 목련이 지더니 벚꽃이 진다. 고고하고 눈부신 순백의 목련은 어느 청춘의 자손이었을까. 그늘 하나 없는 그 맑은 빛은 세상의 비루함을 잊게 했다. 벚꽃은 모든 것을 각오한 생인 듯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미련 없이 진다. 무심한 바람에 꽃잎 분분히 날릴 때, 사람들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임을 알고 마음을 쓰다듬었으리라.

꿈같이 흘러온 봄은 곧 뒷모습을 보일 것이다. 봄은 소문처럼 왔다 소문처럼 떠난다. 그러니 봄에 새긴 약속은 부질없다. 봄 밤에 띄워 보낸 연서(戀書) 한 장, 아침이면 아지랑이처럼 흩어질 것이다.

누구였을까, 봄의 슬픔을 가장 먼저 노래한 이는. 흘러간 가요 '봄날은 간다'를 듣는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그 사람은 어디로 갔나. 둘러보니 봄볕만 외롭다. "알뜰한 그 맹세", 허망할 줄 진작에 알았다. 꽃이 지니, 그 맹세 찾을 길이 없다.

화사해서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덧없이 휘날릴 때, 어느 누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것인가. 지극한 아름다움에 마음을 다치면, 불치다. 이 눈부신 봄날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다음에, 우리 생은 무엇에 기대야 하는가.

연분홍 치마를 입은 여인이 "성황당 길"을 걸어간다. 연분홍의 시간은 반짝이고, 성황당의 시간은 고여 있거나 세상 외곽으로 밀려나 있다. 이 두 이미지가 부딪쳐, 환한 봄 속에 숨은 퇴락과 소멸의 진경을 그려낸다. 성황당에 새긴 약속대로 여인은 "옷고름 씹어가며" 누군가를 기다린다. 하지만 사람은 오지 않을 것이다. 봄은 언제나 "실없는 기약"처럼 오기 때문이다. 봄꽃이 지천으로 붉게 물드는 것도 기다림에 지쳐서다.

노래가 보여주는 가장 처연한 봄의 비극성은 2절 처음에 온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이 구절에 이를 때마다, 속절없이 목이 멘다. 바람에 꺾인 어리고 여린 풀잎이 물에 몸을 맡기고 흘러간다. 생명이 약동하는 봄에, 새파란 죽음이라니. 봄의 한 철을 전 생애로 살아버린 어린 풀잎의 비극적 순간을 선명한 그림처럼 보여주며, 노래는 봄의 허무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간다.

'봄날은 간다' 이 한 곡 안에는 봄과 인생의 비밀이 다 들어있다. 가사는 단순하지만 그 안에 수많은 풍경이 겹쳐져 있다. 그러니 이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서야 가수라 할 수 없다. 조용필, 장사익, 배호, 한영애, 김정호 등 내로라하는 세상의 명창이 한 번씩 다 노래했다. 백설희의 원곡부터, 이후의 모든 리메이크 버전마다 가수들 제각각 설움이 다르다.

조용필은 슬픔을 단단하게 끌어들이고, 장사익은 토해낸다. 배호는 정제된 슬픔을, 한영애는 끈적하고 퇴폐미 넘치는 슬픔을 보여준다. 김정호는 처절하다. 이토록 수없이 다시 부른 노래가 또 있을까. 한국 가요사가 얻은 최고의 절창이다. '봄날은 간다'는 시 전문지 조사에서,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랫말 1위에 뽑혔다. 시인들의 선망과 질 투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봄은 다시 오지만 이 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와 나 사이에 바람 불고 꽃이 질 때,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이 세월이 그저 아득하고 망연했으리라.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당신, 이 봄의 한가운데에서 아직도 못다 한 마음이 남아 있나. 그대의 여리고 물기 어린 마음 위로 꿈처럼 봄날은 간다.


조선일보    이주엽 작사가    입력 : 2017.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