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재소자의 어머니' 이명자씨 송년 인터뷰]

해암도 2014. 12. 29. 06:58
  •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되뇌는 출소자 전화…

                                                얼마나 불러보고 싶었으면

  • "'無錢有罪 有錢無罪' 유행시킨 1988년 '탈주범 사건' 김성진씨
    25년刑 후 현재 고물상 일 배워… 자존감 생겨야 나쁜 길로 안 가"

    "사람에 대한 관심이 세상 바꿔, 나 혼자 힘으로만 안 되는 일…
    한 인간 바꾸려면 세월 필요해… 교도소 바깥에서도 교화해야"

한 독자가 '30년간 재소자를 위해 헌신해온 할머니의 얘기를 세상에 알렸으면 한다. 그분을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에 아직도 희망이 있음을 느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렇게 해서 이명자(74)씨를 만났다. 작은 키에 흔히 볼 수 있는 그 나이의 모습이었다.

"우리 나이 때가 되면 백화점에서 비싼 옷 사고 좋은 음식점에 갔던 것을 얘기하잖아요. 그게 잘 살아온 기준이죠. 하지만 저는 '변화'를 보는 게 좋아요. 겨울에 잎이 떨어졌다가 봄에 새싹이 나고 가을 되면 결실을 보는 것처럼…."

목소리는 카랑카랑했지만, 말에 두서가 없는 것 같았다.

이명자씨 사진
이명자씨는 “재소자들은 아직도 늙은 나를 필요로 하니 내가 노후 대책은 잘했다”고 말했다. /성형주 기자

―제가 못 알아들었는데, '변화'가 무슨 뜻이죠?

"어떤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참여하고, 세월이 흘러 그 열매를 보게 될 때 제 기쁨이 있어요. 그런 아이 중 하나가 '탈주범 사건'의 김성진이에요. 그 아이는 25년 살다가 작년 초 출감했어요. 지금 고물상 일을 배우고 있어요."

'탈주범 사건'은 서울올림픽 직후인 1988년 10월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충남 공주교도소로 재소자 12명을 이감하던 중 발생했다. 이 중 일부는 서울 북가좌동 한 가정집에서 인질극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했다. 그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탈주범의 말이 세간에 회자됐다. 현장에서 탈주범들이 틀어놓은 비지스의 '홀리데이'도 그 뒤 한참 유행했다. 인질극을 벌이던 지강헌씨 등 3명은 숨졌다. 김성진씨는 이런 인질 사건이 일어나기 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지하 주점에서 다른 탈주범과 함께 양주를 마시던 중 체포됐다.

"20대에 들어가 오십 가까이에 나왔으니 사회 적응이 쉽지 않아요. 성진이는 '어머니, 내 주위에 있는 출소자들 모두 다시 (감옥에) 들어간 걸 아시죠?'라고 했어요. 제가 '그래, 너 같은 사람이 없어. 대한민국에서 최고야'라고 말해줬어요. '내가 인정받는구나' 하는 자존감이 생기면 나쁜 길로 안 빠져요.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세상을 조금씩 밝게 만드는 거죠."

―감옥에서 출소해도 계속 연락을 해오나요?

"제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줘요.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다고 합니다."

―몇 명과 그런 관계를?

"교도소 교화위원으로 제가 인연을 맺은 재소자들은 600여명쯤 돼요. 출소하면 대부분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싶어 해요. 그래도 이 중 71명과는 연락이 돼요. 대부분 살인 등으로 장기 복역했던 아이들이에요."

―사회에서도 관계를 지속하는 게 찜찜하지 않은가요?

"교화라는 게 교도소 안에서만 아니라 바깥에서도 하는 거죠. 사실은 출감 뒤가 더 중요해요. 이런 아이들은 우리 사회의 낙오자죠. 따뜻한 관심이 없으면 이들은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죠. 한 인간을 바꾸기는 쉽지 않아요. 세월이 필요하고 저 혼자 힘으로만 안 돼요. 주위에서 '당신은 잘할 수 있다'며 아이들의 자존감을 살려줘야 해요. 3년만 그런 울타리가 돼주면 과거의 습관에서 벗어나 재범(再犯)을 하지 않아요. 제 경험에서 이런 확신을 얻었어요."

―이들이 집착과 충동적인 폭력을 보이지는 않습니까?

"술에 취하면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시도 때도 없이 제게 전화를 걸어와요. 달리 하소연할 대상이 없으니까요. '어머니, 죽고 싶어요'라고 외치면, '그래, 죽어라. 거기서 죽어'라고 쿨하게 받죠. 보호자로 경찰서에 찾아가고 치료비나 합의금을 마련해주기도 했지요. 제게도 '죽이겠다'고 덤벼들 때도 있었죠. '이제 나는 살 만큼 살았으니 그렇게 해라'고 말합니다. 다음 날 아이가 풀 죽은 채로 '어머니, 어제는 잘못했어요' 해요. 그렇게 조금씩 변해가죠."

―이들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던가요?

"대부분 집안에서 구박과 학대를 받고 자랐어요. 인간 취급을 못 받았던 거죠. 그런 결핍 때문에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큽니다. 어떤 아이는 전화를 걸어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라는 말만 되풀이해요. 그냥 어머니를 불러보고 싶은 것이죠. 저는 '그래, 그래, 그래' 답하지요."

최보식 선임기자와 이명자씨 사진

―어떻게 이런 일을 30년이나 하게 됐습니까?

"제가 사십 대에 재소자들을 처음 만났어요. 장정들이 저를 '어머니'라고 불렀어요. 순간 '이들이 버림받고 자랐구나. 어머니가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직장에 다니다가 서울시 공무원인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평범한 삶이었다. 서울 서소문 근처에서 고(故) 황해숙 변호사가 출소자들과 공동생활을 하던 한옥에 봉사하러 간 게 전환점이 됐다.

"그 뒤 그분을 따라 서대문교도소를 다녔어요. 당시 변호사님 심부름만 했지 교화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잘못 알려졌는지, 친척 어른이 '영등포교도소에 있는 내 조카도 새사람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해왔어요. 그렇게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교도소에서 '못 말리는 아줌마'라는 소리까지 들었어요."

―저는 의문인 것이…. 얼마나 좋은 말이어야 재소자를 교화할 수 있나요?

"사실 말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에요. 저는 종교 단체(대한성공회)에 소속돼 있으니 '하나님이 어떻고…, 기도합시다'로 시작하지만 이렇게는 안 통해요. 감방 안에서 자기들끼리 쓰는 언어는 바깥 언어와도 달라요."

―그러면 어떻게 교화를 하나요?

"몸으로 표현을 해줘야 해요. 가령 재소자의 생일에 책 몇 권을 포장한 뒤 그 속에 조그만 케이크를 숨겨 가요. '오늘, 네 생일이야' 하고 내놓으면, 그 아이는 '지금껏 이런 케이크를 처음 받아봐요' 하며 울어요. 감방에는 케이크 반입이 안 되니까요. (울먹거리며) 그 감격하는 모습을 보면 속에서 쓰린 마음이 올라와요."

―쓰린 마음이라면?

"아픈 마음보다 더 심한 거죠…. 며칠 뒤 아이가 '어머니, 생전 처음 받아본 케이크에 가슴 아프고도 기뻤어요'라는 편지를 보내와요. 갈 지(之) 자로 본인이 직접 쓰거나, 혹은 다른 재소자에게 대필을 시킨 거죠. 저는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귀한 아들이니 잘 살아야 한다. 정말 고맙구나' 하고 답장을 보내죠. 이때부터 아이들의 마음이 열려요."

―서신 왕래로 대화를 하는군요.

"1시간 반의 교화 때는 재소자 10명이 함께하니 내밀하게 얘기하기가 어렵죠. 편지로 자신의 속내를 얘기해요. '어머니, 저는 나가면 이런 일을 하고 싶어요' '검정고시를 하려는데 이런 책을 보내주세요' '지금 쓰고 있는 안경의 도수가 안 맞아요' 이렇게 하면서 조금씩 치유가 되는 거죠. 답장을 쓰면서 저 자신의 내면도 성숙했어요. 제가 보관하고 있는 편지만 일곱 상자가 돼요."

―출소할 때는 어떻게 도와줍니까?

"감옥에서 나오면 보육원이나 나눔의 집, 달동네 같은 곳을 견학시켜요. '이렇게 사는 아이들도 있단다. 네 한 몸이 어디 가서 못 먹고 살겠나'라고 말해주죠. 그러면 '저는 오늘 뭔가를 느꼈어요' '어머니, 죽음에 대해 생각했어요'라는 말이 돌아와요."

―이들의 언어 구사가 예사롭지 않군요.

"수감 생활 십 몇 년 하면 감방에서 보통 책을 1000권쯤 보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런 지식이 머리에만 있고 가슴으로 내려오지 않았어요. 감정이 굳어 있기 때문이지요. 감정 부분은 이들의 엄마가 못 해줬던 것이지요. 어려서 집을 나와 방황했으니 사랑을 느껴볼 수가 없었죠. 전자 발찌를 차는 것도 이 때문이죠. 이들은 여자를 보면 그냥 욕정을 푸는 대상으로 여기지, 저 여자가 어떤 감정을 갖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몰라요."

―이런 출소자들의 결혼을 주선해줬다는데, 그런 가정이 온전할까요?

"중범죄자들을 겪어보면 나름대로 카리스마와 리더십이 있어요. 사회에 좋은 일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게 잘못된 방향으로 갔던 거죠. 저는 '하지만 너는 좋은 아버지가 될 수가 있다'고 계속 말해줘요. 결혼해서 잘 살아가는 아이도 많아요."

이명자씨가 그동안 받은 재소자들의 편지 사진
이명자씨가 그동안 받은 재소자들의 편지.

―바깥세상에서는 전과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도 꺼리지 않나요?

"제가 남부교도소 취직알선위원도 했어요. 다들 안 받아주려고 합니다. 유일하게 한 식품업체에서는 받아줬지만, 기숙사 생활을 하니까 아이들이 버티질 못했어요."

―왜 그렇습니까?

"감옥에서 이래라저래라 말을 들었기 때문에 또 그런 말을 듣는 것에 넌덜머리를 내요. 개인적으로 하는 장사가 맞아요. 아이들은 고철 장사, 중고차 매매, 목수, 음식점 등을 해요."

―이들을 겪어보니 성선설과 성악설, 어느 쪽이 맞던가요?

"선하게 태어났는데, 어머니의 존재가 없다 보니 악을 선택한 거죠."

―인성(人性)은 본래 선하다고 보나요?

"이들 마음의 바탕에도 선이 있어요. 어떤 재소자는 자신이 받은 영치금으로 불우 이웃 성금을 보내기도 해요. 출소자를 보육원에 데려가면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눈물을 보여요. 선한 생각을 자꾸 하면 자신이 갖고 있던 악한 마음도 변해가요. 저는 그런 확신을 갖고 있어요."

―이들에 대한 동정과 관심은 이해되지만, 다른 한편으로 피해자나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그 가족을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수감 생활이 죗값인데…. 자신의 의지로 한 범죄도 있으나 타의로 연루됐거나 뭘 모르고 한 경우도 있어요. 처음 감옥에 들어오면 나가서 보복할 생각만 해요. 하지만 제가 만난 재소자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얼굴이 변해가요. '내 잘못이었고 죽을죄를 지었다. 그 가족분께 용서의 편지를 쓰고 싶다'고 해요. 그 편지를 제가 대신 전해준 적도 있었어요."

―이렇게 남의 일에 신경 쓰면 정작 본인의 가정을 제대로 돌볼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생전의 남편은 함께 도왔어요. 우리 아이들도 제가 해온 일에 대해 긍지를 갖고 있을 겁니다(웃음). 직접 물어보셔야겠지만."

그는 지금도 첫째·셋째 화요일에는 남부교도소를 찾는다.

"사람이 늙으면 오라는 데가 별로 없지만, 이 아이들은 아직도 나를 필요로 하고 내 말에 귀 기울이고 내게 고마워해요. 노후에도 내 할 일이 있는 거죠. 제가 노후 대책을 잘했다고 봐요."

사람에 대한 관심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그 결과는 쉽게 드러나진 않겠지만. 한 해가 저물었다.


  • 최보식
    편집국
    E-mail : congchi@chosun.com
    선임기자
  • 입력 : 2014.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