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에서 민간인이 되다
2003년, 직업군인이 되어 고향인 전주를 떠났던 첫 날이 떠오른다. 젊었고, 패기가 있었기에 오래도록 군복을 벗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시작한 직업군인의 삶. 꼬박 7년 4개월이었다. 강원도 삼척에서 5년, 서울시에서 2년 4개월. 군인으로의 삶은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본연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숨길 수가 없었다. 민간인이 되면 그 그리움이 덜할까 싶어 전역을 결심했다. 덜컥 전역행을 선택한 성환씨는 도시에서의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보기로 했다. 자신만 바라보는 두 아이와 아내가 있어 한 치의 쉴 틈이 없었다. 하루 빨리 다시 일을 시작해야 했다.
전역 후 경기도 남양주로 이사한 성환씨는 사람 만나는게 좋았던 그만의 특성을 살려 병원마케팅에 나섰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마케팅이란 직업은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옷을 입고 있는 것 마냥 흐느적 거렸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보자 했던 용기는 조금씩 터덕거렸다.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욕망은 점점 커져갔다. 아이들이 커 가면서 농촌에서 살아보자 결심했다.
도심의 흐린 하늘 아래서 아이들이 뛰어 놀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농촌으로 돌아가려니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준비에 앞서 가구 만드는 일을 배웠다. 무엇이든 잔재주가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1년 6개월, 뚝딱뚝딱 이것저것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농촌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 같아 열심히 배웠다.
수도권귀농학교에서 답을 찾다
군인에서 민간인이 되고, 도시에서의 갑갑한 삶을 살면서도 농촌으로 돌아가리라는 열망은 놓지 않았던 성환씨. 그는 농촌으로 가는 길을 무작정 찾아다녔다. 도움이 되는 교육이 있으면 어디든 참여했고, 전화해서 물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그 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2013년, 전라북도귀농귀촌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전라북도수도권귀농학교’도 참여하게 되었다.
“수도권 귀농학교는 무작정 귀농을 준비하는 저에게 좋은 기회였지요. 저처럼 귀농준비과정에 계신 분들을 만났고,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분야에 대해 많은 준비를 하시는 것을 보고 솔직히 놀랬습니다. 그 분들을 보며 아직은 먼 얘기인 것만 같던 귀농이 현실로 다가왔고, 제가 놓치고 있는 게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좀 더 많은 교육과 많은 사람들을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용기도 생겼지요. 지역을 알아보고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 멘토와의 깊은 대화는 조금 더 농촌에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해 주었지요."
무작정 들이쳤다가는 큰 코 다치기 십상
수도권귀농학교의 교육수료 후 꿈에 대한 실현은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이미 귀농을 생각하고 마음을 굳힌지라 농촌으로 가는 마음은 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 돌아갈 지역은 처가가 있는 임실로 정했다. 한평생을 농부로 사신 장인어른과 그의 터전, 그리고 그 공간이라면 조금 더 빨리 농촌에 정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올해 2월, 그는 임실군 덕치면 주민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 시작부터 있었다. 집이 필요했다. 성환씨와 아내, 두 아이가 두 발이라도 뻗고 잘 수 있는 작은 보금자리. 방 한 칸이라도 좋겠다 생각했지만 막상 빈집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다. 실제로 비워져 있어도 외지인에게는 집을 팔거나 빌려주지도 않았다. 그런다고 뒤로 물러설 수만은 없었다. 더욱 이를 악물어야 했다. 성환씨는 1125제곱미터의 농사지을 땅 한 켠 에 가족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이 덮혀 줄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가장으로서 가진 미안함은 그 무엇으로든 해결될 수 없었지만 성환씨에게는 꿈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남들이 잘하지 못하는 것에 승산을 걸다
“미래농업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공부했어요. 공부하다보니 2020년쯤의 농촌과 우리나라는 어떨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요즘 매스컴에도 자주 등장하듯이 우리나라도 식량부족국가가 될 것이라는 말들이 나올 때마다 내가 시골에서 농사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앞으로의 전망으로는 무엇이 좋을지를 끊임없이 생각했지요. 결론은 곤충이었습니다. 그렇게 굼벵이와 만나게 됐지요. 그 때의 제 선택은 지금도 후회 없어요.”
그렇게 시작했다. 굼벵이와의 새로운 삶을…. 무작정 덤벼든 건 아니었다. 날마다 농가를 쫓아다녔다. 경기도 남양주에 굼벵이농사를 짓는다는 한 농가를 찾아 밤낮을 드나들었다. 기술은 아무데서나 배워도 되었지만 그 농가가 나와 맞는지, 또 그 농가가 기술을 전수해주려는지 의도를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마침 남양주의 멘토와는 굼벵이에 대한 애정과 진실성이 같았다. 쿵하면 짝. 함께 가는 사람이 좋으니 굼벵이농사에 대한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여보게 박서방, 굼벵이로 되겠는가?
그러나 생각만큼 이루어지는 것도 마음대로 되는 것도 없는 게 당연지사. 이 문제는 농촌으로 오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문제점이었다. 처가동네로 들어오면서 성환씨는 온동네 박서방이 되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오다가다 한번씩 들러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여보게 박서방, 굼벵이 그게 뭔가 그걸로 뭐할랑가? 그걸로 먹고살 수 있겄는가?”
“여보게 박서방, 그건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여. 왜 일을 그렇게 하나?”
관심은 그대로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을 믿어주지 않는 마을 어르신들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일. 그대로 물러 설 수만은 없었다. 마을어르신들이 찾아오면 무조건 친절하게 답해드렸다. 일손이 필요하실 때는 자투리 시간이라도 도와드리려고 노력했다. 일하는 도중 갖는 새참시간에는 자신이 왜 굼벵이를 선택했는지, 앞으로의 미래농업에 왜 굼벵이가 필요한지를 살포시 막걸리 위에 얹어 설명해 드렸다.
성환씨의 태도가 바뀌니 어르신들은 하나 둘 굼벵이에 대한 그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이후 성환씨의 하루하루는 잊지 못할 기억들로 차곡차곡 채워져 갔다. 하우스가 완공된 날, 굼벵이들이 처음으로 농장에 들어온 날 모든 날들이 새로웠고 신기했다.
굼벵이는 나의 희망, 나의 꿈, 나의 미래
앞서 얘기한대로 성환씨가 찾아가 기술을 배운 곳은 경기도 남양주의 한 곤충농장이었다. 농장의 대표는 성환씨와 2살 터울의 선배로 굼벵이에 대한 남다른 철학과 기술을 갖고 있었다. 성환씨는 그를 멘토삼아 그야말로 열심히 배웠다. 애완곤충보다 배우기도 키우기도 더 어려운 굼벵이는 전국에서도 사육하는 농가가 별로 없다. 식용곤충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귀한 기술과 정보였다. 예전에는 흔히들 곤충, 특히 굼벵이 하면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곤충산업이 고성장하면서 성환씨의 미래도 조금 더 밝아지고 있다.
성환씨는 올해 5월 초, 50kg의 굼벵이를 농장으로 데려왔다. 현재 농장의 규모는 약 60평정도의 하우스 3동. 2동은 사육동이고 1동은 작업동과 사무실로 쓰고 있다. 잘 키운 굼벵이들은 9월말 출하를 앞두고 있다. 물론 귀농 첫해인 올해는 순수익을 계산하기는 어렵다. 투자비와 유지비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굼벵이의 판로를 위해 내년에는 200kg의 모충을 할 예정이다. 올해는 그저 멘토만 따라가고자 한다. 굼벵이는 사실 그리 많은 기술이 필요친 않는다. 앞으로 성환씨는 자신만의 방식을 연구해 굼벵이를 키우고자 하는 사람들과 공유할 예정이다.
사람답게 살자
그의 평생목표는 ‘사람답게 살자’ 는 것이다. 성환씨의 귀농시기는 큰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할 시기였다. 아이들이 시골의 흙을 밟고 새까맣게 자라는 걸 보고 싶었다. 8살난 큰 아이는 인근 덕치초에서 배움을 시작했다. 총 26명이 정원인 학교에선 모두가 형제처럼 지낸다. 아이들은 학교가 즐겁다고 했다. 덕치초 병설유치원에 다니는 작은 아이도 아침이면 제일 먼저 일어나 부지런을 떤다. 배움을 놀이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을 보며 성환씨는 괜시리 뿌듯해진다.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아이들에게도 조금 더 떳떳해진 아빠가 될 수 있음을 새삼 느낀다.
귀농 후 가족과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같이 있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싸우는 시간도 행복해 하는 시간도 많아졌으니 그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귀농 1년차 성환씨는 이제야 한숨 돌리며 말한다.
“귀농은 만만하게 봤다가는 큰 코 다칠 게 뻔합니다. 나름 완벽하게 준비하고, 생각하고, 고민했다라고 자부했지만 부족한 점은 턱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해보지도 않고 두려워만 한다면 그 미래는 바뀌지도 않습니다. 귀농을 마음먹으셨다면 준비하고 쫓아다니고 배워야 해요. 가장 중요한 것부터 한가지씩 결정하시고 마련하세요. 그럼 이루어질 것입니다. 가장 바랐던 제2의 인생이
그렇다면, 귀농 새내기가 바라보는 농촌의 미래란 어떨까.
“온 마을의 대부분 주민들이 60대 이상 어르신들입니다. 청년이라고 불리는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솔직히 농촌의 미래는 불안합니다. 정부에서 아무리 정책을 지원하고 농촌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고 하지만 정작 농촌에서도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빈집과 농지를 알선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줘야 그 지역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결국 농촌에는 사람이 사라질지도 모르지요.”
농촌의 현실과 미래를 생각하며 귀농이란 제2의 인생에 뛰어든 성환씨. 그리고 그 인생에 가장 중요한 매개체가 된 굼벵이. 유쾌함이 몸에 베인 그와 느릿느릿한 굼벵이와의 관계가 앞으로도 기대된다. 사람답게 살자는 그의 바람대로, 굼벵이가 그 꿈을 실현시켜 주리라 믿으며….
자료제공·전라북도 귀농귀촌 지원센터