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간첩 - 슝샹후이(熊向暉·웅향휘)

해암도 2014. 12. 28. 07:08

장제스의 옌안 공격 지시, 중공에 ‘중계방송’한 슝샹후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971년 11월, 차오관화(喬冠華·앞줄 왼쪽 첫째), 황화(黃華·앞줄 가운데) 등과 함께 중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유엔본부에 모습을 나타낸 슝샹후이(뒷줄 가운데). [사진 김명호]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처럼 복잡한 관계를 유지한 정당은 유사 이래 없었다. 이유가 코민테른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1919년, 레닌은 무산계급 혁명의 성공을 실감했다. 세계혁명을 목표로 혁명 수출에 나섰다. 집행기구로 모스크바에 코민테른(제3국제)을 신설했다. 전 세계의 무산계급 정당들이 코민테른의 지부가 되기를 희망했다.

햇병아리 정당 중국 공산당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2년 7월, 정식으로 코민테른에 합류했다. 1926년 중국 국민당도 코민테른에 가입을 신청했다. 코민테른은 “1국 1당이 원칙”이라며 거절했다.

국민당은 이듬해에도 참가를 허락해 달라고 소련으로 달려갔다. 국·공연합에 성공했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코민테른의 입장은 변함이 없었다. 지난해와 다른 점은 있었다. 국민당을 공산당에 준하는 정당으로 인정했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에게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중국인으로는 코민테른에서 최고의 지위인 ‘코민테른 중앙집행위원회 명예상무위원’에 임명했다.

이러다 보니 국·공관계가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연합을 했지만, 언제 적으로 갈라설지 몰랐다. 겉으로는 웃고, 뒤로는 항상 으르렁거렸다. 상대방에 자기편을 침투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8년에 걸친 항일전쟁 기간은 가관이었다. 말이 좋아 연합이지 잠복한 첩보원 색출에 기를 썼다. 수천 년간, 겉과 속이 달라야 사람 취급하던 민족이다 보니 피아를 식별하기 힘들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애건 어른이건 무조건 처단했다. 국민당도 마찬가지고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제 명에 못 산 사람도 많고, 성공한 첩보원도 많았다.

슝샹후이(熊向暉·웅향휘)는 학계와 군사정보 계통에서 공인한,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뛰어난 간첩이었다. 연구자의 논문 한 구절을 소개한다. “슝샹후이는 국민당의 심장부에서 지하공작을 펼친 중공의 비밀당원이었다. 국민당 최정예를 지휘했던 후쭝난(胡宗南·호종남)의 옆에서, 그것도 12년간 신분의 폭로를 피해가며 중공의 승리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게다가 손끝 하나 다치지 않고 빠져나와 적의 돈으로 미국 유학까지 떠났다. 학문도 게을리하지 않아 귀국 후 신중국의 외교사와 정보사에 일획을 남기며 평생 부장급 대우를 받았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도 슝샹후이의 말이라면 경청했다. 중요한 일이 발생하면 슝샹후이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무슨 일이건 대책이 있는 사람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총리 감이라며 슝샹후이를 발탁한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안목도 높이 평가했다.”

슝샹후이를 후쭝난에게 침투시킬 때 저우언라이는 신신당부했다. “후쭝난은 항일의 영웅이다. 옆에서 열심히 보좌해라. 공산당과는 연락을 끊어라. 국민당과 우리의 밀월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때에 대비해라.”

슝샹후이는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고전에 능하고 문장력이 빼어났다. 황푸군관학교와 중앙군사학원의 성적도 후쭝난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후쭝난은 슝샹후이가 기초한 연설문이나 보고서가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부관 역할도 결함이 없었다. 후쭝난은 변복 차림으로 순시를 나갈 때가 많았다. 한번은 야외에서 노숙한 적이 있었다. 깨어보니 슝샹후이가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자신을 지켜준 것을 발견했다. 이날 이후로 후쭝난이 가는 곳에는 슝샹후이가 있었다.

1943년에 들어서자 국·공 간에 파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5월 15일 스탈린이 코민테른 해체를 선언하자 장제스는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중공의 무장해제와 근거지 옌안(延安) 공격을 결심했다. 후쭝난에게 밀전(密電)을 보냈다. “코민테른이 해체됐다. 소련은 더 이상 중공을 지원할 생각이 없다. 옌안 공격을 준비해라. 일거에 저들의 근거지를 초토화시켜라.” 7월 2일 부대 배치를 마친 후쭝난은 7월 9일 작전을 시작하겠다고 장제스에게 보고했다.

7월 4일, 팔로군 사령관 주더(朱德·주덕)의 편지를 받은 후쭝난은 경악했다. “코민테른이 해체되자 중앙정부가 우리를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항일을 위해 양당이 힘을 합쳐도 부족할 판에 내전이 발생하면 항일의 대업은 파괴되고 국가와 민족은 위난을 모면할 방법이 없다.”

공산당은 주더가 후쭝난에게 보낸 서신을 언론에 공개했다. “항일을 포기하고 내전을 도모 한다”며 국민당을 비난하는 시위대가 거리를 메웠다. 옌안을 보위하기 위해 전선에 있던 팔로군을 옌안 인근으로 집결시켜도 국민들은 공산당이 항일을 포기했다고 팔뚝질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를 불렀다. 입에 침이 마를 정도로 슝샹후이를 칭찬했다. “몇 개 사단이 할 일을 혼자서 해냈다.” 12년간 이런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슝샹후이는 사교성이 부족했다. 먼저 나서거나 제 발로 사람을 찾아가는 법이 없었다. 아는 사람이 요직을 맡으면 먼저 편지를 보냈다. “네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날까지 너와 연락을 안 하겠다. 단, 어려운 일이 발생하면 나를 찾아라. 한밤중이라도 달려가겠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사망한 후,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과 예젠잉(葉劍英·엽검영), 리셴녠(李先念·이선념) 등도 이런 편지를 받았다. 다들 슝샹후이의 처신과 의견을 존중했다.


김명호   [중앙선데이] 입력 2014.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