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사를 걸고 정진하는 수도승이지만 어머니가 저 멀리 남쪽 끝 진주에서 이곳까지 찾아오셨으니 마냥 외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어머니를 맞이하든지 아니면 선방을 떠나야 한다."
성철 스님이 출가하고 4년쯤 지난 때이니, 1940년대 초반 무렵. 하안거(夏安居) 중이던 금강산 마하연 선원에선 선방의 전체 회의 격인 '대중공사'가 열렸다. 안건은 '성철 스님 어머니 면회'. 생때같은 장남이 말없이 출가한 후 속을 태우던 어머니가 수소문 끝에 이곳에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불원천리 찾아온 것. 그러나 성철 스님이 소식을 듣고도 내다보지도 않고 참선만 하고 있자 동료 선승들이 보다 못해 들고 일어난 것. 대중의 의견을 따라 어머니를 만난 스님은 들입다 "뭐하러 이(여기)까지 찾아오셨느냐"며 쏘아붙였다.
그러나 성철 스님 어머니도 보통 단수가 아니었다. "나는 니 보러 온 거 아이다. 금강산 구경 왔지." 덕택에 아들 손 잡고 금강산 유람을 마친 성철 스님 어머니의 말씀. "보고 싶던 아들 손 잡고 금강산 구경 잘 했제. 아들한테 업히기도 하고, 매달리기도 하고, 그래 그래 금강산을 돌아다니는데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 마음에 분간이 안 되는기라. 금강산 구경 잘 하고 헤어졌제."
성철 스님은 이렇게 도반(道伴)들 덕에 효도했다. 부모와 맺은 인연도 끊고 출가한 종교인들은 보통 자식들처럼 모시지 못한다. 어버이날을 따로 챙기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대신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효도한다.
한 수녀는 SNS에 "묵주기도를 잊어버렸다. 가르쳐주고 가거라" 하는 어머니 이야기를 올렸다. 사도신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잘도 외우던 기도를 마음대로 건너뛰신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시는 것. 한 비구니는 월간 '해인'지(誌)에 "아버지는 아흔 살 봄날 아침, 함박꽃이 활짝 필 무렵, 어머니는 능이버섯이 유난히 흐드러지게 올라왔던 늦가을 여든여덟 살에 산속 당신들이 머무셨던 방에서 막내 손을 잡고 이승을 하직하셨다. 대웅전에 들어가 단 한 번 삼배(三拜)의 예도 표해 보지 못했던 막내는 어머니 돌아가신 백일째 되는 날, 절집에 들어와 머리를 깎았다"고 출가 사연을 적었다.
히말라야 오지(奧地) 아이들이 '마더'라고 부르는 원불교 박청수 교무. 두 딸을 원불교 교무로 출가시키고 평생 뒷바라지했던 그의 어머니는 어느 날 두 딸 앞에 돈 2000만원을 내놓으셨다. "너희는 아들, 며느리도 없고 딸도 사위도 없으니까 엄마가 그 대신 너희 환갑 준비를 했다. 엄마 정성이다" 하시며…. 박 교무는 그 귀한 돈을 캄보디아 지뢰 제거 비용에 보태 썼다. 그리고 어머니 이름을 딴 교당을 캄보디아에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